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이를 입히는 것은 자비의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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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이를 입히는 것은 자비의 행동이다
  • 사브라 맥켄지-해밀톤
  • 승인 2020.04.0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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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그가 내버렸던 것만 손에 꽉 잡는다.”_장자크 루소

하느님의 첫 번째 자비행위는 벌거벗은 이를 입히는 것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추락” 후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은 나뭇잎 대신 새 옷을 주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창세 3,21) 그들을 달래고 불쌍히 여기며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 옷을 입혔던 하느님은 에덴동산에서 세상으로 그들을 내보낸다.

굶주린 이를 먹이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이를 보살피고,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가고, 죽은 이를 매장하는 것뿐 아니라 벌거벗은 이에게 옷을 입히는 것은 가톨릭일꾼 공동체가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책임의 모형으로 생각하는 마태오복음 25장에 나오는 일곱 가지 육체에 관한 일곱 가지 자선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뉴욕 요셉의 집과 마리아의 집에는 옷방이 있는데, 어떤 때는 차있고 어떤 때는 비어있다. 친구들, 이웃들, 그리고 당신과 같은 독자들이 우리 집에 가져오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있다. 이 방들은 아름답게 정리된 옷장같이 보일 수도 있고 (그럴 때는 극히 드물지만) 아니면 큰 태풍이 지나간 다음의 울긋불긋한 산같이 보일 수도 있다. 물건을 엄청나게 많이 받는다든가 크기가 맞는 신발을 찾기 위하여 결사적인 노력을 할 때, 일할 때 입을 깨끗하고 하얀 셔츠를 찾는다든가, 무엇이 있는지 하느님만이 아실 쇼핑 바구니에 또 무엇을 더 담고 싶을 때에는 그야말로 광란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옷이나 우리 “제1세계” 사회에서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 되어버린 어떤 것이 필요할 때에 환대의 집에 오는 것은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응답하는 우리들에게 셔츠나 드레스, 두꺼운 코트 따위는 단순히 실용적인 기능 그 이상을 수행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주 추운 날에도, 옷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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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은유: 무엇을 입을 것인가

흥미롭게도, 옷은 성경 전체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중요한 은유이다. 히브리 성경의 풍부한 상징주의에서 도움을 받아, 복음사가 루카는 특히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낙오된 이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옷’이라는 상징물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기 예수를 쌌던 포대기(2,7) 라든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의 시신을 베로 쌌다든가 하는 것이 루카의 주의를 끌었다. 하혈을 하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 끝을 만졌는데도 믿었기 때문에 치유된다.(8,44) 우아한 겉옷을 걸친 예수가 헤로데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조롱 받는다.(23,11)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위에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24,49)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한다.

루카복음 12,22-34절의 담화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옷 걱정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섭리를 믿으라고 도전한다: “들에 핀 백합을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는 못하였다. 너희는 왜 그렇게도 믿음이 적으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에게야 얼마나 더 잘 입혀 주시겠느냐?” 옷 입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니 하느님께서 잘 돌봐 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이 구절에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소유물을 팔아 자선을 행함으로써 그들의 마음 안에 신앙의 보물을 간직하라고 요청한다.(12,33-34)

이러한 태도는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는 사도행전(2,44-46;4,32-35)에 반영되어 있다. 즉 공동체 생활은 가진 것을 내놓고 필요에 따라 나누라는 도덕 개념에 의해 다른 생활과 구분된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가진 것을 공동으로 나누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형제자매들, 즉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옷은 음식이나 머물 집과 마찬가지로 신학적으로 그 사람의 신원을 말해 줄 수 있는데, 한편 이런 것들은 루카 시대는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었다. 또한 동시에 이런 “소유물”들은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지위, 신원 그리고 공동체와의 통합 정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예수가 파견한 길 떠나는 선교사들은 신발도 신지 말고 여분의 옷도 가지지 말아야 했다. 이것은 기성 체제에서 철수한 독립적인 삶을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9,3;10,4).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은 그 당시 얻기가 매우 힘들었고, 자주 탐이 나는 물건이었으며, 심지어 강도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6,29; 10,30). 한편 부자들은 그들의 사치스러운 겉옷과 화려한 장식으로 단순히 부유하다고만 묘사되지 않았다. 예수가 광야의 세례자 요한과 사치스럽게 치장한 귀족들의 삶을 비교한 것처럼(7,25) 혹은 우아하게 입은 부자가 고름으로 덮인 거지 라자로가 그의 문간 앞에 앉아있는데도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것을 묘사한 것처럼(16,19), 루카도 부자들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또 옷은 특별한 때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예를 들면 탕자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가장 좋은 옷을 아들에게 입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었다(15,22-23)는 표현이다. 여기서 젊은 아들은 이기적인 고립으로부터 가족과 공동체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고립, 불안에서 공동체와 제자됨 그리고 평화로 옮겨가는 것은 루카의 게라사 지방 마귀 이야기에서 시적으로 그려지고 있다(8, 26-39). 여기서 예수는 마귀 들린 한 남자를 변화시키고 구원해준다. 이 사람은 도시 외곽의 죽은 사람들의 무덤에서 살고, 집에서는 살지 않는다(8,27). 요즘 말로 그는 정신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마귀 들린 사람이었고(8,27) 옷을 입지 않았다(8,27). 이 사람의 헐벗음과 집 없음은 마을 공동체에서 배척된 것을 의미하며, 그 마을은 그를 가난하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자 예수는 그 사람에게서 악령을 추방해 돼지떼에게 보낸다.

