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투신하는 제자들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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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투신하는 제자들의 영성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2.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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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됨의 여정-7 /영성-1

그리스도의 제자가 우리의 신원, 정체성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 모든 행적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원형이며 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존재와 사명의 근거를 하느님의 뜻에 두셨다. 그리스도의 영성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되새기고 의식하며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고 인간구원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로서 우리의 영성도 이같은 그리스도의 영성을 삶 속에서 펼쳐가는 것이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 분의 뜻을 알아보며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은 비단 그들의 인간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동시에 체험하는 삶이어야 한다. 즉 사회활동, 인간화 활동과 하느님 체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영성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나 하느님에 대한 체험에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할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영성의 의미

영성은 개인이 자신의 목표와 최종적인 영감, 결정에 따라 삶 전체 속에서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하는 자세이다. 혹은 허위로부터 진실로 나아가는 인격적 성장의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 하느님의 숨을 받아 살아가며 하느님의 영(성령)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만남, 그분과의 일치에 대한 추구는 인간이 지닌 본성적인 성향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영성은 인간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것을 성찰하며 표현하는 것, 성령에 인도되어 복음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자세와 방식, 성령의 이끄심과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 행위, 관계, 하느님께로 향하는 내적 자세로서 의식적으로 훈련되어 구체화되는 것,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

 

BY 에곤 쉴레
by 에곤 쉴레

영성의 형성

<형성의 자리>

인간의 하느님 체험은 개인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개인차원과 공동체 차원의 참여와 투신을 전개할 때에 우리는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세상 속에, 역사 속에 살아계시고 인간들에게 투신하시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고 생명을 내어주시며 그들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형성의 단계>

1. 상황파악: 불의, 억압, 부정, 가난, 고통으로 가득찬 현실인식

2. 상황에의 투신 결정: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 연대, 충실함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충실함으로 투신.

3. 상황에의 투신: 절망, 회의, 좌절, 기쁨 등의 과정에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으로 인격적인 관계 성립

4. 투신에 대한 성찰과 표현: 개인 및 공동나눔, 기도로써 새로운 하느님의 이미지 정리,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계획 수립

영성의 내용

<예수의 영성>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은 해방과 변혁, 부활과 생명, 인간해방과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영성이다. 이러한 지향점들은 삶의 현장에서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현장에 투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구체화되어 간다.

이 해방과 변혁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을 하게 되며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역사,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징표를 보게 된다. 또한 부활과 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 모습은 불의와 고통, 상처와 소외, 비참함과 죽음을 겪고 이루어낸 생명이며 부활이다. 또한 그것은 거대한 악의 세력에 희생당한 무력한 사람들,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낙오된 사람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끌어 안으며 그들과 함께 생명, 부활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과 암흑, 절망을 응징하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사랑으로 녹이며 도달하는 부활이다. 그것은 희망의 메시지이며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삶 속에서 구체화 되는 영성>

-사회운동, 인간개발 및 사회개발활동은 모든 피조물이 살고 성장하며 하느님과 일치되어야 하는 하느님 정의를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역사와 환경 속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의 인간적 존엄성이 유지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움직임이다. 모든 형태의 속박과 탐욕, 개인과 사회의 구조악이 변혁되기를 추구한다.

보다 인간적인 사회질서, 대안의 세계질서를 위한 운동과 투쟁은 분명히 영적인 투쟁으로서 오늘날 전 지구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영적인 갈망을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 약속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돌아서는 것이며 인간이 중심되고 우선시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예언직, 왕직, 사제직으로부터 사회사목 종사자들이 구체화하는 사회적 활동은 사제직 차원에서 인간들 사이의 적대감 인식, 대립에 대한 치유와 화해, 현실변화의 방법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일치된 인간 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종사자들은 모든 상황에 열려있기, 가난한 이들과의 동화,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고통을 받아들이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또한 예언직 차원에서 구체화되는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 인간존재에 대한 참다운 진리선포하기이며, 이를 위해 비판적 반성과 분별력, 신앙의 관점에서 민중들의 상황제시, 사회의 우상폭로, 자신의 행동 방식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와 활동이 필요하다.

