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 가슴 판에 하느님 말씀을 새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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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 가슴 판에 하느님 말씀을 새긴 사람
  • 최태선
  • 승인 2020.12.23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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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이제민 신부님의 책이 나왔습니다. 이십여 년 전 이신부님의 책을 처음 만난 건 제게 정말 은혜였습니다. 제가 바오로딸 서점에서 개신교가 인정하지 않는 부분들을 강조한 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책들을 읽게 되면서 알게 된 신학자이며 사제인 분입니다. 피에르 신부님이나 엠마뉘엘 수녀님과 테레사 수녀님과 같이 신앙의 삶을 사는 분들과 한스 큉이나 칼 라너, 게하르트 로핑크와 같은 신학자들, 그리고 두 분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등과 같은 영성가들이 모두 제게 귀한 스승들이 되었지만 이제민 신부님과 송봉모 신부님은 한국인으로서 제게 좀 더 생생한 가르침을 주신 분들입니다.

저자 하나를 알게 되면 그 저자의 책을 모두 읽는 제 독서습관 탓에 이제민 신부님의 책들도 아마 거의 다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 책이 한 권 나왔다는 소식이 반가웠습니다. 그 책을 소개하는 글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제의 손에 인류의 미래와 희망이 걸려 있다는 외침은 많은 이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은 그 누구보다 부르심과 응답을 되새기며 사제의 신원을 성찰하고, 인류를 원천으로 안내하는 복음과 그리스도의 삶을 성찰하는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그 누구보다 먼저 회개해야 할 사람도 그들이고 독선과 위선의 삶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이도 그들입니다. 그들은 그 누구에 앞서 인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해야 합니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리>, 이제민 신부, 바오로딸, 177쪽)

사제의 손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저자는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 자신이 우려하는 것처럼 제게는 이해와 함께 거부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가톨릭이 가지는 한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복음 이해가 제가 가톨릭으로 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는 고의로 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가톨릭이 계속해서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개종이라고 주장한다면 저는 가톨릭 스스로 가톨릭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복음은 결코 닫혀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역사는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 그 남은 자들이 사제들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제들이 남은 자들이 아니라는 주장과 같습니다. 엘리야는 호렙 산 동굴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는 주의 언약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오직 자신밖에 안 남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야훼의 말씀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을 맞추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남기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칠천 한 명의 남은 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 칠천 한 명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들이 누구인지는 성서가 소개하거나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야훼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 칠천 명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의 전기는 제자들의 기억 속에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그 전기 속에는 프란치스코 자신만이 예수의 제자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예수의 제자는 결코 자신만이 남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역사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그 하느님 나라의 작은 공간에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민 신부님은 가톨릭이라는 부대 안에서 복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계속해서 새 부대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새 부대가 낡은 부대가 됩니다. 그래서 복음은 끊임없이 새 부대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헌 부대가 되어 새 술을 담을 수 없는 헌 부대가 되었습니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개신교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신학자 마르바 던으로부터 현존하는 교회 가운데 가장 성서적인 교회라는 평을 들었던 메노나이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바 던의 말 가운데 ‘현존하는’이라는 표현이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 역시 그리스도인 개인과 마찬가지로 시공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언제든 현존하는 새 부대인 교회가 헌 부대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최근 몇 년간 저는 동방정교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책들이었습니다. 친구의 아내가 동방정교 대주교의 설교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어 대주교의 비서신부님을 통해 책을 소개받고 그 책들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 가운데 <비잔틴 신학>이라는 책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주류가 가톨릭이 아니라 정교회라는 주장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초기교회를 공부하면서 교회의 변질이 신앙의 자유 이전인 2세기에 주교들의 권위가 강화되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전적으로 동감하였습니다. 초기교회 역시 헌 부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 끊임없이 복음은 새 부대를 요구합니다. 거기서 전통은 매우 중요한 새 부대의 구성요소입니다. 하지만 전통 자체가 새 부대임을 계속해서 주장한다면 그것은 모세의 구리뱀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우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대주교가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헌 부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권위가 없는 섬김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나라에서 그 어떤 권위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이력을 내세워서도 안 됩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간 앞에 언제나 맨발로 서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백성의 삶의 태도이며 그러한 자세를 가질 때만이 하느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던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경험과 지식을 벗어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임하는 하느님의 말씀 앞에 맨발로 설 때만 인간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저의 복음이해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제가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집도 절도 없는 겨우 명목만 목사인 자가 역사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꿈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시공에 얽매이지 않고 온 우주를 품고 사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의 제자입니다. 남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어느 한 모양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제민 신부님처럼 사제로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목사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처럼 시골교회 종지기인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작은 좁쌀이라고 했던 장일순 선생님도 그런 분일 것입니다. 특히 무명의 세이비어교회 성도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분들의 무명성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남은 자들의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느 곳에 어느 모양으로 있던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가슴 판에 하느님의 말씀을 새긴 사람은 인류의 미래와 희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제도 목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책에서 자신에게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 열 명을 준다면 세상을 바꿔 보이겠다고 한 말이 떠오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말한 의인 열 명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바로 이 의인입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나’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이제민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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