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영원한 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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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영원한 젊음이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0.2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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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1

경주로 이사 온 지 벌써 4개월째 되어 간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 안에 딸아이는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금 여섯 살짜리 내 딸내미는 결혼하고 8년 만에 얻은 자식인데, 어쩔 수 없는 금지옥엽이었고, 그 아이가 경주에 와서 겪어야 했던 과정들 때문인지 요즘은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 안쓰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우리 아이는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에 전라도 땅 무주 산골로 초대되었다. 귀농한 지 1년 만에 얻은 아이는 추운 흙집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부터 몸으로 기어다니며 무릎에 흙을 묻히기 시작했다. 엄마 등에 업혀 산골 언덕바지를 오르고, 기어다니던 아이가 걷고 뛰면서 아늑한 광대정 산골은 어느새 아이들이 몰려다니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가득 차기도 했다. 우리가 살던 곳은 귀농자들이 모여서 살던 마을이었기에 젊은 부부들이 많았고, 당연히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그것은 마을에 생기를 주는 이유가 되었다.

예전에 이 산골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산을 내려가서 천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마을 역시 대한민국의 다른 시골처럼 아이 울음소리가 그치고, 그래서 낮에도 적막하고, 놀리는 밭과 논이 늘어 났다. 시골은 노인 거주지역이다. 아니면 도시살이에서 실패한 자식들이 책임지지 못한 불행한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그늘로 되돌아와 적적한 공간을 그나마 메우고 있다.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그 아이들의 표정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표정을 닮아가고 있다. 마을 어귀에 살던 한 여자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먹먹한 눈으로 구량천 물길을 바라보거나 내내 그 집 고양이와 놀곤 했다. 그 아랫마을에 견주어 보면 젊은 귀농자들이 모여 사는 산골 윗동네 아이들은 축복 가운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무주에 살던 집 마루 앞에서..동네 아이들과. (사진=한상봉)
무주에 살던 집 마루 앞에서..동네 아이들과. (사진=한상봉)

아이는 아침마다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눈을 뜨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녘에 일어나 마루에 나가보면, 집 안마당 끝에 내 딸아이보다 다섯 달 늦게 태어난 아랫집 영현이가 서 있다. 멀찍이 서서 우리집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다. 아이들에겐 놀이가 세상의 전부이고, 가장 신나는 일이 된다. 마당 한켠에서 모종삽으로 흙을 파내어, 다른 구덩이를 메우는 일부터, 식탁을 차리기 위해 풀을 뜯으러 다니는 일까지. 길섶에서 산딸기를 따서먹고, 세발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간다. 막대기를 들고 닭장을 기웃거리거나, 도랑에서 온몸을 적시며 철벅거리는 것도 즐겁다.

자동차를 타고 길을 나서면, 이것저것 처음 눈에 들어오는 세계를 향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다. 저건 뭐지, 이건 왜 그래, 세상은 감탄을 자아내는 온갖 사물로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아이들은 그렇게 성장한다. 이 모든 것이 날것으로 아이들에게 다가온다. 산천초목이 직접 아이를 부르고, 아이들은 여기에 응답하면서 매일의 삶을 축제로 만들고 경축하는 것이다.

산골 생활을 접고 이제 도시로 내려왔다. 연고 없이 전라도 무주 산골에 들어갔던 것처럼, 이번엔 연고도 없이 경상도 땅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예술심리치료 분야에 입문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김해에 원하던 일자리가 생겨서 이사를 해야 했는데, 어차피 연고가 없는 곳이라면 평소 살고 싶었던 도시로 가자는 생각에 경주로 방향을 잡았다. 처음엔 인근에 있는 시골집을 얻으려고 나름대로 수소문을 하였지만, 마땅한 집이 나서질 않아서 일단 손쉽게 아파트를 얻어 살고 있다. 아파트 생활은 참 편안했다. 우선 마음대로 목욕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5년 동안 농가주택 흙집에 살면서 쥐들에게 시달리던 생각을 하면 큰 시름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갑자기 생활공간에서 사라진 대숲과 오솔길, 캄캄한 밤과 서늘한 나무 언저리, 마루에 걸터앉아 바라 보던 별빛과 달무리, 산 아래 발밑으로 흐르던 우연(雨煙)과 물소리, 그리고 계절마다 풀숲에 피던 노랗고 희고, 때로 보랏빛으로 돋아나던 들꽃들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연장을 손에 들어도 말 그대로 마음 놓고 보습을 대일 땅이 없었고, 망치를 들어도 마음대로 뚝딱거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도시에선 제가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어 쓰는 게 엄금(嚴禁)되었다. 뭐든 필요한 것은 돈을 주고 사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 돈을 버는 일뿐이다. 돈을 벌고 돈을 쓰기 위해 도시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른들보다 감수성이 예민할 법한 딸아이는 도시로 온 뒤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예전에 나들이 길에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서 휴게소를 들르게 되면, 휴게소 한 편에 마련해 놓은 놀이터에서 미끄럼도 타고 그네도 타면서 좋아하던 딸아이는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 눈앞에 항상 놓여 있는 놀이터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다. 집에 들어와 있을 때에도 놀이터 쪽에서 아이들 소리가 나면 베란다로 달려가 누군지 확인해 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을 부르는 법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놀이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그 놀이마당이 콘크리트 주차장과 구획이 이미 지어진 놀이터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그 작은 공간에 충분히 익숙해지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심심해진다. 그래서 찾는 곳이 텔레비전 앞이다. 그리고 좀더 큰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앞에서 떠날 줄 모를 것이다. 시골에 살 때는 집에 아예 텔레비전이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는 부모와 장난을 치거나 그림을 그리고, 장난감으로 온갖 놀이를 시도해 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계절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변만화(千 變萬化) 하는 자연을 알몸으로 느끼면서 살았다. 어쩌면 도시의 아이들이란 일상이 주는 축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있을 뿐일지 모른다. 마치 몸을 움직여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축구공을 걷어차는 대신에, 붉은 옷을 입고 축구장의 관중으로 머무는 데 익숙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정작 중요한 것들이 대리만족으로 그쳐야 한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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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증으로 늙어가는 도시

