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혁명을 위해, 지금 신앙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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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혁명을 위해, 지금 신앙이 필요한 이유
  • 최태선
  • 승인 2020.08.1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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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는 분이 옥수수를 보내주셨습니다. 받은 즉시 삶아서 세 개를 먹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예전에 텃밭에서 옥수수를 수확하여 바로 삶아 먹을 때의 그 맛을 기억합니다. 소금조차 넣지 않아도 그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듬성듬성 알이 박힌 못생긴 놈들은 더 맛이 있었습니다. 그 옥수수 하나를 남겨두면 다음 해에도 똑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삶았어도 하루라는 시간이 지나서 그때의 맛을 재현할 수는 없었지만 보내주신 이의 정성이 더해지니 행복감은 비슷했습니다.

텃밭 수준이었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그 시간이 언제나 그립습니다. 그래도 심어보지 않은 것 없이 거의 모든 작물을 다 키워보았습니다. 친구 목사의 아내가 암이라서 농약을 하나도 치지 않았습니다. 음식물 찌꺼기 건조한 것을 가져다 EM을 부어 퇴비도 만들었습니다. 오이에 많이 생기는 지독한 진딧물은 손바닥으로 비벼 없앴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김장배추도 농약을 한 방울도 치지 않고 길러냈습니다. 물론 수확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래도 세 집 김장을 담글 수 있을 만큼은 거뜬히 수확했습니다. 그렇게 수확한 것을 그 목사님에게 드리고 이웃과 나눌 때의 행복은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사실 퇴비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농사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자 농부의 진짜 실력입니다. 음식물 건조한 것을 가져다 퇴비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실제로 그걸 퇴비로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농사 경험이 많은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음식물 건조한 것을 가져다 드릴 테니 퇴비로 만들어보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흔쾌히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음식물 건조한 것을 한 자루 가져다 그분의 밭에 놓아드렸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분도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밭에 뿌리면 안 된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것을 한동안 방치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비를 맞으며 물을 먹고 등에가 알을 낳아 파리 구더기보다 훨씬 더 큰 구더기들이 자루 안에 가득 찼습니다. 냄새는 말도 못하게 지독했습니다. 그러자 퇴비를 만들어보겠다던 그분이 제게 그걸 빨리 갖다 치우라고 볼멘소리를 하였습니다.

참 경우 없는 일이었지만 목사가 된 이후 저는 사람들과 말다툼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무서운 자루를 제가 농사짓는 밭 근처로 힘들게 옮겼습니다. 그 일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도무지 힘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신히 그것을 옮겨 놓고 땅에 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배추를 심으려고 비워 놓은 밭에 듬성듬성 구멍을 파고 그것을 한 삽씩 묻었습니다. 밭은 온통 등에 구더기로 하얗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새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밭이 깨끗해졌습니다. 일단 새들의 파티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배추 모종을 그 밭에 이식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심자마자 배추모종들이 꼿꼿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게 제 느낌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배추들이 하나도 시들지도 죽지도 않고 힘차게 자랐습니다. 그해 가장 많은 배추를 수확했습니다. 그러니까 우연히 음식물 쓰레기로 퇴비를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 음식물 쓰레기를 등에 구더기가 먹고 배설한 것이 양질의 퇴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배설물의 위대한 힘을 보았습니다.

