교회의 중산층화, 교회의 진짜 적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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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중산층화, 교회의 진짜 적은 따로 있다
  • 김광남
  • 승인 2021.01.0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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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남 칼럼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세상의 그 어떤 조직이나 단체도 교회만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갖고 있지 않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이들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른다. 그 형제와 자매들은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늘 딱 거기까지만이다. 그럴듯한 신앙고백까지만.

교회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내가 아는 어느 형제는 요즘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 한 달 한 달 버티는 게 기적이다 싶을 정도다. 어느 자매 하나는 치유하기 어려운 질병 때문에 큰 고통 속에 있다. 반면에 어느 형제 하나는 이 팬데믹 상황에서도 여전히 아주 잘 나가고 있다. 요즘 그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는 듯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다른 형제 하나는 여느 때처럼 아무 일 없이 안정적이고 평온하다. 사춘기 자녀들의 문제 외에는 큰 고민거리가 없다. 글밥 먹고 사는 나는 늘 그랬듯이 그냥저냥, 겨우겨우, 허덕허덕,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교회 안의 형제와 자매들은 서로를 잘 안다. 자주 한 공간 안에 모여 시끌벅적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대화는 잘 나가는 이들이 주도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잘 사는 이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다. 만나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반면에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밥벌이조차 힘든 경우가 많다. 뭔가를 하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니 대화는 늘 하는 게 많고 만나는 사람들이 많은 이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 여유가 없는 이들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맞장구나 치고 간혹 와, 하며 부러운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다.

잘 사는 이들은 자기가 대화를 주도하는 모임이 즐겁다. 그러니 자꾸 이런저런 모임을 만들려 한다. 반면에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그런 모임 자체가 그다지 즐겁지 않다. 생각해 보라. 사는 게 고통스러운 이들이 겨우 시간 내서 모임에 참석했는데 모임 시간 내내 여유 있는 이들의 자기 자랑이나 듣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뭐가 그리 즐겁겠는가. 그러니 그런 만남이 반복되다 보면 자연히 어려운 이들은 떨어져 나가고 여유 있는 이들만 남는다. 그렇게 남은 자들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 형제(혹은 자매)는 믿음이 없었나봐.” 그러나 약한 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강한 자들이 교묘하게 아니 의도치 않게 그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아서다. 어떤 이들의 부요함은 가난한 이들을 말없이 밀어내는 창과 방패가 될 수 있다.

이상이 내가 관찰하고 있는 바, 오늘의 교회가 점점 중산층 신자들의 서클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언젠가 팬데믹은 끝날 것이고 교회는 예전처럼 다시 모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교회의 중산층화는 계속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점점 더 가속화 될지도 모른다. 뜬금없어 보이겠지만, 나는 오늘의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도전은 코로나19가 아니라 중산층화라고 여긴다. 만약 교회가 지금 국가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듯 중산층화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팬데믹 이후의 교회는 ‘굳이 회복될 필요가 없었던 교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먹고 살만한 신자들이 모여서 새로 이사한 아파트 자랑, 얼마 전에 바꾼 신형 자동차의 성능 자랑, 최근에 다녀온 해외 여행지 자랑, 지난 주 라운딩 때 이뤄낸 골프 스코어 자랑이나 하는 교회를 굳이 회복시켜서 뭐할까?

작년 겨울에 번역한 초대 교회에 관한 책에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 200?-258)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키프리아누스는 회심하기 전에 아주 잘 나가는 부유한 귀족이었다. 그는 자신이 회심한 후에 겪은 일 중 가장 어려운 것이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를 정말 힘들게 했던 것은 교회가 회심자들에게 요구했던 것, 즉 절제하고 검약하는 삶이었다.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 기름지고 맛난 음식을 먹지 않는 것, 좋은 옷을 입지 않는 것, 유력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

요즘 교회가 신자들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고 요구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교회는 점점 더 세상의 하위문화들 중 하나로 전락해갈 것이다. 무슬림과 동성애가 교회의 적이 아니듯, 팬데믹도 교회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팬데믹은 교회를 위한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늘 그랬듯이, 교회의 진짜 적은 따로 있다. 요즘 나에게 그 적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교회의 중산층화’로 보인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0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김광남(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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