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기대면 죽음조차 가벼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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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기대면 죽음조차 가벼울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07.0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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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7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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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일 비가 오고 나더니 감자에 싹이 돋기 시작했다. 텃밭에 뿌린 래디쉬(홍무)는 일주일 만에 싹이 나고, 시금치, 쑥갓이 자라기 시작했다. 옥수수는 포트에 모종을 하였는데 조만간 본밭에 옮겨 심을 예정이다. 일주일 뒤에는 고추 모종을 밭에 심고 버팀목도 꽂아두어야 한다. 논에 만들어 놓은 못자리에선 볍씨가 싹을 틔워 비닐터널 안이 연초록빛을 띠고 있다. 만물이 생기를 얻고, 비 한 줄금 올 때마다 부쩍 키가 클 것이다.

가뭄 중간에 비가 긋고 나자, 며칠 전에는 오전에 고사리를 끊으러 숲에 들어갔다. 우선 임도 끝에 있는 논 뒷산을 헤집고 다녔는데, 소문대로 등성이 하나를 넘으니 온통 무덤이다. 사람들은 공동묘지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어떤 묘소는 지난 한식 때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역력하다. 군데군데 파 옮긴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있었고, 무덤은 그대로 있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흙이 패이거나 아예 봉분 위로 나무가 자라는 곳도 있었다.

고사리는 양지바른 묘소 주변에 많이 자라는 탓에 ‘고사리꾼’들이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인데,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주변을 어정거리다가, 황폐한 무덤을 만나면 왠지 마음이 신산스러워진다. 멈칫거리다가 무릎을 괴고 고사리를 끊으면서 마음속으로나마 무덤의 주인이 너무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라곤 했다. 무덤 주위엔 고사리도 많았지만, 할미꽃, 하얀 봄맞이꽃, 밝은 파랑의 봄구슬봉이 등 풀꽃들도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이 지구상 어디에선가 죽어가는 목숨이 있겠지만 여전히 새로 나는 목숨도 있다는 뜻이겠다.

이렇게 낯모를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담백하게 생각하고 넘길 수 있을 텐데, 실상 호흡이 가까웠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저 담담한 표정만 짓고 있을 수 없는 게 또한 사람의 정인 모양이다. 작년에 충청북도 미원의 고두미 마을에 한옥을 짓고 사는 대학 시절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그 내외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밤늦은 시각에 전화로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된 사람이 홍승표 목사 내외였다. 그 후 감감히 그 사람들 생각을 잊고 살았는데, 내가 서울에 일 보러 간 사이에 무주 집에 그네들이 찾아왔었노라는 이야기를 아내에게 전해 들었다. 의외였기에 더 반갑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만나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더해 주었다.

첫인상이 부드럽고 담백하였다는 아내의 이야기 때문에 일간 한번 보리라 생각했는데 전갈이 왔다. 시골에 있는 그가 목회 하는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한 자락 해줄 수 있겠느냐는 청이었다. 그 참에 아내와 나는 바람도 쐴 겸 대청호 자락에 있는 그 교회에 갔다. 거기서 김복관 선생님도 처음 뵈었는데, 그때 그분은 교인들의 단식을 도와주고 계셨다.

그 후로 홍 목사 부부는 미원에 사는 내 친구 부부와 여름에 한 번 무주에 놀러 와서 모닥불 피워놓고 왁자하게 술 먹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다음엔 아내가 친구랑 홍 목사 부인 김순온 님을 만나러 다녀와선, 지난 겨울에 홍 목사 부부가 다시 한 번 우리 집에 방문하였고, 얼마 후 내가 대청호 부근의 청소년 수련관에서 천주교회사 강의가 있어서 갔다가 그 교회에 들렀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그들과 얼굴을 마주한 날들을 일일이 손꼽아 보는 것은 이유가 있다. 사람의 마음을 담는 데 때론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굳이 자주 만나야 사람들 사이에 인연의 골이 깊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픈 거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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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었다. 오전에 강의가 끝날 예정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점심때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련원을 떠날 수 있었다. 홍 목사가 직접 승합차로 와서 기다리다가 함께 회남으로 출발했다. 대청호를 끼고 달리다 산비탈길을 몇 차례 굽어 달리기를 한참 해서야 교회에 닿았다. 그때까지 식사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던 김순온 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끌어안고 인사를 하였다. 환대의 표시이다.

