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투에서 지치지 않고" 프란치스코 교종이 미국주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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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투에서 지치지 않고" 프란치스코 교종이 미국주교들에게
  • 교종 프란치스코
  • 승인 2016.07.1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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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미국교회 방문시 교종의 연설

최근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주교들이 연이어 탄생하는 기쁨을 맞이했다. 지난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미국교회를 방문하셔서 주교들 앞에서 행한 연설은 이들 주교들과 사목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발언을 많이 하셨다. 한국교회의 주교와 사목자들이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듣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한상봉

사랑하는 형제 주교들에게

저는 사목자들인 여러분을 사랑으로 바라보면서, 여러분들이 사랑의 책임을 수행하고 있는 이곳의 모든 지역 교회들을 포옹하고자 합니다. 이 거대한 나라의 하느님 백성들에게 저의 사랑과 영적인 친밀함을 여러분께서 나누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교종의 마음은 모든 사람을 품기 위하여 넓어집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증언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전 인류를 끌어안으셨던 분의 대리인이며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종들에게 맡겨진 사명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북아메리카인들이 교종의 포옹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끼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말해지는 모든 곳에서, “그분은 구원자이십니다!” 라고 단언하는 교종의 목소리가 또한 들리기를 바랍니다. 거대한 대서양 해안의 도시들로부터 중서부의 평원까지, 남부 끝에서부터 서부의 오지 끝까지, 여러분들의 백성이 성찬례에 모이는 곳마다, 단순히 이름에 그치지 않고 그 실존이 실제로 느껴지는 교종,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열렬한 염원을 간직하며 “오십시오, 주님”이라고 외치는 그런 교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그 손이 나이와 함께 주름살이 많아도,
교종은 여러분의 손을 잡습니다"

여러분의 손이 선을 행하거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이기 위하여 뻗어나갈 때마다, 눈물을 닦아주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며, 길을 잃은 사람에게 길을 보여주거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해 줄 때마다, 넘어진 사람들을 도와주고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용서하거나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출발을 안내해 줄 때마다, 교종이 여러분 옆에 있으며 여러분을 지지할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교종은 여러분의 손을 잡습니다. 비록 그 손이 나이와 함께 주름살이 많아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여전히 교종은 여러분을 지지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 저는 북아메리카 교회가 생명과 가족이라는 명분에 한결같이 결단을 내리고 있음에 감사하며 이것은 현재 저의 방문에 있어서도, 중요한 목적입니다. 저는 계속 북아메리카에 오기를 희망하는 이민자들을 여러분들이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민자들은 그들에 앞서 이 나라에 온 수많은 다른 이민자들처럼 자유와 풍요로움의 축복을 누리고자 하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여러분이 모든 다양한 차원의 학교를 통하여 교회의 교육사명을 수행하고 수많은 기관에서 애덕의 섬김이 실천되는 것에 또한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어떠한 감사나 지지도 없이, 자주 영웅적인 희생에 의하여,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거룩한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수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이 나라의 최근 교회 역사에 어려운 순간들이 닥쳤을 때 여러분이 두려움 없는 자기-비판 그리고 극기와 큰 희생을 치르며 용기 있게 대면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권위를 다시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직분자들에게 요구되고 신자들이 정당하게 기대하는 신뢰를 얻기 위하여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벗어버렸습니다. 저는 최근 수년간 여러분이 짊어져야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희생자들을 치유하기 위한 여러분의 관대한 투신을 지지해 왔습니다. 그것은 치유하는 가운데에 우리 역시 치유 받는다는 깨달음에서였고 그러한 범죄들이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서 낯선 사람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로마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또 다른 아메리카 대륙에서 왔습니다. 보편 교회의 일치를 지켜보고 모든 지역교회들이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믿음과 사랑이 더 성장하는 여정을 사랑으로 격려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 저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낯선 사람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저 역시 넒은 초원들이 있는 거대한 땅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그곳 역시, 여러분의 경우처럼 신앙을 순회하는 선교사들에게서 받았습니다. 저 또한 다양한 세계 나라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이 여정은 시련의 긴 여정이므로 마음이 자주 굳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평원 한 가운데에, 산악 지역에, 도시와 자주 황량한 땅 주변에 교회를 세우려는 노력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선구자들은 항상 임시적인 상황에 있으며 쉬운 대답은 늘 찾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필요한 것은 선구자들의 영웅적인 투쟁과 정착한 사람들이 지닌 소박한 지혜, 끈기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의 한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강하고 지치지 않는 날개들”이 “산을 알고 있는” 사람의 지혜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제 목소리만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선임자들의 말씀을 이어 받아 말씀드립니다. 아메리카 혁명에 이은 이 나라의 탄생에 즈음하여 첫 번째 교구가 볼티모어에 세워졌을 때부터 로마 교회는 항상 여러분 가까이에 있었고 여러분은 로마 교회의 한결 같은 도움과 격려를 충분히 받아왔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교종들이 여러분을 방문하였고 괄목할만한 가르침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교종들의 말씀은 적절하게 함께 머물며 여러분이 이 나라의 교회를 위하여 세워 놓은 장기적인 목표를 고무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무슨 계획을 제시하거나 어떤 전략을 고안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판단하거나 강의를 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요한 14,26)분의 목소리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다만 제가 사랑의 자유 안에 형제들 가운데에 형제로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여러분 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싶은 의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저는 다시한번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로 돌아서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래된 것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과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들을 찾는 것이고 행동할 때 가져야 할 정신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 통찰을, 결코 완전하다고 주장할 마음 없이, 나누고자 합니다.

