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에 가려진 집은 아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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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 가려진 집은 아늑했다
  • 한상봉
  • 승인 2020.01.2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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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25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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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뒤꼍 쪽으로 낸 책방의 창문을 올해 들어 처음 열었다. 겨우내 두꺼운 천으로 바람을 막아두었던 창을 여니 숨통에 낀 때가 말갛게 씻겨 나가는 것 같다. 그렇게 좋은 아침이다. 항상 새해는 새로운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지난 3년 동안 몸이 몹시 아프고 농사에 입문하고 아기를 키웠다. 도시에서 시골로 자리를 옮기고, 세상공부에서 마음공부로 생의 흐름이 나아가는 것도 느낀다. 책상 밑 내 발치에서 놀고 있는 15개월짜리 생명 결이의 눈빛과 옹알거리는 소리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작은 행복을 따뜻하게 감당하고 있다.

한 달 전에 둘째 형이 위암 판정을 받고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암(癌)이란 육적 생명이 빛을 잃고 어둠[暗]에 잠겼다는 신호이고, 영적 생명을 불러일으켜 한껏 빛을 쪼이게 하라는 자연의 전갈이다. 형은 스물다섯 살에 부산에서 결혼했는데, 지난 스무 해를 김해비행장에서 군용비행기를 고치면서 살았다.

엄청난 양의 배기가스를 내뿜는 비행기는 ‘속도’의 상징이며, 현대 산업문명의 사랑받는 총아였다. 그리고 그만큼 빠름을 경쟁하는 자동차가 대량생산·대량유통되면서 우리나라 온 땅이 도로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생존을 위해서 장비를 갖추고 전철을 타는 출근길의 회사원들은 황금 광맥을 찾아가는 아메리카의 개척자를 닮아 있거나, 고단한 육신을 지고 가는 가냘픈 영혼들처럼 슬픈 상처를 매만지고 산다.

산다는 것은 쉼 없이 걷거나 뛰거나 날아가야 함을 뜻하는 것일까? 나무들이 베어 넘어지고, 들이마시는 공기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더라도 마음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이젠 좀 쉬고 싶다고 몸이 앙탈을 부리더라도 다독거리며, 그냥 주어진 일에 몰두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면 이미 둘째 형뿐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암세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닐까?

형은 수술을 받아야 했다. 위를 모두 잘라내고 식도를 십이지장 또는 대장에 직접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수술을 하고 나면 몸이 회복될까요?” 의사는 수술 자체가 잘 될지도 모르는데, 그 뒤를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옳은 말이다. 몸 전체가 곪아 있는데, 눈에 보이는 암세포만 잘라낸다고 몸이 온전해질 까닭이 없다. 사람들은 수술이란 목숨을 어느 정도 연장하는 효과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결국 둘째형은 수술을 포기하고 자연치유법에 의존하기로 결정했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그리고 정갈한 소금을 취하면서 가능한 자연식을 겸하고 산속에서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몸이 자생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암이란 인간이 잃어버린 자연(自然)을 되찾으면 수증기처럼 증발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어쩌면 산속의 빛을 통해서 도시의 어둠을 말려보자는 것이다. 영적 생명으로 하여금 육적 생명을 돌보게 하라는 지침으로 들린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형이 이번 기회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성찰하고 일상을 돌봄으로써 나무에 새순이 돋듯 살아나는 세포를 경험하길 바랄 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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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이냐 자연치유냐, 하는 문제로 식구들이 고민하던 차에 모악산에 살면서 소금을 굽는다는 부부를 만났다. 전주에 있는 어느 한의원을 찾아가는 길에 야채식 뷔페를 하는 식당에 들렀는데, 거기서 우연히 만난 그 부부는 정농회와 관련된 어떤 모임에 참석하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마음이 통했는지, 우리 일행은 곧장 금산사 근처에 있다는 그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대숲에 가려진 집은 아늑했다. 평상엔 이런저런 약초며 나물이 헝클어진 채 놓여 있었고 방바닥은 온돌이었는데, 장판을 깔지 않고 종이를 붙여놓았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서 데운 물로 차를 마시고 얼굴을 씻었다. 그분들은 직접 파놓은 샘에서 하루에 한 번 정도 물을 길어다 먹고 씻는다. 그렇게 귀한 물을 아껴 쓰는 것이다. 역시 대나무로 엮어 만든 뒷간에는 항아리가 묻혀 있는데, 그 항아리에 쌓인 오물을 거름으로 작게 농사를 짓는다.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는데, 생나무를 베는 법은 없고 다만 톱으로 자를 수 있는 잔나무나 낫으로 거둘 수 있는 삭정이를 얻어온다. 그들은 땔감을 쌓아두지 않는다. 그저 하루 이틀치 분량의 땔감만 해와서 쓰고, 다시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간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드는데, 뭐든지 그악스럽게 제 것을 챙겨야 살아남을 것 같은 강박 속에서 생각할 틈을 남겨놓는다.