민주와 배한이, 그리고 나와 그들 부부, 이렇게 다섯이 앉아 밥을 먹고, 찻물을 달이는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 주었다.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회를 떠나 대전으로 갔다. 홍 목사 내외는 장모님을 모시고 병원엘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대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무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날 김순온 님이 사과 몇 알과 몇 가지 다른 선물, 때마침 비가 오는지라 우산도 챙겨 주었다. 행복한 하루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아홉 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어젯밤 아홉 시 반 경에 교통사고로 김순온 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음주 운전하던 상대방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추돌했다는 거였다. 헤어진 뒤 세 시간 만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머릿속이 먹먹해졌다. 그러곤 마음이 급해져서 대전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영안실에서 만난 홍 목사는 손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충격을 받을까봐 다른 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한다. 분향을 할 때까지 담담한 모습이던 홍 목사가 눈물을 터뜨리며 했던 말은 이랬다. “형, 난 그 사람 없인 못 사는데…….”

그날 밤, 김순온 님이 참여했던, 이현주 목사님과 함께 공부하는 노자(老子) 공부모임 사람들과 더불어 술을 마셨다. 잡지 <풍경소리>를 만드시 는 김민해 목사도 줄곧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거기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무게로 김순온 님의 자리가 느껴졌다. 여자이면서도 걸걸한 웃음소리를 지녔던 사람이었다. 우리 아기 백일 때는 꼭 오리라고 약조했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농사짓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우리보다 더 농사짓는 사람처럼 양식을 챙겨오던 ‘사람’이었다.

그날 마침 펼쳐져 있어서 우연히 읽고 놀랐던 <생활성서>의 매일묵상을 위한 칼럼. 글쓴이는 박노해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심어지는 것이라고 썼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서, 그가 살면서 땅에 뿌리내린 만큼 죽어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는 법이라는 말일 텐데, 죽음이란 영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일 텐데, 죽음이란 살아 있는 몸처럼 묶인 데 없이 더 자유롭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말일 텐데, 사람이란 한 번 죽어 영원을 사는 존재라는 뜻일 텐데, 마음이 수습되지는 않아도 생각으로는 위로가 되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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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온 님이 이승을 떠나기 바로 전에 집으로 배달된 우편물이 있었다. 그가 직전에 마무리 지었던 석사학위 논문이었다. ‘거룩함에 이 르는 길’이라는 제목과 ‘영성 수련의 내적 과정에 대한 신학적・심리학적 성찰’이란 부제가 달려 있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때 꽤 오랜 기간 ‘동광원’이라는 개신교 수도단체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는데, 그의 생애가 이미 영성 수련이었던 셈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푸른꿈고등학교에 가서 ‘종교와 사회’라는 과목을 학생들과 나누고 있는데, 오늘 보여준 임권택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라는 영화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깎은 머리가 예뻤던 강수연의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진성과 청하(순녀)의 수행법을 새기면서, 깨달음의 언덕으로 가고자 하는 수행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안타까워하면서도 간절한 염(念)을 버리고 못하는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어쩌면 김순온 님은 진성의 청정함과 청하의 이타행(利他行)을 통합시키고자 고뇌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김순온 님의 논문 가운데 「영성 수련의 필요성」이란 글은 학술적이기보다 자기고백적으로 들린다.