치유받은 사람은 이제 제정신이 들었고, 예수의 발치에서 제자의 자세로 앉아있으며(8,35), 집에서 살 수 있고(8,39), 도시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르칠 수 있었다(8,39). 그리고 그는 옷을 입고 있다(8,35).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인간 사회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고립의 경계선을 깨뜨리고 그 사람이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해준다. 옷을 입고 나서 한때는 추방당하고 고립되었던 사람이 인간 사회에서 정체성과 새로운 위치를 회복한 것이다.

루카가 사도 바오로의 생각과 비슷한 점은, 옷을 세례에 대한 심오한 이미지와 은유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한 탕자 아들과 마귀 들린 사람의 모습은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스며든 예수의 경우와 같다. 죽음 같은 상황에 잠기고 가라앉고 ‘은총스러운 거부’로서 물속에 뛰어드는 행위는 낡은 자아를 벗고 새 자아로 변화되는 순간이다.(에페소 4,22-24) 새로운 자아의 옷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로 덮이는 것이며(갈라디아 3,27), 연민, 친절, 겸손, 온유함, 인내, 용서 그리고 사랑의 기질을 갖추는 것이다.(골로사이 3,12-14)

그리스도안에 새로운 자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어떤 생활 방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속에서 예전에 익숙했던 자아를 죽임으로써, 한때 벽을 만들었던 분리가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사라진다.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자신에게 죽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와 합쳐진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에게 세례는 개인적인 구원행위 그 이상이다. 그것은 집단차원의 구원행위이며, 그것을 통하여 특별한 형제적 일치, 그리스도인들의 친교(코이노니아)가 발생한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 3,28; 골로사이 3,11; 고린토 1서 12,13)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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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눈: 필요한 옷, 아름다운 옷

성경의 관점으로 보면, 옷은 은유로서 또한 구체적으로 실용적인 필수품이다. 그러나 상업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그리고 낭비에 의해 손상된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옷은 쉽게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슈퍼모델이 멋진 옷을 입고 광고하는 동안에, 그 옷을 만드는 노예상태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 자신의 옷장과 서랍이 우리가 입지도 않을 옷으로 넘쳐나는 오늘날, 옷에 대해 말할 때 어떤 모습이 연상되겠는가? 우리 옷장의 두 번째 외투는 이미 가난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한 바실리오 성인의 권고를 피터 모린이 자주 인용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도 우리가 소유한 셋째, 넷째 외투에 대하여, 우리가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끊임없이 구입하려는 유혹에 대하여,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불공평한 재화와 부의 분배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가족들 사이의 불공평함에 대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옷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한다면,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나 비싼 디자인의 옷을 걸친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다행히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에서는 옷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옷을 나눠줄 수 있다. 그들은 우리 옷장에 있는 옷의 안배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셔츠와 바지가 딱 맞을 때가 드물지만, 옷을 입으면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그리고 비록 때로 너무 바쁘고 화가 나거나 놀라고 또는 필요한 옷들을 나눌 때에 의심이 많아지지만, 거리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신이 원하는 옷을 골라보면서 선택하는 순간은 은총으로 가득 차는 때이다. 찾고 있는 옷이 실제로 발견되는 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족 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입던 옷이 이곳에 와서 다른 사람의 몸에서 부활하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몹시도 원하던 옷이 주어지고, 주어진 것이 또 필요한 것일 때 역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도로시 데이는 <가난은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터 모린이 말했던 것처럼 자발적 가난이 대답이다. 자발적인 가난을 통하여 우리는 형제자매를 도울 방법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벗지 않고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를 볼 수조차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방해하는 우리자신을 벗어버리는 것이 바로 자선 활동의 전부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입을 수 있는 새로운 창조 안에서 사는 것이다. 

 

[출처] <CatholicWorker> 1996년 6-7월호
[번역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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