가장 큰 기쁨은 갈라지지 않는 마음과
이타적인 헌신을 지닌 사목자가 되는 것

우리는 교회의 주교들이고, 하느님께서 그분의 양떼를 돌보기 위하여 지명하신 목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목자가 되는 것이고, 갈라지지 않는 마음과 이타적인 헌신을 지닌 오로지 목자, 사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간직해야 하며 절대로 우리 자신에게서 이런 기쁨을 빼앗으면 안됩니다. 악은 사자처럼 포효하고, 그 기쁨을 먹어치우려고 호시탐탐 노립니다. 악은 하느님의 초대받은 목자가 되려는 우리의 결심을 약화시키려고 합니다. 목자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1베드 2,25) 분을 섬기고 그분이 주신 은총 속에서 존재합니다.

우리 정체성의 핵심은 끊임없는 기도, 말씀의 가르침(사도 6,4)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것에 있습니다(요한 21,15- 17; 사도 20,28-31).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또 다른 종류의 기도에 그쳐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와 친밀한 일치를 이루고 그 안에서 매일 그분의 눈길과 마주치고 그분이 우리에게 묻는 다음의 질문을 깨닫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인가? 누가 나의 형제들인가?”(마르 3,31-34). 우리는 그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 여기 주님의 어머니가 계시고, 여기 당신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당신께 맡깁니다; 그들은 당신께서 저에게 맡기신 분들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신뢰하는 일치가 이루어질 때 사목자의 생명은 살아납니다.

