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 노동의 빵에서 장미를 찾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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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노동의 빵에서 장미를 찾아 나서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1.1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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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시몬 베유

시몬 베유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매주 생테티엔느(Saint-Etienne)로 가서 노동자들을 만났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지와 관련 있는 테브농을 먼저 만났는데, 그는 소수파인 생디칼리스트(syndicaliste, 조합주의) 운동을 재편하고, 지역 광부연합이 노동총동맹으로 복귀하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이 스탈린 체제로 대표되는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하며 공산당을 이탈하거나,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들과 접촉하면서 베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조합운동과 노동문제를 다룬 글을 발표했다.

한편 노동자들을 위한 학습서클을 만들자, 베유는 교수자격으로 받는 특별수당을 전부 책 구입비로 내놓았다. 그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에 있는 우매한 차별”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인류가 낳은 모든 문화유산은 노동자들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베유는 이들과 더불어 공부하고, 주점에 앉아 빵을 뜯어먹고, 트럼프 놀이를 했다. 자신은 르퓌의 실업자 수당에 해당하는 5프랑으로 생활하면서 탄광 갱부들의 상호금고에 금전적 원조를 했다. 그래서 겨우내 얼음장 같은 방에서 자야 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베유의 참여가 시당국과 교육위원회를 자극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실업자들이 임금교섭을 위해 시장실에 들이닥쳤을 때도 베유가 함께 있었고, 시의 실업자 대책을 비판하는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이도 베유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교육위원회의 호출을 받았던 날에도 베유는 제과점에서 노동자들의 음식값을 지불하고, 채석장 인부들과 악수를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1932년 1월 11일에 발생한 파업 때에는 노동회관에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교육당국이 베유에게 전임신청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면서, 노동계와 여성계에서 항의가 이어졌다. 가톨릭계 신문 <라클로와>는 ‘고등중학교의 여교사, 르퓌의 노동자들을 선동하다’라는 기사를 냈다. 베유는 이 스캔들 앞에서 <카스트 제도의 잔존>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교육행정은 인류의 문명에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다. 지금도 카스트 제도 아래 있는 ... 교육행정은 인도의 뒤떨어진 민중의 경우와 똑같이, 접촉해서는 안 될 하층민들이 있다는 것이다. 고등중학교의 교사가 밀실 같은 곳에서나 비밀스럽게 만나야 하는 사람들, 더구나 이 사람들과 교사가 악수하는 모습을 학부형에게 보이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결국 베유는 교육원장 앞에서 전임명령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게 되었지만,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메모리얼>지에서는 “모스크바는 르퓌에 한 여성 대리인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어느 실업자는 한 다발의 라일락을 베유에게 선물했다. 그후 베유는 오제르로, 다시 로안느로 전임을 강요당했다. 이제 생테티엔느로 자주 갈 수 없었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을 만나고, 밥을 먹으면서도 카를 마르크스 원전을 두꺼운 안경 깊숙이 읽는 베유를 다른 교사들과 학교 측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베유는 나치가 장악한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국경을 막아놓은 소련을 비난했다. 레닌은 “민중과 격리된 채 관료와 경찰, 상비군으로 세워진 국가기관은 민중의 이익과 전혀 다른 이익을 노린다.”고 지적했지만, 소련은 이제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조국이 아니라 ‘열강 중의 하나’로 변질되었다. 같은 입장에 섰던 생디칼리스트 중에는 베유를 독일의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에 비교하는 이도 있었다.

 

사진출처=iwm.org.uk
사진출처=iwm.org.uk

공장에서 일기를 쓰다, 노예의 발견

“1934년 12월 4일 화요일 입사” 시몬 베유의 <공장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동자의 상태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선택될 수 없다”는 동료 노동자들의 반대도 베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베유는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생각하고 집필하며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만으로 알던 노동자들의 불행을 그 안에 들어가서 이해하고 싶었다. 공장 근처에 방을 얻어 혼자 살며 알스톰 전기공장에 입사하고, 이후엔 금속공장의 미숙련공으로 일했다. 이 당시 쓴 글은 맥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띄엄뛰엄 단어가 이어지고, 불가사이한 말이나 기호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마치 종이 위에서 고통이 부딪혀 굴절된 것 같았다. 베유는 일기에 “너무나 지독한 두통, 조금도 쉬지 못하고 거의 울면서 일을 한다.”고 썼다.

