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Essay] 차해도 씨, 나는 영원한 노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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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Essay] 차해도 씨, 나는 영원한 노동자입니다
  • 장영식
  • 승인 2020.07.1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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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식의 포토에세이
차해도 씨는 41년 10개월을 조선소 노동자로 일을 하고, 2019년 12월 31일 정년을 맞았다. 그는 정년 후에도 금속노조 조합원을 유지하고 있는 영원한 철의 노동자이다.  (사진=장영식)
차해도 씨는 41년 10개월을 조선소 노동자로 일을 하고, 2019년 12월 31일 정년을 맞았다. 그는 정년 후에도 금속노조 조합원을 유지하고 있는 영원한 철의 노동자이다. (사진=장영식)

41년 10개월. 백발의 차해도 씨가 마산에 있는 코리아 타코마부터 시작하여 2019년까지 한 노동자로 보낸 세월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배를 만든 것은 채 10년이 안 되고, 나머지 세월은 노동조합 상근활동으로 보냈다. 그는 작년 12월 31일 정년퇴직을 했다.

차해도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던 1978년 3월 2일 1년 과정의 직업훈련소 과정을 수료하고, 1979년 3월 2일 코리아 타코마의 정식 직원으로 입사했다. 1987년 노동조합을 창립한 것은 노동자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그는 노동조합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1989년에 해고되고, 1996년 1월에 대법원에서 승소해서 6년 만에 복직했다. 그때 변호사가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2003년, 마산에 있던 코리아 타코마와 울산에 있던 동해조선소 그리고 대한조선공사가 한진중공업으로 합병되었다. 한진중공업은 합병과 동시에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차해도 씨는 당시 집이 진해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노조사무실에서 김주익 지회장과 숙식을 함께 했다. 1주일이 지난 후 김주익 지회장이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잠시 집엘 다녀 오라”고 권했다. 그날 김주익 지회장은 85호 크레인 고공 농성에 돌입했다.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 동안 고공에서 농성 투쟁을 하고 자진했다. 그 이후 김주익 지회장의 선배였던 곽재규 열사가 배를 건조하는 4도크에서 투신했다. 2003년 10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열사 투쟁 후에 한진중공업은 백기를 들었다. 그때 10여 명의 해고자들이 모두 복직했으나, 김진숙 지도위원은 끝내 합의를 보지 못했다. 한진중공업 측은 김진숙의 복직 대신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조합도 김진숙도 거부했다. 그때 더 가열차게 투쟁하며 김진숙의 복직을 요구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다.

 

차해도 씨는 김주익 열사와 김진숙 지도위원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죄스럽다"라고 표현한다. 정년 퇴직조차 죄스럽다고 표현한다. 이제는 그 미안함에서도 해방되었으면 좋겠다.(사진=장영식)
차해도 씨는 김주익 열사와 김진숙 지도위원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죄스럽다"라고 표현한다. 정년 퇴직조차 죄스럽다고 표현한다. 이제는 그 미안함에서도 해방되었으면 좋겠다.(사진=장영식)

2008년에도 단식투쟁을 통해 김진숙의 복직을 요구했다. 회사는 김진숙에게 매월 200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복직문제는 차후에 다시 논의하자고 회유했다. 노조는 과거보다 진일보한 제안이라고 생각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뜻을 물었으나, 김진숙 지도위원은 “일하지 않고 돈을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라며 한 마디로 거부했다. 그 이후 노조의 복직요구는 교섭의 단골 메뉴였지만, 형식적이었다. 그마저도 복수노조에 의한 어용노조가 교섭권을 가지면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차해도 씨는 박창수 열사 투쟁 기간에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났고, 김주익 열사 투쟁을 겪으면서 ‘더불어 사는 것’이 뭔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김주익 열사의 아내는 자신을 붙잡고 “왜 당신이 아니고 우리 신랑이냐?”라며 오열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김주익과 김진숙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정년퇴직을 한 것도 ‘죄스럽다’라고 표현했다. 한 노동자가 한 직장에서 정년을 맞는 것은 가장 명예로운 일이지만, 그는 ‘죄스럽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지금 현재의 김진숙 지도위원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죄스럽다고 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혼자 몸으로 35년의 해고 생활을 겪고 있고, 병까지 얻었으니 그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그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건강한 몸으로 복직해서 한국노동운동사에 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복직해서 밝은 모습으로 조합원을 만나 교육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차해도 씨는 6년간의 해고와 네 번의 구속을 겪었다. 타코마 매각 투쟁과 김주익 열사 투쟁 그리고 한미FTA 투쟁과 광우병 투쟁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마산에서 한 번, 부산에서 세 번의 구속을 겪었다. 그는 해고 후 수배 중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감옥에서 출소 후에 결혼을 하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차해도 씨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 투쟁 선전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문현동에서 영도다리를 지나 영도조선소까지 매일 자전거로 왕복한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사진=장영식)
차해도 씨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 투쟁 선전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문현동에서 영도다리를 지나 영도조선소까지 매일 자전거로 왕복한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책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사진=장영식)

차해도 씨는 40년이 넘는 조선소 노동자 생활에서 잠수함 1호정(돌고래급)을 만들고 해고됐다. 노동조합 상근직을 그만두고 2018년 현장으로 복귀한 후에 상륙정인 마라도함을 만들었다. 그가 완성된 배를 만든 것은 두 척이었다. 지금은 문현동에서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영도조선소 앞으로 달려온다. 김진숙의 복직 투쟁에 함께 하기 위해서다. 영원한 금속노조 조합원인 차해도 씨는 오늘도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을 염원하며 영도다리를 건너기 위해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장영식 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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