"하느님과의 특별한 만남은 인간이 미리 계획할 수 없지만, 이를 위해 준비할 수는 있다. 우리의 무질서가 바로잡혀 질서있게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냐시오 로욜라에게 질서와 무질서라는 개념은 매우 독특하다. 무질서란 단지 죄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생동감을 축소시키는 무엇이다. 그리고 질서는 단지 질서정연한 배열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향한 생동감을 말한다. 이것은 하느님을 위해 열려진 삶, 그분께 온전히 응답하는 삶을 말한다. 이러한 생동감을 성취하기 위해 영성 수련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환상적 인격, 즉 거짓 나로 그늘져 있다. 그래서 쾌락과 사랑, 권세와 명예, 경험과 지식을 겹겹이 쌓아, 거짓 나를 입히고, 허무를 참으로 있는 것처럼 꾸미느라 자신의 생명을 소진해 버린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향한, 이웃을 향한 생동감은 고갈되어 버리고 만다. 토마스 머튼은 “거짓 나를 버리고 참 나를 찾는 일, 이것이 성덕(聖德)이며 구원의 문제”라고 말하는데, 참 나를 찾을 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생동감을 회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참 나를 찾을 수 있을까? 토마스 머튼은 ‘참 자기’가 되는 비밀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속에 파묻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자기 존재의 충족이 파묻혀 있는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기를 찾는 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일치되어 참 자기를 찾게 되는 영성수련은 인간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영적 생활은 선물이다. 이것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의 나라로 들어 올리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나…… 영적 생활은 인간의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를 걱정에 찬 생활로 다시 끌어가려는 세력은 쉽게 물리칠 수 없는 것이다. 영성수련은 하느님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을 더욱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준다. 예수님은 항상 하느님 아버지께 귀를 기울였고,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우리의 영적 수련은 우리를 이러 한 예수님의 삶의 모습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영적 수련에 있어서 우리 편에서 중요한 것은 수련에 충실히 임하려는 성실함이다."

그의 얼굴이 삼삼하다. 헛, 헛 하던 웃음소리가 귀청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이처럼 이승을 떠나면 타인들에게 아름다운 그늘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고, 그리고 난 아직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모른다.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생사가 따로 없다는 투의 사상이론은 얼마든지 예로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실상 그렇게 살다 장엄하면서 여유 있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스콧 니어링과 같은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정작 그게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살아낸 만큼 죽음은 의미로울 것 같다. 세상을 당당하게 후회 없이 살았던 사람은 죽음 이후의 길조차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빛 가운데서 맞을 것이다. 매일같이 오늘 하루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 백번 지당한 말씀인데, 실상 놓 치고 살아가니 스스로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내 죽을 때 김순온 님과 같은 따뜻하고 익숙한 영혼이 저승에서 내 손을 붙잡아 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면, 그러면 죽음이 안심이 될까. 내 죽어 저승에 가면, 먼저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너 왔냐?”하시며 기다렸다는 듯이 안아 주신다고 믿으면 좀 두려움이 사라질까. 내 힘으로 죽음을 태연하게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런 나보다 더 푸근한 어떤 존재의 힘을 빌리면 안 될까. 이 시간엔 천상의 성인(聖人)들에게 기도하고 싶어진다. 나의 수호천사 이름을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듯 기꺼이 부르고 또 부르고 싶다. 어찌 보면 성인 천사가 따로 있겠는가, 내 잘잘못에도 타박하지 않고 받아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바로 성인이요 수호천사이지 않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삶이란 정말 ‘수행(修行)’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시시각각 죽음 앞에 선 존재로서, 그 죽음마저 삼켜 버릴 거룩한 불꽃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 그런 수행의 자세로 하루를 살며, 사랑하고 투쟁하면서 일상의 복닥거림을 감당해 가야 하는 게 아닐까. 김순온 님은 그의 논문에서 리차드 하디의 <무(無)에의 추구>(분도출판사)를 인용하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을 이렇게 새겼다. “십자가의 요한은 하느님과 일치할수록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을 사랑하며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고, 마침내 하느님이 지어내신 삼라만상 안에 뿌리를 내렸다.” 이 세상과 우리 삶에 더 밀도 있게 뿌리내리기 위해서 하느님과의 일치가 요청된다는 말인데, 아마도 가장 깊은 영성은 죽음마저 뛰어넘는 사랑을 낳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입하(立夏)다.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말인가. 산자락을 가득 채우던 개나리 진달래가 다 지고, 애기똥풀과 쑥갓이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는 동안에, 천지가 연초록빛을 지나 시퍼렇게 물들고 있다. 생기가 더욱 강해지고, 이젠 무슨 작물을 심어도 하루가 다르게 싹이 트고 무성하게 자란다. 겨우내 응축되었던 생기가 때를 만나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여명(黎明)을 넘어서 산마루에 해가 넘어오는 순간에 세상이 급작스럽게 환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갑작스레 한 계절이 가고 다른 계절이 찾아온다. 죽은 이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축복을 내리고, 산 이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며 그의 삶마저 끌어안고 걸어가며 한꺼번에 경축한다. 살아 있는 모든 목숨들은 이미 사라진 목숨들의 음덕으로 존재하고, 죽은 이들은 살아 있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삶을 계속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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