우리 사회는 지금 관음증에 시달리고 있다. 도시가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은,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 모두가 도시에 몰려들어 살고 있지만, 도시는 관음증으로 늙어가고 있다. 그 들은 생리적 젊음과 상관없이 몸을 직접 움직여 무엇인가 만져 보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어른들이 하는 일이란 그저 ‘보는 것’이고, 아이들이 하는 놀이 역시 ‘보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텔레비전을 켠다. 요즘 출근길에 전철 안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고, 여기저기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문자를 날리고, 직장이든 어디든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게 업무의 방식이며, 집에 돌아와 다시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통해서 게임을 하거나 뭔가 열심히 찾아다닌다. 사람들은 밤마다 수행자의 자세로 컴퓨터에 몰입되어 충혈된 눈으로 다시 아침을 맞이한다.

소설보다 영화를 좋아하고, 답사보다 관광을 즐긴다. 이런 형국이니 게임 중독에 몰리는 아이들을 탓할 수 없다. 아름다운 것은 볼만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것은 마음으로 함께 보아야, 심안이 동시에 열려야 경탄과 변형을 통하여 인생에 생기가 돋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몸이 점점 늙어간다는 게 아니라 마음이 몸보다 먼저 늙어간다는 사실 이다.

신선하고 새로운 피가 계속 공급되지 못한다면, 사람은 동맥경화에 걸려서 생기를 잃고 늙게 마련이다. 그처럼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것을 통하여 생기를 얻으려고 소망하지만,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현실 때문에 사람들은 어쩌면 사이버 공간에서라도 새로운 것을 찾아서 밤새 헤매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현실 속에서 새로움을 찾으려고 모험을 떠나는 젊음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세대는 희망이 없다. 이들에게 일상은 진부하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축제란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누누이 ‘새 하늘 새 땅’에 대하여 말한다. 새로움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꾸만 이야기하는 까닭은 하느님 자신이 항상 새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드시는 분이기에 창조주가 되신다. 『우주적 그리스도의 도래』라는 책에서 매튜 폭스는 “하느님이 얼마나 늙었을까?” 라고 묻지 말고 “하느님은 얼마나 어릴까?”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발언을 빌린다면, 하느님은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새로운 분’이시며, 언제나 ‘한 처음에’ 계시는 분이다. 그분은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다움’을 간직하시는 분이시며, 늘 새로운 처음이다. 어린아이들은 삶을 생생하게 체험한다. 모든 게 첫 경험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는 유년기에 경험한 것이 평생에 걸쳐 드러나는 그 사람의 성격과 정신구조를 결정짓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년기를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은 방어 없이 외부의 자극을 날것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그러나 깊이 상처받는 시기도 유년기다. 신경증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활동을 했던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정신병리학과 관련하여 이처럼 유년기를 병리적 징후의 뿌리가 되는 시기라는 측면만 부각시키고 있지만, 달리 보면, 유년기는 모든 세포가 세상을 향하여 남김없이 열려 있는 생생한 감수성의 시기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어린아이들의 특성이 진부한 일상을 축제로 변환시키는 능력을 낳는다. 아이들은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삼라만상을 살아 있는 생명으로 경험한다. 새와 물고기뿐 아니라 하늘의 구름과 태양과 달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것은 굳어 있는 사물 안에도 생생한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아! 좋다” 하시던 그 감탄사를 더불어 나누어 가질 수 있 는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이 잃어버린 은폐된 진실이다.

그러므로 매튜 폭스 같은 이들은 어른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어린아이에게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무의식 깊은 곳에 매장된 어린아이를 해방시켜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어린아이가 우리 어른들을 하느님의 축복에 가득 찬 창조세계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에 새겨진 어린아이의 회복은 성경에서 예수의 편듦 속에서 의미가 확인된다.