베유는 공장에서 얼굴과 가슴에 불꽃이 튀어 오르는 화덕 앞에 서있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손이 잘려 나갈 것 같은 프레스 앞에서 일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가슴을 찌르는 비참한 것뿐이었다. 오전에 머리카락 한 뭉치가 기계로 빨려 들어가 머리의 통증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오후엔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불구인 남편을 이끌고 어린 사내아이를 데리고 공장에 들어오면서 ‘이 아이도 여기서 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말하는 여자들. 이런 상황에서 순수한 우정이나 자존심을 내세울 수 없다. 누군가 옆에서 상사에게 꾸중들어도 냉랭하게 제 일만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감정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다.

이런 곳에서는, 특별한 헌신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친절과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선물이 된다. 마치 체념한 짐승처럼 순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속에서 ‘노예’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도 이미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음을 발견한다. 언젠가는 병원 치료를 받고 버스에 오르면서 “도대체 나 같은 노예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이 버스를 타고 내가 가진 12수우를 쓸 수 있는가?” 하고 묻기까지 한다. 하지만 베유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게 된 자신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제 나도 추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서, 좋든 나쁘든 간에 선의와 악의를 두루 갖춘 현실 속의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다.”

베유는 파업을 경험하면서 노동의 참상뿐 아니라 희망도 발견한다.

“그녀들은 문을 지키는 노동자가 웃으면서 공장에 들어가게 한다고 즐거워했다. 또 미소와 정겨운 인사말에 대해서도 즐거워했다. 기계에 달라붙어 일할 때면 그토록 고독감이 느껴지던 바로 그 공장에서 그녀들은 우애를 느낄 것이다! 기계에 매여 꼼짝 못하던 작업장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그룹을 조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새참도 먹을 수 있는 즐거움. 자기 몸을 굽히게 하는 냉혹한 궁핍의 상징인 기계의 견딜 수 없는 소음 대신에 샹송과 웃음소리를 듣는 즐거움. 노동자들은 이제 그토록 오랫동안 생존수단을 제공하던 기계 사이를 편안한 마음으로 누빌 수 있는 것이다. 기계는 더 이상 손가락을 자르지 않으며 고통을 주지 않는다. 아무 말 없는 기계 속에서 인간생활의 리듬에 따를 뿐 타임-레코더의 리듬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기쁨.

물론 며칠 후면 다시 가혹한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그런 것에 걱정하지 않으며 마치 전쟁 중의 휴가병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육중한 기계에 대해 침묵이나 속박, 복종과는 다른 추억을 갖게 될 것이다. 자부심을 갖게 되고, 모든 금속에 대해 약간의 인간적 온기를 남겨주는 그러한 추억말이다.”

베유는 이렇게 공장이 즐거운 곳, 육체가 노동으로 피로하더라도 영혼이 기쁨을 맛보고 기쁨을 양식으로 삼는 그런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 차례 공장을 전전하다가, 1935년 여름, 베유는 가족들과 함께 포르투갈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체험을 나중에 페렝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육체적으로 비참한 상황에서 나는 어느 날 저녁 자그마한 포르투갈 마을로 들어갔다. 아! 그곳은 더 한층 비참했다. 더욱이 그날은 보름달이 높이 떠 있는 다름 아닌 성인의 축제일이었다. 그곳은 바닷가였다. 어부의 아내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부두로 향하는 행렬에 기어서 틀림없이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는 가슴을 찢는 듯한 비애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그에 관해 올바른 표상을 전해 줄 수는 없다. 나는 볼가 강변의 노동자들의 노래 외에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는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것에서 갑자기 나는 그리스도교가 노예의 종교라는 사실, 그리고 노예들이 그리스도교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유는 그동안 신에 대한 문제를 자신에게 제기한 적이 없었다. 다른 가족들처럼 불가지론을 체득한 베유는 신에 대한 잘못된 대답을 하느니 처음부터 신에 대해 질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저주받은 노예의 처지를 겪은 지금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갈라 3,13)라는 구절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예속상태로 방치된 인간의 조건이 십자가 위에서 탄식하던 인간의 갈가리 찢긴 몸에 응축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민전선에서 발견한 인간성의 몰락

