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적 노동에서 거룩한 노동으로
상태바
노예적 노동에서 거룩한 노동으로
  • 토머스 머튼
  • 승인 2020.03.02 17: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노동과 거룩함

우리는 이제껏 그리스도교적 성화가 순전히 개인적이고 고립된 덕행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사회 내의 영적이며 문화적인 쇄신을 위해 공동으로 펼치는 노력의 일환으로 모든 사람이 일할 수 있고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칙 중 하나인 <어머니와 교사>는 요한 23세께서 선포하신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가르침으로 20세기 중반에 대두된 시급한 문제들에 관한 위대한 성명이었다. 이 회칙은 전문가, 정치경제학자, 그리고 사회학자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의의 사람 모두를 위한 것이며 특별히 그리스도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을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에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삶을 그가 살고 있는 노동과 투쟁으로 점철된 실제 현실과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삶은 그가 다음과 같은 주제들, 핵전쟁, 인종 문제, 제3세계의 성장, 공산국과 비공산국간의 심각한 대립과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는지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단 본당 활동이나 가정에서 드리는 기도 생활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수백만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류 문명의 미래뿐만 아니라 인류 존속 자체에 위협을 가하는 이런 예민한 문제에도 적극 뻗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엄청난 문제에 연관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인 이상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중대한 노력에 공평하고 효과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교종 요한 23세께서는: “교회는 비록 영혼들을 성화 시키고 그들을 초자연적인 질서에 도움이 되는 협조자로 만들어야 하는 특별한 과제를 안고 있지만 인류 일상 생활의 당면 과제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것은 비단 식량이나 생활의 여타 물질적인 조건들뿐만 아니라 삶의 수많은 측면들의 발전 및 문화적인 측면까지도 포함시켜야....한다.”

교회의 관심이 무엇이건 그것은 교회의 지도층이나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전체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물론, <어머니와 교사>에서 다루어진 경제적인 사안들은 그리스도교의 평신도, 시민, 제조업자, 농부, 정치인, 사업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일상사들이 그리스도교적 방법으로 수행될 때, 다시 말해 하느님에 의해서 성립된 자연 질서에 전적으로 일치되고 교회의 가르침과 규범에 의해 정화된다면 그것은 일상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성화와 구원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교회는 노동이야말로 인간을 거룩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근본적인 인간 활동 중의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간성을 표출해야 한다”는 <어머니와 교사>의 이 구절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 우리의 에너지는 판매 가능한 상품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여긴다면 우리의 재능을 가치 있고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사용하기보다는 판매하는데 더욱 노력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능력과 재능은 우리의 주된 목적인 “돈을 버는 것”에 종속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스러운 질서에 반하는 것인데, 인간의 재능을 선하고 효과적인 일에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매우 인간적이며 만족감을 주는 활동이고, 정당한 임금을 주고 가족을 부양하는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인간의 몇몇 근본적인 영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무질서한 사회적 상황 하에서 노동은 이 근본적으로 건강한 특질을 잃어버리고 절망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노동이 단순히 생각 없는 노역이 되거나 기계나 현대의 수 없이 많은 기계적인 일상의 노예로 전락하며 임금만을 목표로 할 경우, 노동자의 정신과 체계는 본능적으로 비이성과 무질서함에 반항하게 된다. 반면, 사람들은 긴장을 완화시키는 레크리에이션을 통해 의미 있는 활동을 하려고 함으로써 그들의 지루한 일상을 극복하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영적인 영감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단조롭고 무익한 작업 과정에서 탈출해 영적인 영역으로 나아가 그 곳에서 기도와 기계적인 세상과는 명백히 아무 상관도 없는 하느님과 대화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한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꽤 자주 발생하곤 한다. 이 경우 무질서가 심각하게 악화된다. 사람은 돈을 버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전적으로 거기에 빠진다. 그는 사업의 관례와 복잡함에 너무 몰두하게 되며 계획을 세우고 거래를 성사시키는 일에 지나치게 빠져 다른 모든 것의 의미를 잃게 된다. 가정은 둘째(또는 셋째)의 일로 뒷전으로 밀리며 그 의미를 잃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최종 목적을 방해 할 경우 인간관계는 양면성을 띄게 되고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피상적이 되고 긴장에 싸이며 거짓으로 가득하게 된다. 순수한 인간적 특징들은 시들게 된다. 자신이 존재 안에 지어 놓은 모순들을 따라가고 맞추기 위해 그는 술이나 진정제-아니면 둘 다-에 의지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진정한 영성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종교는 기껏해야 허식, 외적인 형식, 또는 불분명하고 불안정한 욕망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나중”에 가서야 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다루고 있는 노동의 영역은 그런 의미에서 깊고 광대하다. <어머니와 교사>는 현대인과 그의 삶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분열과 싸우고 있다. 노동은 다시금 영적으로 의미 있고 인간적 견지에서 만족스러워야 한다. 회칙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존재의 완전함과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존재 사이에 인위적인 대립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마치 완전해지기 위해서 사람은 현실적인 활동들을 모두 제쳐놓아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행동이 어디서 취해졌든지간에 사람은 인간존재로서 또한 신자로서의 개인적 존엄성에 관해 필연적으로 어떤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일상적인 노동을 통해 자신을 계발하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으로, 인간은 모두 현실에 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교사>의 이 구절을 노동자들이 단지 자신의 일을 “영적인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봉헌한다” 내지는 “우리의 의도를 정화시킨다”는 귀에 익은 권고를 반복한 것이 아니다. 이 귀절은 회칙 전체의 내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 존엄성의 자유로운 표현인 노동의 참된 특징과 인간의 창조적인 활동이 사회 자체 내에서 그리스도교적 쇄신에 의해 복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 의해 많은 일이 이루어졌지만 노동의 측면이나 사업 또는 직업상의 측면에서, 그것들은 사실 인간적인 특질을 많이 잃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무질서는 아무리 영적이라 하더라도 내적이고, 주관적인 조정에 의해서만은 고쳐질 수 없다.