영원한 승리의 대가는 우리가 상처를 입고 그대로 소모되는 것
"주교들은 이 세상에서
빛과 어둠이 싸우고 있는 전투를 투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목자의 삶은 복잡한 교의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일어나신 그리스도를 즐겁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명의 “스타일”은 청취자들에게 우리가 가르치는 메시지가 “그들을 위한 것”임을 느끼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신자들 삶의 모든 측면에 의미와 충만함을 가져다주기를 바랍니다. 성사가 신자들이 스스로 가질 수 없는 음식으로 그들을 키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자가 가까이 있음으로써 신자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포옹을 다시한번 갈망하도록 해 주기를 바랍니다. 목자들이 깨어있음으로써 신자들이 항상 목자의 마음속에서 “영원의 맛”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신자들은 이 영원의 맛을 이 세상 것에서 헛되이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자유와 정의 안에서 이 나라의 풍성한 번영을 확보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에 항상 목자로부터 감사의 말을 듣기를 바랍니다. 또한 동시에 목자들은 “우리는 항상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야 한다.”는(요한 6,27)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침착한 용기를 항상 간직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목자들은 자신들에게 풀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뒤로 물러설 수 있어야 하며, 중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가족을 그리스도로 먹이고 키우기 위하여 “작아져야” 합니다. 목자들은 산꼭대기에 서서 하느님의 눈으로 양떼를 계속 지켜보아야 하며 그것도 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자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달리신 십자가 꼭대기로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이 꼭대기는 목자에게 자기 양떼의 마음을 열어주는 유일한 지점입니다.

목자들은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우리의 시선을 더 낮추지 않고 끊임없이 하느님이 우리 앞에 열어주는 수평선을 향하여,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앞을 내다보거나 계획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수평선을 향하여 들어 올려 줍니다. 또한 목자들은 우리 자신을 지켜보면서 자기도취의 유혹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자기도취는, 목자의 눈을 가리고,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며 그의 행위를 헛수고로 만듭니다. 여러분의 사목적 관심 앞에 펼쳐진 수많은 길들 가운데에서도, 모든 것을 일치시키는 핵심에 초점을 계속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한 것은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마태 25, 31-45).

물론 주교가 지도자의 선견지명과 행정가로서 철저함을 갖고 있는 것도 도움은 되지만, 하느님께서 무력함의 힘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경우와 힘을 주는 권력을 혼동할 때마다 우리는 절망적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주교들은 이 세상에서 빛과 어둠이 싸우고 있는 전투를 투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어떤 세상적인 투쟁의 깃발로 만들거나 영원한 승리의 대가는 우리가 상처를 입고 그대로 소모되는 것이라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필리 2,1-11)

우리는 열 한 제자가 느꼈을 불안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움츠리고 있었고, 흩어지는 양떼의 두려움에 압도되고 공격을 받았습니다. 목자가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소심함이 아니라 용기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으로 우리 자신이 마비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한상봉

"약삭빠르고 빈틈없는 전략이 아니라
충실함에서 나오는 대화가 필요하다"

여러분이 수많은 도전들에 직면하고 있음을 압니다. 여러분들이 씨를 뿌리는 들은 흙이 단단하고 그래서 언제나 두려움에 항복하고 싶은 유혹, 다른 사람의 상처 앞에서 포기하고, 과거에 집착하고 싶은 유혹, 그리고 맹렬한 반대에 적절한 모진 대응책을 꾸미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남의 문화를 고무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풍요로움과 우리들의 가난을 포옹하는 성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응답을 사랑 안에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낮춤과 겸손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대화가 우리의 방식입니다. 약삭빠르고 빈틈없는 전략이 아니라 충실함에서 나오는 대화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결코 지치는 법이 없고, 심지어 마지막 시간에 온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주시는 분께 대한 충실함에서 나오는 대화입니다(마태 20,1-16).

