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미래를 구하려고 그녀들이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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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미래를 구하려고 그녀들이 돌아오고 있다
  • 강신숙 수녀
  • 승인 2020.06.1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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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적 신비주의를 살아간 여성들을 기억하며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한 대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하느님 현존의 신비주의를 체험할 때만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의 미래를 구할 수 있다.”

그녀가 말한 신비주의는 하느님의 혁명, 저항을 내포한 신비주의를 의미한다. 이 말은 인터뷰 대담자들이 겪은 당시 시대적 맥락, 제2차 세계대전이 빚어낸 끔찍하고 잔인한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모르고선 이해할 수 없다. 이 거대한 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의무는 간과한 채 미래의 교회를 걱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미래가 가능해야 그리스도교와 세계의 미래도 가능할 수 있다. 전쟁 이후 밝혀진 충격적 실체는 전 세계인들의 눈을 의심케 했다. 종교인, 문인, 예술가, 일반인들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비현실적 비극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신자든 무신론자든 예외 없이 든 첫 번째 질문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였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런 비극을 허락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과 문명에 대한 절망적 회의로 이어졌다.

견고했던 이천 년 동안의 신학적 명제들과 근대의 이성적 인간이 총체적으로 의문에 처해졌다. 이후 신과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세계를 복구하고 근거를 세우려는 신학적 시도들이 분출했다. 도로테 죌레는 ‘여성들의 저항적 신비주의’를 통해 기존 신학에서 건드리지 않았던 연민의 하느님과 인간의 미래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시도했다. 그렇게 해서 전통이나 과거로부터 판박이처럼 '말해진' 역사가 아니라 실제로 '체험된' 역사를 새로이 쓰고자 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일면식도 없는 자들에게, 공감에 무능한 집단에게 더는 신과 교회와 세계를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의회 문헌 속에서 잠든 미래

세계의 폐허 속에서 재건이 한창이던 시기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의 일성은 “시대의 징표”였다. 이 말 속엔 교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새로운 개혁을 예고하고 있었다. 시대의 징표는 당장 <사목헌장> 첫 구절에서 비장한 어조로 나타났다: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중략) 따라서 그리스도 제자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사목헌장1장)

너무도 당연하고 간단한 이 조항이 공식적으로 표명되기까지 교회는, 아니 엄밀히 말해서 위계조직의 상급자들은 이 천 년을 돌아 예수가 몸담았던 이 땅으로 내려왔다. 선언대로 주체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공동체”이며, 공동체여야 하는데, 전 세계인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이상은 현실로 이어지지 못했다. 얼마지 않아 ‘쇄신’과 관련된 대부분의 문구는 문헌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공의회에 대한 흥분과 열망으로 가득 찼던 진보지식인이나 신학자들이 나서서 불씨를 살려보려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어느 노선도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데에 무능했다. 개혁의 소리들은 하느님에 의해 설립된 진리의 교회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보편적 중재자라는 레토릭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구조 앞에서 새로운 창조적 바람을 기대하는 이는 적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교회 문턱을 넘어서 들어온 사람보다 떠나는 행렬이 더 길어졌다. 직접적 원인과 비판을 직면하고 맞서는 일은 두려운 일이었다. 교회의 미래는 통계수치 따위에 의존해서 설계되거나 근거로 삼거나 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제도적 교회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길을 걸어갔다.

21세기 들어 서서히 지구촌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차별과 고통에 노출된 이들과 함께 종교와 상관없이 대열을 이루며 행동하기 시작했다. 전통신학에서 벗어나 지역과 인종, 성별, 피부색,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고통받는 현장이면 어디서든 신학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구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가 신과 인간의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와 신의 미래를 말하기 시작했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 들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무능한 신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사람들이 가슴으로 느끼고 공감하며, 함께 대열을 이루는 신에게로 돌아왔다. 이런 일들은 이미 800여년 전 교회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문제시하고 도전했던 당시 용감한 여성들과 평신도 운동에서도 발견된다. 그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시에나의 카타리나

중세 여성신비가들의 출현 배경

중세를 가로지르는 시간과 공간은 오늘날과는 판연히 다른 세계였다. 오늘날까지 현존해 내려오는 교회제도는 중세에서 시작되고 완성되었지만, 전 과정은 결코 평화롭게 진척되지 못했다. 무수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거나 희생되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중세 여성신비가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2~15세기의 교회와 시대적 맥락을 전제해야만 한다.

