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손해 보며 살아야 심간心間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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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손해 보며 살아야 심간心間이 편하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2.01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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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7

예술심리치료라는 걸 배우기 시작한 지 어느새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 후배의 권유로 시작한 공부였는데, 예술치료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과 영 딴판인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의 시대나 지금이나 사회적 질병이 개인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치료받아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에는 숙원하던 1급 치료사 자격증도 얻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치료사로서 성장해야 할 책무가 따르는 일이기에 걱정도 함께 늘어났지만, 나의 의식이 성장하는 만큼 세상과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루 좋은 일일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 다독거린다.

예술치료 임상을 하다 보면, 유난히 말이 많은 내담자가 있다. 치료계획을 세우기 전에 행하는 사전 인터뷰에서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두 시간이 세 시간 되고, 결국 인터뷰를 한 번 더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내담자는 아마 내가 아니라도 좋았을 것이다. 누구라도 귀를 열어 놓고 차분히 앉아서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며칠 밤낮이든 그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럴 때는 계획된 프로그램을 접어두고 당분간 그가 토해 놓은 말을 담아 줄 필요가 있다. 내담자가 제 사정을 호소하는 그 자체가 치료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담자에게 물어본다. “전에도 남한테 이렇게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있나요?” “처음인데요…….”

생활 속에서 불안정한 시선으로 장황하게 늘어놓는 입담을 인내심 있게 들어 주기란 쉽지 않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이야기에 몰두하고, 필요한 의사만 소통한다. 여럿이 모이면 아귀가 맞는 사람들끼리 왁자하게 떠들게 된다. 상대방의 공감 여부를 따질 틈도 없이 제 말만 되풀이하는 분위기가 어색한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뜨게 된다. 그는 적어도 그 자리에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치료사들의 경우에는 내담자의 사정을 듣고 파악하고 심리적으로 돕기 위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라 해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 때로 피곤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게 그 사람의 직분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하는 존재감은 사실 세상의 어떤 재물보다도 절실한 것이다. 존재감이 없는 사람에게 다른 소유란 쓸모없는 것이다. 예수가 치유했다는 나병 환자들 역시 나병으로 겪는 괴로움만큼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피차간에 좋았을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 나병환자를 고쳐 주고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깨끗해진 것을 증명하라고 이르신 까닭은 여기에 있다. “나도 어엿한 사람이 되었다”고 선포하라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예수는 그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예수는 자신의 권능을 보란 듯이 증명하기 위해 나병 환자를 도구로 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말한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우리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무엇으로 밥을 먹든지, 그 일을 하게 되는 동기에는 순수한 열성이 담겨야 한다. 그래야 밥을 먹더라도 영혼마저 건강해지는 것이다. 한밤중에 찾아온 위급한 환자에게 진료비를 챙겨오지 않았다고, 다시 병원 문을 닫고 안채로 들어가는 의사의 뒷모습을 보았던 사람은 평생 의사를 경멸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가 마음 저 바닥에서부터 깨지는 순간이며, 육신뿐 아니라 영혼마저 상처받는 순간이다.

세상이 각박해서, 사람들은 철들면 제 것부터 챙기게 된다. 남에게 상처 줄 마음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상처를 남기는 사람도 많다. 고운 무늬로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동정심을 닫아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주 광대정 산골에 처음 살러 들어갔을 때, 이사를 도와주었던 어느 수녀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좀 손해 보면서 살아야지’ 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심간(心間)이 편하고, 세상이 살 만할 것이라는 말씀. 내가 먼저 풀어 놓지 않으면 세상은 문을 닫아건 채로 남을 것이고, 내가 먼저 문을 열면 세상도 지긋이 빗장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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