그렇다면 앞으로의 길은 여러분들 사이의 대화, 원로들 사이의 대화, 평신도들과의 대화, 가족들 간의 대화, 세상과의 대화입니다. 여러분에게 두려움 없이 대화하라고 격려하는 일에 저는 결코 지칠 수가 없습니다. 솔직하고 용기 있게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의 유산이 풍요로울수록 더 고결한 겸손을 지니고 그것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진정한 대화에 필요한 “탈출”을 시도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가 뻗어나가 회복시키고자 하는 형제자매들의 깊은 마음속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지위보다 그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우리가 붙잡고 있는 진실과 자명한 것에서 그들이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사랑의 힘과 친밀함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차갑고 분열을 일으키는 말은 사목자의 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사목자의 마음에 자리잡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냉혹한 말은 당장은 일시적으로 이기는 것 같아도, 선함과 사랑이 가진 지속적인 매력만이 참으로 오랫동안 확신을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음 말씀이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메아리치게 해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30). 예수님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이므로 확실하게 활력을 줍니다. 때때로 우리는 일하면서 외로움에 짓눌릴 수 있고 그래서 멍에의 무거움을 느끼면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잊게 됩니다. 멍에는 우리만의 것으로 보이고, 그리하여 메마른 들판에서 기를 쓰며 힘들게 일하는 황소처럼 그 멍에를 질질 끌고 갑니다. 우리가 아무 성과 없이 그저 애만 쓰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하신 분께 결코 갈라질 수 없이 묶여 있음으로써 끝없는 활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솔기 없는 옷,
갈라짐 없는 하느님의 바닥에 이끌림으로써 친교를 나누어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입니다. 그분이 행동하신 길을 관상하여 그분의 온유와 겸손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백성을 이끌기 위하여 – 일상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에 가끔씩 짓눌리지 말고 – 주님의 쉬운 멍에를 메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교회는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살라버림으로써가 아니라”(루카 9,54), 성령의 은은한 따뜻함에 의하여 온전하게 지켜집니다. 성령께서는 “상처난 것을 낫 게 하시고, 굳은 것을 부드럽게 하시며, 굽은 것을 바로 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은 함께 친교 속에, 공동 협력하여 이루는 것입니다. 세계는 이미 찢어졌고 갈라졌으며, 곳곳에서 지금도 부서짐이 계속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솔기 없는 옷”인 교회는 자기가 찢기거나, 부서지거나, 싸우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주교들인 우리들의 사명은 무엇보다 먼저 일치를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치는 하느님의 말씀과 하늘의 빵으로 그 내용이 채워지고 정의됩니다. 이 두 가지 실제에 의하여 우리에게 위탁된 각 교회는 가톨릭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특정한 교회는 “사랑 안에 주재하는” 로마 교회와 함께 열고 친교를 나누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치를 지켜보고, 안전하게 보호하고 촉진하며 그것을 징표요 도구로 증언하는 일은 수행해야만 하는 명령입니 다. 모든 장벽을 넘어 국가들, 인종들, 계급들과 세대들을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의 일치가 하는 역할입니다.

