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백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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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백인이 아니었다
  • 제임스 마틴 신부 S.J.
  • 승인 2020.10.2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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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 샐먼의 '그리스도의 머리'

워너 샐먼(Warner Sallman, 1892-1968)의 유명한 그림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백인 얼굴을 가진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여러분이 내 의견을 물었다. 내 답변은 먼저 예수님 생김새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서에 그분 생김새가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그분이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 그분은 갈릴래아의 작은 시골 출신임을 뜻하는 ‘나사렛의 예수’로 알려졌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권위 있는 총서인 <변방의 유대인>(A Marginal Jew)에서 존 마이어 신부가 말한 것처럼, 유럽식 모습의 예수님에게 익숙한 사람들은 오늘 정작 예수님을 직접 뵈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 갈릴래아의 남자들을 보는 것으로도 그분의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다.

둘 다 이름이 마헤르인 내 친구들이 있는데, 이들은 갈릴래아 출신으로 사촌 사이다. 요즘 기도할 때면 예수님이 이들과 훨씬 많이 닮으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둘 다 훌륭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기가 훨씬 쉽다. 나는 예수님이 원래 생김새대로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분을 갈릴래아 사람에 더 가깝게 그리려고 하는 <루모> (Lumo)같은 혁신적인 사이트에서 이미지를 가져와 내 ‘매일복음 트위터’에 사용한다.

백인 예수님의 형상은 분명히 백인이 최고라는 이념을 알리는데 이용되었다. 게다가 예수님의 수많은 재현 가운데 특히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예수님은 백인의 모습인데, 그 누구보다 하얀 가장 순수한 백인의 모습이다. 끔찍한 교리다. 이런 이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어처구니 없는 영향을 미친다. “흰 것이 아름답다.”라고 믿는 어린 소녀가 나오는 토니 모리슨의 감동적인 소설 <가장 푸른 눈>(The Bluest Eye)이 떠오른다.

예수님이 백인이라면, 백인 아닌 사람들이 그분과 맺는 관계를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그들이 당장에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인들을 재현한 그림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 성인들도 거의 항상 백인 생김새다. 심지어 북아프리카 출신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까지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존 나바(John Nava)의 작품 같은 이미지를 선호한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 걸린 <모든 성인의 통공>(The Communion of Saints)이라는 훌륭한 태피스트리를 그렸는데, 여기에 나오는 성인의 모델들은 대부분 근처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다.

 

존 나바(John Nava)의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 걸린 '모든 성인의 통공'(The Communion of Saints) 부분화
존 나바(John Nava)의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 걸린 '모든 성인의 통공'(The Communion of Saints) 부분화

성모님에도 비슷한 양상이 반복된다. 너무나 많은 모습들, 심지어 현대적인 모습들까지도 미국 교외에 사는 백인 가정주부처럼 보인다. 솔직히 말해 부정확한 표현이다. 어차피 성모님은 나자렛의 미리암이요 가난한 갈릴래아 여인이다. 물론 아기 예수님도 금발이 아니다.

내가 동아프리카의 난민들과 함께 일할 때였다. 흑인 에티오피아 난민 예술가마저 백인 예수와 백인 마리아 그림을 계속 내게 가져왔다. 보고 배운 게 그렇기 때문이다. 내가 이 화가에게 예수님과 성모님을 흑인으로 그려보자고 제안하자 처음엔 망설였다. 결국 에티오피아인 생김새로 그린 예수님과 성모님의 아름다운 그림을 가져 왔다. 더욱 놀랍게도 이 나라에는 이러한 종류의 그림을 정확히 그리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백인 예수님은 백인 사제들이 가르친 결과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모습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간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1세기의 갈릴래아 목수였다. 생김새는 어떠하셨을까? 워너 샐먼이 그린 예수님 모습은 아니다. (부활 후 그분의 영광을 입으신 모습은 제쳐 놓겠지만, 그런 예수님은 바로 백인인 화가 자신의 모습이다.) 그래서 나자렛 예수님의 출신이 어디신지, 오늘날 그 지역의 사람들의 생김새는 어떠한지, 그리고 1세기에 그들 생김새는 어떠하였는지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은 백인이 아니셨다. 마리아도 사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예수님의 이미지는 어떤 문화적 토양에나 토착화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단순히 갈릴래아 사람으로 오신 게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a human being)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Jesus Mafa> 연작(카메룬 북부 마파 신자들의 성화)처럼 예수님의 이미지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인종 안에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자넷 맥켄지(Janet McKenzie)의 <민중의 예수>도 좋고, 케냐 나이로비 헤키마 대학의 십자가형 장면도 좋아한다. 이 그림은 엥글버트 므벵 신부(Englebert Mveng, 예수회원)의 작품으로 예전에 여러 번 기도를 드렸던 그림이다.

 

by Janet McKenzie
by Janet McKenzie
by Janet McKenzie
by Janet McKenzie

그렇다면 백인 예수님을 ‘삭제’해야 한다는 건가? 그게 형상을 버리자는 거라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없앨 필요는 없다. 대신에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토착화 된 예수님의 이미지를 널리 알려야 한다. 어쨌든 그분은 부활하시어 어디나 계신다. 이런 이미지들이 어제 계셨고 오늘도 계신 예수님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며,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사회에선, 가능한 백인들의 교회에 흑인 예수님을 모셔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안전지역 밖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 강도 맞은 이에게 도움을 베푼 이는 우리에게 낯선 ‘다른 사람’(other guy)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이용하는 다양한 예수 그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뵙는 것이다. 특히 변방에 있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 어떤 식으로든 희생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분을 뵙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이들 안에 사신다.

요컨대 나는 가능하면 예수님께서 나타났을 당시와 같이 그분의 형상이 더 정확하게 표현되고, 모든 문화에 토착화 된 예수님 형상이 더 많아지는 데 찬성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일은 모든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회원 제라드 맨리 홉킨스 신부의 시처럼 우리들 각자가 그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온갖 곳에서 일하신다,
다른 이들의 아름다운 팔다리와 사랑스런 두 눈을 빌려”

[출처] <America Magazine>, 2020년 6월 26일 / 방진선 번역

 

제임스 마틴 신부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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