이 집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언뜻 보니 전선은 놓여 있는데 사용한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양쪽에 촛불을 켜고 밥상을 받았다. 대나무통에 잡곡밥을 넣고 찐 밥이다. 동치미 무를 채로 썰어서 그들이 직접 구운 소금으로 간을 맞춘 반찬에 여러 가지 약초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가 나왔다. 소박하면서 따뜻한 밥상이다.

우린 촛불 아래서 차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금을 구우면 중금속 등 불순물이 달아나고 수정처럼 투명한 덩어리가 된다고 한다. 이게 공기 중에서 산소와 닿으면 하얗게 변하는데 이걸 빻아서 먹는다고 한다. 우린 이 소금 덩어리를 얻었다. 돈을 받고 팔지 않는다는 죽염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물물교환을 한다는데 저녁에 밥을 지은 쌀도 어느 귀농한 이에게서 얻은 것이라 한다. 돈이 사이에 끼여들지 않는 나눔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 고무 타이어 타는 것 같은 냄새를 맡았다. 아랫마을 할아버지가 소금을 굽고 있는 모양이라고, 소금을 구울 때 항상 이런 냄새가 진동한다고 했다. 우리 몸도 소금처럼 구워내면 저런 고약한 냄새가 날 것이다. 내 몸 안에 있는 불순물은 내 영혼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산중에서 소금을 굽는 이들의 마음이 무딘 가슴을 일깨운다. 남는 것은 부끄러움뿐이다.

그래도 나는 이들처럼 전기 없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지는 못할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아내는 흐르는 수돗물에 채소 씻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직 식수가 부족한 가뭄은 아니었지만 그릇에 물을 담아 채소를 씻고, 그 물을 텃밭에 뿌린다. 사방에 널려 있는 물이라도 필요한 만큼 써야 하고, 땅속의 미물을 생각해 뜨거운 물은 식혀서 버리는 게 생명에 대한 존중심을 그나마 지키는 길임을 생각한다. 박남준 시인의 산문집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는 괭이와 삽을 들고 밭으로 나갔다. 쑥대로 무성해진 밭에서 삽질을 했다. 아니, 이게 뭐야. 한 삽을 떠서 흙을 뒤엎는데 거기 흙 속에서 나오는 구물구물거리는 것들, 지렁이였다. 한 마리도 아니고 대여섯 마리나 되는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게 아닌가. 나는 지렁이가 죽지 않도록 얼른 흙을 덮어 주었다. 아그그 아그그, 어찌해야 하지. 하는 수 없군. 나는 삽을 가져다 놓고 호미를 꺼내 왔다. …

물론 나는 제초제나 농약 그리고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삽으로 갈아 흙을 뒤엎는다거나 경운기를 쓴다면 흙 속에 있는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죽어버리겠는가. 이 흙을 이만큼 거름진 흙으로 살아 있게 만든 지렁이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무수한 지렁이와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곱디고운 색깔의 벌레들. 흙은 그야말로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고랑의 밭을 일구는 데 한나절이 갔다. 두 고랑의 밭을 일구는 데 이틀이 지나갔다. 그 손끝에 만져지는 흙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흙 한줌을 손에 쥐고 코끝에 가져간다. 싱그러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먼 어린 날이 떠오른다."

오늘은 댓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 위에 머무는 햇살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감자밭으로 점찍어 둔 흙덩이가 내 발을 부끄럽게 만든다. 생명을 살뜰히 보살피지 못하는 어설픈 농사꾼을 부끄럽게 만든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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