높은 첨탑의 교회와 고성들의 역사를 향유할 수 있었던 계층은 남녀 예외 없이 성직자나 귀족계급들이었다. 나머지 90퍼센트의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 선택권도 없이 ‘거대한 강제 수용소’에 갇혀 살아야 했던 농노들이었다. 중세의 찬란한 배경은 사실상 이들을 착취해서 이루어진 10퍼센트의 문화였던 셈이다.

중세의 교회개혁은 주로 교황권과 성직을 황제와 귀족들로부터 보호하고 되찾는 데 집중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의 권력을 폄훼하고 교회의 모든 위계가 천상적 질서로 확립되어야 했다. 제도의 성역화는 위대한 신의 세계로 승격되고, 그 세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거대한 건축물로 축조되었다.

권력은 토지의 유무와 뗄 수 없는 관계여서 교회 재산의 확장을 위한 사업에 ‘성직’ 만한 것이 없었다. 성직은 물질을 축성해서 거룩함으로 되파는 합법적 ‘직’으로 전락했다. 교회의 오랜 관행이던 성직매매나 대사부 판매와 같은 성사권 남용이 근절되지 못한 데에는 다 그런 이유가 있다.

유럽 농지의 4분의 1이 교회 땅이라는 공식적 기록만 보더라도 교회개혁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교회를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은 성직자나 신학자들의 셀프역사관으로는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 당시 역사에서 배제된 자들, 특별히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이들, 이단자(불태워진 자)들, 농노들, (남녀) 평신도 운동 편에 서서 바라보아야 보인다.

개혁의 과정에서 여성들이 입은 피해는 성직자들의 독신제 개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은 독신 성직자들이 기피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이지만 중세에는 그 정도가 더 극심했다. 여성과 여성수도자들의 탄압을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다. 중세 공의회들의 결정과 법제화에 여성들을 제재하고 감금한 기록이나 마녀화형의 기록물들이 당시를 미루어 짐작케 할 뿐이다.

여성들은 활동, 교육, 봉사, 독신(동정)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봉쇄를 제외한 어떤 수도회 설립도 금지되었다.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혼인이거나 봉쇄수도원 둘 중 하나였다. 수많은 여성들이 배움의 길을 갈망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으며, 강요되고 장려된 것은 오직 ‘복종’뿐이었다. 여성들의 복종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성교회의 탁월한 모범으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그녀들

이런 시기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여성들이 나타났다. 이 여성들 중에는 교회로부터 성인 칭호를 받은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같은 인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특히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간 베긴(Beguines)의 여성들은 불과 2~300여년(12세기~15세기)의 짧은 시기에 매우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신비주의 문학과 삶의 궤적을 남기고 스러졌다.

그녀들이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다. 이들이 지닌 공통적인 모습은 자국어 성경교육과 신비문학 저술, 교회 부패와 반복음적 교회법의 잔혹성, 이성주의 신학에 대한 저항, 연민과 사랑의 하느님을 관상하고 교회의 무관심을 거슬러 고통받던 당대의 사람들을 돌보는 일 등이다. 이들은 가내수공업을 통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생활방식을 택했으며, 당시의 흔했던 기부금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성직자들에 기대는 의존도도 벗어났다.

그녀들이 불처럼 타오르는 동력으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힘은 오직 하느님과의 신비적 합일과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는 예수의 육화를 통해서였다. 그녀들이야말로 자기 시대의 현장 안에서 신비와 관상을 살아간 첫 번째 인물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직관은 곧 버림받은 하층민들에 대한 직관으로 이어졌다. 성체의 실체변화가 사제들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있을 때 그녀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성체를 살아간 것이다.

