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 세례받지 않은 가톨릭 신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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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세례받지 않은 가톨릭 신비주의자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1.22 2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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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불꽃을 피운 성자, 시몬 베유-3

신비주의로 가는 길

1937년 여름 베유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와 아시시, 피렌체 등을 방문했다. 밀라노에선 노동자 거리를 거닐었으며, 피렌체에선 메디치 가의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았다. 가장 매혹적인 것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의 아시시 마을이었다. 다정한 심성을 소유했다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은 소박하고 정숙했으며, 한 편의 시를 대하는 듯 했다. 프란치스코의 삶 자체가 시였다. 성인은 이 아름다움을 완성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eli)에서 베유는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1938년 봄에는 그레고리안 성가로 유명한 솔렘(Solesmes) 수도원에서 사순절을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체험은 어느 영국인 가톨릭신자를 만나고서 17세기 영국시인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의 <사랑>(Love)이라는 시는 아예 외워서 두통이 심할 때마다 혼을 실어 암송하곤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베유를 사로잡았다는 영적 체험도 이 시를 외울 때 발생했다고 한다.

“사랑은 내게 오라 하나
죄로 더럽혀지고 추악한 내 영혼은
뒷걸음질 치네.
그러나 사랑은 기민한 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저하는 나를 보시고
다가와 다정히 물으시네.
행여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이 몸은 여기 어울리는 손님이 아니라 대꾸하니
사랑은 말씀하시길, 그대가 그 손님이라.
오, 사랑이시여, 배은망덕하고 인정머리 없는
이 자가 말입니까?
저는 당신을 바라볼 수조차 없나이다.
사랑이 내 손 잡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시길,
나 아니면 누가 그 눈을 지었겠느냐?
그렇습니다, 주여. 제가 그 눈을 더럽혔나이다.
제 수치에 어울리는 자리로 가게 하소서.
사랑이 말씀하시길, 누가 멍에를 졌는지
너는 모르느냐?
사랑이시여, 그럼 제가 시중을 들겠나이다.
사랑이 말씀하시길,
너는 앉아 내 살을 먹어야 한다.
하여, 나는 앉아서 먹었네.
그럼에도 사랑하기를 계속한다면”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고, 1939년 독일군이 프랑코 정권을 승인하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1940년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고, 베유는 그해 10월에 마르세유(Marseille)로 갔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고요한 침묵 속에서 놀라운 정신적 작업을 수행했다. <노트>, <신을 기다리며>, <전(前)그리스도교적 직관>, <그리스의 기원> 등을 썼다. 1941년에는 마침 마르세유에서 열린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참석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공장이라는 황량한 환경 속에서 깨어있는 정신을 발견했다. 노동계에 스미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진리를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결정적으로 도미니코 수도원장 페렝(Perrin) 신부를 만났다. 페렝 신부는 동물적인 공격성을 지니지 않았다. 베유는 페렝 신부를 만나러 갈 때 “빵을 걸식하러 가는데 이곳에서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 걸인의 심정이었다”고 고백했다. 베유는 도미니코회의 기관지에 <노예가 아닌 노동의 첫째 조건>이란 글을 게재했다. 베유는 여기서 노동의 단조로움을 인내하려면 영원한 빛이 필요하고, 노동이 아름다움을 회복하려면 ‘시(詩)’와 같은 종교에 귀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베유는 페렝신부가 “젊은 유대인 교수로서, 정부명령으로 학교에서 쫓겨난 좌익투사인 한 여성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써줘서 아르데슈(Ardèche)의 농민 철학자 구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을 만났다. 티봉은 “현미경의 한계를 초월하는 정신의 세계를 모르면 인간에게 맞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철학자였다. 그는 밭이나 길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노트에 정리하고 있었다. 베유는 단순히 ‘아는 것’과 ‘온 신경을 집중해서 아는 것’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동을 하고 싶어했다.

베유는 밭일이 끝난 저녁이면 티봉과 그리스어 공부를 하고,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를 그리스어로 바꾸어 암송했다. 베유는 포도 따면서도 일과처럼 주님의 기도를 암송했다. 티봉에게 청해서 다른 집 포도를 따게 되면서, 포도원 주인은 “이만하면 농부 며느리도 되겠다”고 했지만, 허약했던 베유는 티봉에게 “지옥에서도 영원히 포도 따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세례받기를 주저하다

페렝 신부는 시몬 베유의 세례를 기대했다. 하지만 베유는 세 차례에 걸친 편지에서 자신이 세례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베유는 “인류의 대부분이 유물론에 빠져 있는 지금 시대에 하느님께서 당신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되 교회 밖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다.

“제가 입교한다고 생각하면, 저 많고도 불행한 무신론자들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제일 괴롭습니다. 온갖 계층의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지내고,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한 그들과 똑같은 모습을 취하고, 저는 그들 속에 묻히고 그들은 제게 꾸밈없이 그들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제게는 있습니다. 그것이 제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사랑하는 대상은 그들이 아니요, 제 사랑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시몬 베유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거리보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가톨릭 신자들과 불신자 사이의 거리가 더 멀고 벽이 또렷하다고 믿었다. 베유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도 천국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교회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싸잡아서 거부하는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씀을 교회 출석 여부를 떠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그분의 정신을 널리 전하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그분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께 충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듣는다. 이런 점에서 시몬 베유는 신앙과 교회를 구분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구분했다.

“저는 하느님, 그리스도, 가톨릭신앙을 사랑합니다. 비참하리만큼 미흡한 피조물도 그런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한에서요. 저는 성인들이 남긴 글과 성인전에서 본 그들의 모습을 사랑합니다. 단, 온전히 좋아할 수 없거나 도무지 성인으로 보이지 않는 이도 몇몇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전례, 성가, 건축양식, 예식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엄밀한 의미의 교회에는 한 점의 애정도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으나, 저 자신이 그 사랑을 느끼진 않습니다.”

한편 베유는 사회구조가 된 교회를 문제 삼았다. 베유 자신은 집단적인 데 잘 휘둘리는 성격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만약 이 순간 독일청년 스무 명이 앞에서 나치스의 노래를 부르면 자신의 영혼 일부나마 당장 나치스가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 존재하는 애국심이 겁난다고 말했다.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감정인데, 그런 애국심은 치명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재판을 용인했던 성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성인들은 몹시 강력한 어떤 것에 눈이 멀었던 것인데, 그게 바로 ‘사회구조로서의 교회’다. 성인조차 그렇다면 “한 없이 연약한 저 같은 인간에겐 얼마나 해롭겠느냐”고 베유는 묻는다. 베유는 교회 문턱에 자신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조에 부스케
조에 부스케

1942년에 또 다른 중요한 만남이 있었는데, 카르카손의 조에 부스케(Joë Bousquet, 1897-1950)였다. 부스케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8년 5월 27일 바이이 전투에서 독일군이 발포한 탄환에 척추를 관통당해 하반신 불구가 되어 평생 자택 침실에서 보낸 시인이며 소설가였다. 열정적인 대화를 나누고서, 나중에 부스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유는 “당신은 세계의 현실을 고스란히 자신에게 실재시키는 특권을 지녔습니다.”라고 했다. 그 몸에 ‘전쟁’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불행을 몸에 못처럼 깊이깊이 박아넣어 그것을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고가 그것을 줄곧 뚫어지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함을 지니기까지, 그것을 오래 지녀야만 합니다.”라고도 했는데, 시몬 베유는 세계의 불행에 진실로 공감하며, 불행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살해당하면서, 세상 끝까지 고통으로 번민한 예수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 글의 축약본은 <가톨릭평론> 2020년 11-12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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