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교회, 어떻게 치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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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교회, 어떻게 치료해야 하나?
  • 박철
  • 승인 2020.10.1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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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갈수록 줄어가는 한국교회

1980년대 이후로 한국 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뉴스앤조이>가 2020년 9월 총회를 맞아 교세 통계를 공개한 각 교단 총회 보고서와 교단지 발표 내용을 종합한 결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소강석 총회장), 통합(신정호 총회장), 고신(박영호 총회장),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이건희 총회장)와 올해 상반기 교세 통계를 공개한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회·윤보환 감독회장직무대행),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한기채 총회장) 등 교단 6곳의 교인 수는 총 741만 2150명으로, 2018년 기준 758만 9373만 명에서 17만 7223명(2.34%)이 줄어들었다. 이들 교단 6개 교인 수는 2011년 880만 5053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매년 감소해 왔다. 9년간 빠진 숫자는 139만 2903명으로, 2011년 교인 수 대비 15.8% 감소한 수치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구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구라파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미국의 경우도 극도로 보수적인 한두 개의 교파를 제외하고는 개신교든, 로마 가톨릭교회든 모두 내리막길을 가고 있다. 이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이 현상을 보는 크리스천들은 서글픔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이 현상에 대해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 현상의 역사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현상은 당연시되어 있는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심각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과연 오늘날 세계에 존재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앞으로 21세기의 세계에도 변함없이 교회가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교회의 쇠퇴 현상은 크리스천들에게 이러한 질문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쇠퇴현상을 보고 어떤 이는 “교회는 죽어가고 있다”고 가혹한 표현을 한 바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은 귀에 거슬리는 것이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크게 비관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비록 제도교회 자체는 쇠퇴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현상이라든지, 또는 제도교회의 쇠퇴와 기독교의 쇠퇴가 같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교회는 쇠퇴일로에 있고 그리스도인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병든 사실을 깨달아야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병을 고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중병을 앓고 있고, 크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선교정책이나 목회활동은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교회가 왜 쇠퇴해 가고 있는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교회 바깥의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 세계가 극도로 세속화되고 비종교적 사회가 되었다든지, 현대인이 고도의 문명 발달로 교만해지고 자기 의존적이 되었다든지, 이런 유사한 이유들을 들게 된다. 이것은 마치 로마제국의 멸망의 이유가 야만족의 침략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와 같다. 역사를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외적의 침략 이전에 이미 로마 제국의 정신적 도덕적 구조가 내부에서 붕괴되었고 이것이 제국멸망의 진짜 이유였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교회의 쇠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 자체 내에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교회의 쇠퇴는 교회의 시대착오적 메시지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시작 이래로 오늘날까지 역사를 크게 두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다. 

시대착오적인 메시지의 문제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시대는 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을 포함한 모든 천체들은 지구를 중심에 두고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다. 소위 천동설이다. 교회가 이것을 주장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처음으로 이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 반대가 맞다고 주장했다. 소위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다. 이 지동설은 인간 자신과 우주와 또 인간과 우주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이 현상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후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하늘과 땅의 역사가 6천년 밖에 안 된다든지,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우주와 삼라만상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말하자면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인간관과 세계관에 근거하여 오래 전에 제정이 된 것이다.

교회가 이런 신화 시대의 메시지를 계속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것은 과학적,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미신적이거나 잠꼬대같이 들린다. 극도로 보수적이고 열광주의적인 크리스천들은 아직도 많은 과학적 발견과 사실들을 거부하고, 마치 성서가 천문학과 생물학의 교과서이고 법과 윤리의 법전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서나 하느님의 말씀은 과학적 지식의 계몽을 위해 이 세상에 주어진 책이 아니다. 성서는 인간됨의 의미와 인간이 가야 할 길, 인간과 인간 사이에 보다 이상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고 유지하는 정신과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책이다.

