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끝이 열려있는 기다림
상태바
헨리 나웬: 끝이 열려있는 기다림
  • 헨리 나웬
  • 승인 2020.11.10 1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헨리 나웬의 [기다림의 길] -2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기다림이란, 복음의 첫 부분에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어떤 약속의 감각을 지니고 기다리는 것이다. “즈카르야,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터이니”, “마리아, 들어라! 너는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루가 1,13. 31).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들을 기다리도록 허용하는 약속을 받는다. 그들은 막 자라기 시작한 씨앗처럼 그들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어떤 것을 받았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미 우리를 위해 시작되었을 경우에만 진정으로 기다릴 수 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란 절대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어떤 것으로 옮겨가는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늘 어떤 것으로부터 그보다 더한 어떤 것으로의 움직임이다. 즈카르야, 엘리사벳, 마리아, 시메온, 안나는 그들을 양육시키고 먹여주며 있는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약속을 갖고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삶으로써 약속은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하여 자체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기다림은 적극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약속을 어떤 수동적인 것으로, 전적으로 우리 손에서 벗어난 사건들에 의해 결정된 어떤 절망적인 상태로 생각한다. 버스가 늦는다? 그 사실에 대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앉아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기다리기나 하자” 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화내는 것을 이해하기가 힘들지 않다. 그런 말들은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성서의 기다림에는 이런 수동성이 전혀 없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능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서 있는 자리로부터 이미 올라오고 있음을 안다. 그것이 비밀이고 신비이다. 기다림의 비밀은 씨앗이 심어졌으며 어떤 것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는 것에 있다. 적극적인 기다림이란 그 순간에 온전히 현존하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가 그러한 움직임에 현존하고 싶어한다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 순간에 현존하는 사람이며 그 순간이 바로 적절한 그때임을 믿는 사람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이다. “인내”라는 말은 우리가 있는 자리에 기꺼이 머물고자 하는 것이며 그곳에서 어떤 숨겨진 것이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상황에 온전히 몰입하여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상 진짜 일이 어떤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곳에 가고 싶어한다. 현재의 순간은 그들에게 비어있다. 그러나 참을 줄 하는 사람들은 감히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물고자 한다.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은 현재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고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에 기다림이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엄마가 뱃속에서 아이를 키워가듯이 그 순간을 키워 가는 것을 포함한다. 즈카르야, 엘리사벳, 마리아, 시메온과 안나는 모두 현재의 순간에 충실히 현존했다. 그래서 그들은 천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깨어 있었고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어떤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다. 주의를 기울여라” 라고 말하는 소리에 온통 집중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것이 기다림에 있다. 즉 기다림이란 끝이 없다는 사실이다. 끝이 열려있는 기다림은 우리에게 어려운데, 흔히 우리들은 매우 구체적인 어떤 것, 우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기다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다림은 소망들로 가득 차있다: “난 일이 있으면 좋겠어. 날씨가 더 좋았으면, 고통이 사라졌으면 좋겠어.” 우리는 소원들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우리의 기다림은 쉽게 이런 소망들 속에 얽혀 버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기다림은 끝이 열려있지 않다. 대신 우리의 기다림은 미래를 지배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우리는 미래가 매우 정확한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바라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실망해버리고 절망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너무나 힘들게 여긴다; 우리는 원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망들이 두려움과 어떻게 연결되려고 하는지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즈카르야, 엘리사벳, 마리아, 시메온 그리고 안나는 소망들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망은 소망, 소원과 매우 다른 것이다. 희망은 무엇인가가 채워질 것이라고, 그러나 그 채워짐은 우리의 욕구에 따라서가 아니라 약속에 따라 채워질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늘 끝이 없이 열려있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삶에서 소원들을 내버려두고 희망하기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욕구들을 기꺼이 놓겠다고 결심했을 때에야 비로소 어떤 새로운 것, 나의 기대를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것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실제로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마리아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신뢰한다.” 마리아는 너무나 깊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기다림은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 가능성들을 자신이 다스리고 싶지 않았다. 마리아는 다만 주의 깊게 들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끝을 두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삶에 대해 엄청나게 철저하고도 뿌리깊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다스리기를 포기하고 하느님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도록 내어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 따라 빚어주셨고 우리의 두려움에 따라 빚은 것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인 삶이란 기다리고, 적극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현존하며, 새로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며, 특히 우리의 상상과 예견을 훨씬 넘어서는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삶이다. 그것은 지배와 다스림에 사로잡힌 세계에서 참으로 삶에 대해 매우 철저한 입장을 취하는 태도이다.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며 영성작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의 사목자> <돌아온 아들> 등을 지었고, 마지막 10년동안 라르쉬 새벽공동체에서 살았다.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