그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 25 -26)

그때 사람들이 어린이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라자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9,13 -15)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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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어린아이에게 매일이 하루같이 축제 같다면, 그것은 진작 말했듯이, 오늘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가 생기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새로운 일이 생긴다면 그만큼 기쁨은 커질 것이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져 넣는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에 나서는 것은 이 세상이 이른바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신앙의 눈으로 보자면, 하느님께서는 끝내 당신의 그늘 아래서 나를 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흥미진진한 놀이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누군들 풀어 놓을 사연이 많지 않겠는가. 실타래처럼 줄줄이 떠오르는 이야기가 많은 것은 그만큼 생이 주는 무게가 가혹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 그만큼 진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찌그러진 모습이거나 밝고 곧은 표정이거나 상처투성이거나 당당한 얼굴이거나 누구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자신이다. 그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주인공이 자기 자신과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대하여 어떤 태도 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이야기가 다소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두 모습은 인생이란 미묘한 축제에 깃드는 어둠과 밝음의 부분이 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삶을 결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의 의지이듯이, 주인공은 작가의 의도를 미리 파악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우리 삶을 우리의 의지만으로 엮어가지 못한다. “나를 키워 온 것은 8할이 바람이었다”는 어느 시인의 말은 내 삶을 사실상 더욱 흥분시킨다. 그 바람의 방향 때문에 새롭게 다가올 세계에 대한 기대가 솟아오르는 까닭이다.

황지우 시인은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그 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고 했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연안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그 새를 그 미지의 연안에 닿게 할 것은 아마 바다 위를 태초부터 떠돌았던 바람일 것이다. 일생일대의 바다를 어찌 자신의 날개에만 의지해 날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바람에 온전히 자신의 깃털을 맡기려면, 우리는 자신의 무게를 덜어내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황지우 시인은 그 새를 ‘출가하는 새’라고 지칭했다. 안온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항시 툭 털고 새로운 길을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그 바람이 준비한 세계를 축제로 맞이할 수 있겠다.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아이들은 오늘 동무와 다투더라도 내일이면 다시 그와 더불어 놀고, 그렇게 생애를 장식한다. 관계 안에서 견고한 담을 쌓지 않는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고난이 있고, 고민이 있고, 생애의 그 시기에 겪어야 할 거센 바람을 예민하게 느낀다. 그러나 그 거센 풍속을 거슬러 살아갈 힘을 그들은 오로지 ‘사랑 안에서’ 얻을 뿐이다. 그들이 젖먹이일 때 저를 품어주던 엄마의 젖가슴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아기가 웃을 때 “예쁜 내 새끼!”를 연발하며 다정한 눈빛으로 내 마음을 비추어 주었던 엄마, 젖은 엉덩이를 항상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기저귀로 갈아 주시던 엄마, 내 몸 구석구석을 어디라도 살피지 않은 구석이 없을 만큼 나를 환히 알아 주시던 엄마, 그래서 사실상 또 다른 ‘나’라고, 나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던 엄마에 대한 체험이 평생 이 아이를 파란만장한 생애의 바다에서도 끝내 침몰하지 않도록 돕는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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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부터 솟아나는 힘

아이들이 세계를 판별하는 기준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가, 그가 나를 안전하게 안아 주고자 원하는가, 그런 것들이다. 살면서 거추장스럽게 달라붙은 껍데기에 아직 의미를 부여할 줄 모르는 아이들은, 그 아이가 어릴수록 더 많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준다. 벌거벗은 채 하느님의 창조를 떠올리게 한다. 생의 본질에 밑 닿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그래서 이렇게 선언할 수밖에 없었을 것 이다.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어리다. 오늘보다 내일 더 어리지 않다면 나는 부끄러울 것이다.”

오늘밤 아이를 재워 줄 때, 아이가 말하지 않던가,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 그러면 부모는 한결같이 응답한다. “나도 널 사랑한 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을 주는 발언이 그 순간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 생생한 사랑의 체험만이 진부한 일상을 축제로 변형시킨다. 살면서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몸 가볍게 욕심을 덜어낼 마음을 갖도록 용기를 준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은 안다. 아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아이의 존재만으로 삶은 조금 더 헐거워지고, 고난은 조금 더 견딜 만하다. 아이는 무력함으로 우리에게 에너지를 준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오로지 ‘사랑’으로부터 솟아나는 힘이기에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돕는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하느님의 사자이며, 말 그대로 거룩하다. 그들처럼 생애를 가감 없이 즐기고, 맑은 눈으로 천지사방을 빛나게 바라보며, 온 세상을 두고 속삭이게 된다면, 그래서 익숙한 일상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예전에 알지 못한 경탄이 흘러나오고 만사를 새롭게 보고 듣고 만지게 될 것 이다.

하느님은 아이들처럼 영원한 젊음이며,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며, 언제나 열렬하고, 언제나 한 처음에 계시며, 인간을 두고 꿈꾸는 눈으로 바라보신다. 그리고 그의 미래를 열어가기로 작정하신다. 그 바람결을 느끼고 호흡하며 나 또한 바람의 일부가 되어 생애의 한 바다를 건너가 보자. 내 생애의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지치지 말고 사랑하자.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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