1933년 시몬 베유는 부르쥬(Bourges)의 고등중학교 교사로 갔다. 마음은 인간의 불행에 관한 슬픈 추억으로 가득 찼고 몸은 피로했다. 안이한 생활에 자신이 타락한 기분이 든다고 했던 베유에겐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한 때였다.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짧은 작문을 짓게하고, ‘담배냄새가 찌든’ 답안지를 돌려주곤 했다. 가난한 아이들에겐 특별히 신경을 쓰고, 부잣집 아이들은 소질이 없다고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호화여객선 노르망디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만한 배를 만들 돈이 있다면, 노동자의 집을 얼마나 많이 지을 수 있을까?” 하고 말했다.

배유는 일 년 동안 빨강과 초록 스웨터 두 벌을 번갈아 입었고, 장갑을 낀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쿠롱 부부와 만나 사상과 종교, 음악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위로가 되었다. 어느 제자의 집에 방문해서는 대뜸 팔을 걷고 소젖을 짰다. 농부들이 맛있는 치즈를 내어놓으면 “인도차이나 아이들이 배를 곯고 있다”면서 먹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이 사람이 지나치게 공부를 해서 머리가 이상하게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학생가운데 로제르 주조공장 비제인의 딸이 있었다. 이 공장은 정원 한가운데 노동자기숙사를 지어 쾌적하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노동환경을 마련했다. 주로 헨지나 프라이팬을 만들었는데, 프랑스의 동일업종에서 가장 낮은 산업재해율을 기록했다. 베유는 이 공장에 학생들을 견학시키고, 공장장과 의논해 공장에서 발행하는 잡지 <앙트르 놔>에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와 호소를 싣게 하였다. 공장을 인간적인 존엄에 이바지하도록 개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잡지에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쉽게 써서 게재하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공산당 총서기장 토레즈의 요청으로 결성된 인민전선이 1936년 5월 총선거에 승리해 사회주의 연립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전역에서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가하고 해방감을 맛보았다. 베유는 “노동자가 결국 인간으로 받아들여진 사건”이라 했다. 하지만 프랑코 장군을 중심으로 군부와 우익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정규군이 반란에 참여하면서, 인민전선은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민병대를 조직했으며, 유럽의 지식인들이 기꺼이 국제의용군으로 참여했다. 앙드레 말로와 헤밍웨이, 바이런 뿐 아니라 시몬 베유도 참전했다.

“1936년 7월 나는 파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전쟁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무엇보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싸움터 밖에서 입을 터는 사람들입니다. ... 순간순간 일방적인 패배가 기정사실화 되고 있을 때, 나에게 파리는 후방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행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아나키스트 계열의 부대에 배속되어 총을 지급받았지만, 베유는 취사반에서 일하다 끓는 기름이 담긴 냄비 속을 헛디뎌 후송됨으로써 일찍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베유가 겪은 전쟁은 환멸스러운 것이었다. 아라곤에서 의용군에게 잡혀온 소년병은 몸에서 아랑헤당 당원증과 성모상이 나와 사살되었다. 한 번은 사제 두 명을 체포했는데, 한 사제는 보는 앞에서 바로 총살하고, 나머지 한 명은 달아나도 좋다고 말하곤 도망치는 사람을 뒤에서 사살하기도 했다. 가난한 농민들을 옹호하는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일단 무장을 하게 되면 살생을 우습게 처리하는 걸 보고 베유는 경악했다.

베유는 지상의 권위가 어떤 이를 향해 ‘가치 없는 생명’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사람을 죽이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취급하는 ‘피에 젖은 분위기’에 환멸을 느꼈다. 아무리 높고 원대한 명분을 지닌다 해도, 타인에게 ‘공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싸울 때, 고유한 개인은 무시되고, 상대방을 물체로 화석화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느꼈던 환멸을 베유는 입에 담지 않았다. 이때부터 베유는 외부에 대한 관심에서 자기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글의 축약본은 <가톨릭평론> 2020년 11-12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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