베긴의 마그리트 포레트는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신을 포획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음으로써 중세교회의 신관과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성역화 작업을 거부했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소유하고 제도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포레트는 ‘무’에 대한 탁월한 이해에 도달함으로써 신을 대리하고 중재하는 시도들의 환상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하느님이 성사에 종속되는 분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하느님에 관한 것을 사고파는 상인처럼 신을 대할 수는 없으며, 신은 어떤 대상에도 속할 수 없는 분”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속한 것처럼 그분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이 어떤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구애됨이 없이 진실로 하느님 그분 자체여야 합니다.”(«단순한 영혼들의 거울»,135장)

포레트를 비롯해 시에나의 가타리나, 노르비치의 쥴리안에서 하느님의 성별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의 여인’으로, 혹은 예수를 ‘어머니’라 부르며, 신이 남성이라는 등식을 해체했다. 포레트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 마에스트로 에크하르트 역시 그녀와 생각의 궤를 같이했다: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이들은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참회나 다른 어떤 외적 관행에 대해서도 애착이 없으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도 없다. 그 영혼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이기에 어떤 면에서 하느님조차 소유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신성에 대한 어떤 진술도 무의미하다. 신은 모든 언어를 초월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서 존재와 언어, 성은 해체되며, 하느님을 더는 남성이라는 성별에 가둘 수 없다고 말한다. 신을 인간의 성 개념으로 고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고 오만이다. 남성이 하느님의 대리자고 남성만이 사제직과 교회신학과 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류다.

페스트와 전쟁으로 유럽 인구 수천만이 희생되고, 그들을 대상으로 대사부를 판매하던 시기에 여성신비가들은 폐허로 전락한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재건하고 희망을 불어넣는 데 집중했다. 정규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그녀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책을 저술하고, 사람들을 문맹으로부터 구해내며, 새로운 발상의 신학과 직관적 신비주의의 길을 걸어간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미래인지를 말해야 할 때

사진출처=dramoor.tumblr.com
사진출처=dramoor.tumblr.com

그러나 이런 사실 때문에 이후 여성들이 받아야 했던 탄압의 역사는 지난했다. 1274년 리옹 공의회는 새로운 여자수도회 설립을 금지한 제4차 라테란 공의회 교령을 거듭 강조하면서, 베긴회처럼 봉쇄수도원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여성 단체들을 교회에 불복종하는 이단세력으로 몰아갔다. 대중도 여론도 모두 그녀들로부터 등을 돌렸지만 그럼에도 이 여성들은 전혀 동요되는 일 없이 자신들의 명성을 넓혀갔다.

트리엔트 공의회 막바지(1563년)에 결정된 여성들의 활동수도회 설립금지는 이후 300년간 이어졌다. 안젤라 메리치(우르술라회, 1530), 샹딸의 요안나(방문회, 1610), 루이즈 드 마리악(사랑의 딸, 1633)과 수많은 여성 수도회 설립자들이 교회의 반대를 피해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해나갔다. 특별히 메리워드(1585-1645)의 경우는 1609년 ‘예수 수도회’를 설립했으나 1909년 비오10세에 의해 수도회 설립자로 공식 인정을 받기까지 무려 다섯 명의 교황을 거쳐야 했다.

여성신비가들과 수도자들의 활동은 주로 버림받은 이들, 비참한 어린아이들과 여성들, 농민과 노동자들로 집중되었다. 그녀들이 바란 것은 소외된 이들을 위한 돌봄에 헌신하고 삶의 저변을 파고들 수 있는 공동체와 자유로운 활동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공의회가 정한 결정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이들의 열망을 간단히 묵살했다. 언젠가 이들이 남긴 아름답고 독창적인 문학과 활동이 재평가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이들이 불어넣고자 했던 하느님의 연민과 신비체험이 교회에 새로운 영감과 동력으로 작동될 수 있길 희망한다.

반면 과거 이들을 다룬 교회의 부당한 압력 또한 말해져야 하고,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과거사 바로잡기는 단순히 국가공권력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내 (공적) 권력에 대한 역사적 기술 역시 대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관행의 원인과 반복을 막을 수 있고, 제자공동체로서 본래의 원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제서야 교회는 자신이 누구를 위한, 어떤 미래였는지 말할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의 미래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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