근처 밭에는 돼지 배설물을 트럭으로 실어다 뿌리고 작물을 키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돼지 배설물을 듬뿍 준 그 밭은 그야말로 영양덩어리였습니다. 저도 그 돼지 배설물을 얻어다 밭에 뿌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돼지 배설물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항생제가 들어있기 때문에 퇴비로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느꼈던 작은 유혹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실 돼지 배설물만이 아닙니다. 퇴비가 될 수 있는 것들은 더 있습니다. 웬델 베리의 책에서 본 것으로 기억됩니다. 가난한 멕시코의 농부들은 비싼 비료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천의 썩은 슬러지를 가져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상상외로 그것은 훌륭한 비료가 되었습니다. 작물들이 보기 좋게 크게 자라났습니다. 농부들은 그것을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슬러지에 포함되어 있던 중금속들이 그대로 작물에 옮겨갔습니다. 그러니까 멕시코의 부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 중금속 덩어리를 사먹은 것입니다. 웬델 베리는 이것을 공멸의 길로 제시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배설물까지 오염시켰습니다. 자연스런 순환의 길이 막힌 것입니다. 자연스런 순환의 길이 막히면 가장 약한 종(種)들의 멸종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멸종은 또 다른 멸종을 불러옵니다. 자연의 붕괴현상의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댐에 뚫린 작은 구멍처럼 그 영향이 미미하기 때문에 주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렇게 가속도가 붙으면 그 다음은 걷잡을 수 없는 붕괴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장마는 장마가 아니라 바로 이런 자연의 붕괴현상입니다.

오늘도 농촌의 붕괴는 도시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내용의 글을 보았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농업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그 기초가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들이 무너집니다. 멕시코의 경우에 보았듯이 돈이 있다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먹을거리만을 골라 사먹는다고 해도 그것이 중금속덩어리일 수 있습니다. 환경이 오염되어 생물 종들의 멸종이 시작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속수무책입니다. 얼마 전 타계한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말대로 달이나 화성에 인간이 거주할 터전을 마련한다 해도 지구라는 고향이 사라지면 인간다운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가 떠오릅니다. 그 책 마지막 장에서, 그는 한 사람의 혁명에 대해 말합니다. 독일에 머물던 호이나키는, 어느 날 부시의 바그다드 폭격(1991년)이라는 충격에 접하게 됩니다. 동료들과 일견 무력해 보이는 피켓 시위를 하면서 많은 자성(自省)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제국주의와 거대한 미국의 폭력 앞에 무력한 인간,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를 묻고 호이나키는 그 대답으로 '울고 있는 바보', '거룩한 거부자'의 삶을 제창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바보의 정신을 아나키즘에서 찾습니다. 그것은 자유주의 경제의 풍요에 대해 깊고 크게 울리는 소리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완전한 대안을 가진 하나의 사회-정치철학으로서의 아나키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그는 한 사람의 혁명을 말합니다.

"내가 먼저 나 자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지도 않고, '힘든 노동의 삶'을 살지 않고도,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고, 몸소 집 없는 사람과 거리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고도, 일관된 논리를 가진 위대한 아나키스트 이론가가 될 수는 있다."

아나키즘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생소한 개념이고 또 안다고 해도 그리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자기가 모르면 다 공산주의요 빨갱이입니다.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인 것이 아나키즘입니다. 몰라도 좋고 환영을 받지 못해도 좋습니다. 다만 호이나키가 말하는 한 사람의 혁명을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더 이상 이대로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대통령이 나와도 아무리 좋은 정책이 나와도 이미 붕괴되기 시작한 종말의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아나키스트 윤리를 통해서, 우리는 국가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고, 갈수록 더 모든 사람의 삶을 통제하는 복잡한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맞설 수 있다. 내가 이들 무수한 시스템을 변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시스템이 제공하는 외관상의 안락과 안전과 특권과 명예를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것을 시작할 수는 있다."고 호이나키는 말합니다.

저는 호이나키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젠 그 누구도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모두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변화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호이나키의 말처럼 내가(!!) 안락과 안전과 특권과 명예를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것을 시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이나키 본인도 정작 이 한 사람의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서 확신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거룩한 바보의 정신이라는 걸 그도 압니다. 그럼에도 그가 거룩한 바보의 정신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가 신앙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신앙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신앙하는 사람만이 포기할 수 있고, 신앙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설물까지 오염된 이 종말에 거룩한 바보의 정신을 살아내는 한 사람의 혁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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