교회가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현대인에게 아무 의미없는 설교들을 반복하는 것은 교회에 나오는 현대인들을 쫒아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의사소통에 서투른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새 술을 새 가죽부대에 넣기를 거부하는 오늘날의 설교자들이다. 하느님은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급속도로 변천하고 있는 사회에서 변화를 거부하고 가장 보수적이고 고루한 낡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본래 종교(religio)란 말은 ‘religio’란 라틴말에서 왔는데 이 말은 ‘뒤로 묶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복합어이다. 오늘날 교회가 동적인 신앙적 운동체이기보다도 종교화 되고, 제도화 되어가고 있는데 이것이 교회를 보수 세력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종교화 하고, 제도화 된 교회는 시대착오적인 낡은 메시지를 그대로 반복하기 마련이다. 변화 없이 성장 없고, 성장 없이 생명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생물학의 철칙이고 역사의 법칙이다.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역할

둘째로, 교회 쇠퇴의 원인은 교회가 그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세상에 보내진 기관이다. 빛은 진리를 의미하고 소금은 생명을 주고 보전하는 희생적 매개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빛과 소금은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agent)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전파하고, 실천하고, 구현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성서가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고, 이 사랑에만 삶이 가능하고 의미가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가 우리에게 명하는 바는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이러한 빛에서 찾아야 한다. 경제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교회는 사랑이란 품목(가치)을 생산하고 보급하는 기관이다. 또 교회는 “하느님의 의(義)와 그의 나라(또는 통치)”를 이 땅 위에 구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특수한 신앙의 공동체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치가 하느님의 정치원리에 의해 심판되고 정립되며, 갱신(혁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정치원리란 자유, 정의, 평등, 박애 등의 가치에 입각한 사랑의 공동체와 책임 사회의 구현인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 교회가 부여받은 정치적 사명이 유래한다.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이해할 때 오늘날 교회가 바른 자리에 서 있는가, 하는 문제가 식별될 수 있다.

박물관 같은 교회

오늘날의 교회는 진리와 생명의 온상이기보다도 기껏해야 죽어 화석으로 된 과거 유물의 박물관이 아닌지? 교회가 세상 구원은 고사하고 자기 구원도 어려울 정도로 도덕적 능력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의 이익과 부를 추구하고 자기 생존을 위해 급급하다 보면 교회는 어느새 제도화 되고 상업화 되기 마련이다. 교회가 사랑의 생산과 보급은커녕 미움과 이기심과 다툼을 조장하는 술도가와도 같은 곳으로 착각될 정도이고, 새 인격은 고사하고 병적 인간성을 길러내는 양성소인 듯하다. 오늘날 교회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왕국이 아니라, 악마 왕국의 여행사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때도 없지 않다.

열매를 맺지 않는 과일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과일나무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가 과연 열매를 맺고 있는 나무인가? 이 세상을 위해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듣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속해 있던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한국교회가 서구 교회들의 잘못을 되밟고, 미국에서 유행하는 복음 전도를 빙자한 장사치들의 싸구려 복음화 상술을 가지고 교회부흥운동을 계속하고, 자기갱신과 혁신을 통한 교회다운 교회로 새로 나지 않고, 온갖 병 증세를 지닌 채 살아간다면, 단 한 번의 서리에 얼어 시체가 되는 무나 배추 신세가 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본분과 역할에 충실해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또는 신부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몸뚱이라고도 한다. 두 다른 개체 사이에 몸이나 부부관계라는 것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둘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목회에 일치되는 것들을 수행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신부라고 하면서 실제로 교회가 그리스도와 상관없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다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나 신부가 아니다. 나무둥치에 붙어 있지 않고 잘려나간 가지를 더 이상 그 나무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와 단절된 기관이라면 그런 교회는 쇠퇴하고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부름 받고 보냄을 받은 존재인데, 부르고 보낸 분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 그런 교회는 맛 잃은 소금, 열매 맺지 않는 과일나무와 같다. 맛 잃은 소금의 운명은 길바닥에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되고, 땅만 썩히고 열매를 맺지 않는 과일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져 죽을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경고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하는 교회, 세계 구원의 선교를 담당하여야 하는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 이런 교회는 주인인 그리스도에게 버림받게 되고, 결국에는 쇠퇴해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는 것이다. 이런 교회는 차라리 쇠퇴해야만 한다.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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