그리스도교적 삶 안에서 노동의 위치를 적절하게 복구시키는 일은 각자에게 있어 개인적이거나 내적인 작업 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교회와 인간 사회를 위해 협조해야 하는 객관적인 의무다.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인 질서에 지적인 관심을 갖고 사회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해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노동을 더욱 “성화” 시켜야 한다. 단순히 내적이고 개인적인 영적 노력으로는 그 단조롭고 무의미한 돈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다. 이 작업은 말할 나위 없이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또한 끝없는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 파장은 모든 방면으로 뻗어 나가는데, 정치, 경제, 사업 등 국가와 국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모든 방면에 뻗친다.

우리는 무질서, 혼란, 증폭된 긴장, 고통 받는 사회의 몸통에서 속속 일어나는 분열들로 사면초가가 되었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그리스도교적 쇄신이라는 시급한 과제를 어디서부터 실행해 나갈 수 있겠는가?

<어머니와 교사>는 노동의 영적 가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그 근거로 삼고 있는 신학적인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후, 정의롭고 진실로 생산적인 사회 건설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과제에는 인간적인 특질 그 이상의 성격이 부여되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소명과도 같은 성격을 띄었으며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현존 이래 시작되어 온 작업의 연장이었다. 우리는 회칙에서 다음의 글을 읽을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수행할 때 그것이 세속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거룩한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일치한다면, 모든 일은 그분 일의 연장선상에 있게 될 것이며 그것에 구원의 힘이 침투할 것이다...그리하여 그 활동은 개인의 초자연적인 완전함에 도움을 주며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고 우리가 살며 일하는 이 문명에 복음의 누룩을 부풀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우리의 일이 인간성에 대한 봉사가 되지 않는 이상 효과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한 봉사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질서, 문화와 문명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에게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인본주의라고 규정할 수 있는 어떤 입장이 함축되어 있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