다가오는 자비의 해에 어떤 갈라짐도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의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에 우리가 이끌림으로써, 친교를 강화시키고, 일치를 완전하게 이루며, 차이들을 화해시키고 서로를 용서하며 모든 불화를 낫게 하는 특별한 은총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빛이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처럼 (마태 5,14)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일치를 향하는 섬김은 특히 이 나라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은 거대한 물질과 영적 자원,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인간적,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혼동과 노고 속에서 평화, 번영과 통합의 차원에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고 있는 세계는 이 나라에 중대한 도덕차원의 책임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겸손하지만 강력한 일치, 친교의 누룩을 제시하는 것은 여러분 사명에 있어 기본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미국 가운데에 “일치의 성사”(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1항)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일은 미국의 운명이 쇠퇴하지도 분산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이러한 증언은 삶의 어두운 구름들을 헤치며 항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천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들은 암초에 부딪치지 않고 파도에 휩쓸리지도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줄 수 있는 횃불이기에, 저는 여러분이 우리 시대의 도전적인 문제들에 대면하기를 격려합니다. 그 각각의 문제 안에는 생명이 선물과 책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 자유와 존엄성은 우리가 이 도전들에 어떻게 직면하겠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낙태의 무죄한 희생자들, 폭력 때문에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보다 나은 내일을 찾으면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이민자들, 짐으로 여겨지는 나이든 사람들이나 병자들, 테러, 전쟁, 폭력 그리고 약물중독의 희생자들, 자연을 약탈하는 인간들에 의해 황폐해지는 환경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위험에 처한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우리들은 이 선물의 주인이 아니라 고결한 위탁자, 관리자들입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고개를 돌리거나 침묵을 지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가족의 복음도 이와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족대회에서 저는 여러분과 전체 교회와 함께 강력한 선포를 할 것입니다. 교회사명의 이러한 기본적인 측면들은 우리가 주님께 받은 것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비록 시대의 경향이 그 메시지에 저항하고 적대적이기까지 하더라도 선포해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34-39항).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증언을 제시하기를 촉구합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방법과 창의성을 지니고, 또한 진리의 겸손함을 지니고 그렇게 하시기를 기대합니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도 물론 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사회의 양심 속에 그런 메시지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겸손한 집이 되어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미국의 교회는 또한 겸손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매력적인 빛과 따스함으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족의 불이 되어야 합니다. 사목자로서 우리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어둠과 추위가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외로움과 무관심, 소외를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엄청난 친교와 의사소통 그리고 물질적 부 한 가운데에서도 그런 외로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삶 앞에서 사람들의 두려움, 그들의 실망 그리고 떠오르는 수많은 형태의 도피주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로지 가족의 불 주위에 모일 수 있는 교회만이 계속하여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불 이 아니라, 부활절 아침에 밝게 타오르는 불이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수많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의 조용한 탄원을 통하여 교회의 사목자들에게 계속 도전하십니다: “너희들은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사도들이 티베리아스의 호숫가에서 그랬던 것처럼(요한 21,4- 12),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더 시급한 것은 그분 현존의 타다 남은 재들이 그분의 고난의 불 속에서 다시 타올라 사람들을 앞서 이끄시고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 우리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약해질 때마다 우리는 그저 재를 꺼트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안으로부터 타오르게 만드는 진정한 빛과 따스함을 간직하고 그것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이요 하인 같은 사목자
“이주민들의 영혼 깊숙이 들여다 보라”

이 성찰을 마무리하기 전에, 제 마음 속에 가까이 있는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여러분이 주교로서 부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운 사목자가 되십시오. 이웃이요 하인 같은 사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까움이 특히 여러분의 사제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를 바랍니다. 사제들을 지지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들이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것만이 그리스도의 직분자들에게 충만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사제들이 미봉책에 만족하지 않도록 간곡히 부탁합니다. 사제들의 영적 성장을 격려할 길들을 찾으십시오. 그들이 공증인과 관료들이 되려는 의혹에 기울지 않도록, 오히려 아들딸들을 탄생시키고 키우는 교회의 모성을 반영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제들이 방금 자고 싶어 할 때에 그들 방문을 두드리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대답하기 위하여 일어나는 데에 지치지 않도록 여러분이 깨어있기를 바랍니다(루카 11,5-8). 사제들이 “어쩌다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을(루카 10,29-37) 위하여 멈추고 그들을 보살피고 고통을 완화시키며, 그들을 들어 올리고 도와줄 준비가 되도록 여러분이 그들을 훈련시키기를 기대합니다.

저의 두 번째 권고는 이민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미국의 교회는 이 “순례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희망들을 알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여러분은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명분을 증진했으며, 그들의 기여를 받아들였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그들이 풍요로움을 누리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앙의 불꽃을 계속 살리도록 도왔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여러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이민자들을 위하여 한 것보다 더 공헌한 다른 아메리카 기관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수많은 여러분의 교구들에 영향을 미치는 이 라틴아메리카 이주민들의 흐름에 직면해 있습니다. 로마의 주교로서 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에서 온 사목자로서 저는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격려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주민들의 영혼 깊숙이 들여다 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그들의 다양함에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여러분과 나눌 자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움 없이 환영하십시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지닌 사랑의 따스함을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들의 마음의 신비를 열게 될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도 자주 그랬던 것처럼, 이주민들이 아메리카 대륙과 그 교회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우리의 어머니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2015년 9월 교종 프란치스코


출처: <참사람되어>2015년 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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