마지막 왕직 차원에서는 성령의 감도하심에 따라 하느님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맞게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요구에의 응답, 활동의 근본적인 지향과 목적 성찰,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의 요구에 우선적인 응답,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융통성있는 도움의 방법과 장소를 택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한계를 부정하지 않고 상처를 감추지 않는 영성은 프란치스코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영성으로 작은 것 선택하기, 권력포기하기, 힘대신 무력함, 냉혹한 올바름 추구보다 연약함, 현실 타협보다 진실, 영향력보다 정직함을 선택하는 영성이다.

-부서지고 약해지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영성은 무엇을 하기보다 무엇이 되는 것을 중요시하는 영성이다. 이러한 영성은 라르슈 공동체 등 약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영성이다.

-우리의 연약함에 근거하는 지도력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앙에서 나온다. 고통과 약함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신원과 권위를 세워주며,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역할이 아니라 본질 자체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지도력은 하느님의 인정에서 나오며 섬김의 지도자는 고통받는 종이 되는 길을 택한다.

- 지쳤을 때 우리는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기대에서 물러나 그분께만 신뢰를 두는 것을 배우게 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십자가들과의 연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불확실함, 불안은 진실로 가는 초대이며 확실함에 대한 요구는 영적인 눈멀음이다.

- 우리의 한계는 진실한 의미의 의존, 하느님께의 의존을 깨닫게 하는 조건이다.

-참된 봉사직은 예언자적 기질과 내용으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공동체의 영역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 역동적인 하느님의 사랑은 도덕적 정치적 체제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신앙으로 사변적 논쟁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적 측면을 인식하는 것, 실제적 행동과 더불어 역동성(육화)과 신학적 성찰을 갖추어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이 되는 것, 겸손, 부활신비 표현, 인습과 편견을 넘어서는 사랑을 스스로 배우는 것, 행동의 중심에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성령께 맡기며 주님으로부터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향한다.

-약한 이들은 우리를 치유한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이웃 사랑의 능력을 발견하게 해주며, 우리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을 벗어나게 한다. 절대적인 관계, 투신과 항구함을 지닌 관계를 바란다. 우리가 변화하기를,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 부드러움과 관대함의 관계, 마음대 마음의 관계로 초대하고 진정한 배려의 관계를 원한다. 사랑하는 법, 부드러움과 주의 깊음, 무력해지는 법, 방어장치 치우는 법, 마음의 능력을 발전시키도록 해준다.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가난해지게, 사회의 가치관들, 성공, 소유, 안전,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들의 마음 속 어디에 어떻게 예수가 숨어 계시는지 발견하게 해준다. 우리 사랑의 관상적인 측면을 발견하게 해준다.

-우리 자신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할 때, 치유와 해방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참다운 사람이 된다. 부서짐 자체는 나 자신과 인류 공동체의 해방, 새로남에 필수적이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기도

기도는 행위를 위한 준비단계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이며 모든 행위들의 기초가 된다. 신앙적 차원에서 보면 기도는 삶과 죽음의 벽을 허물어 두려움이 극복되게 하는 응답이며, 모든 것 생명까지도 내어던지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하게 하는 행위이다. 기도는 세상 속에서의 우리 존재 방식에 비판을 가하고 낡은 자신을 버리며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라는 급진적인 행동이며 가짜 안전 장치를 버리고 하느님 자녀로서 우리의 신원을 다시 선포하는 행위이다.

진정한 기도는 복음에 그려진 모습대로 예수님을 아는 행위, 가난한 이들과 우리와의 관계, 그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반성하는 행위, 가난한 이들의 세계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반성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도는 삶과 체험, 투신으로부터 그 필요성이 인식되어야 가능하며, 또한 현실에의 깊은 개입과 전적인 투신은 하느님 앞에서의 성찰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도 속에서 느낀 예수님의 현존이 행동으로 표현되고 동반되어야 우리의 행동이 공허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사회활동의 핵심이 된다.

기도하기

기도하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 두렵고, 우리 내면의 상처나 한계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고수하려는 욕망 때문에 그렇다. 기도에 초대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것을 포기하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자신이 그분과 똑같은 정도로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온갖 두려움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둘 때 기도하려는 열린 자세가 가능하며 이 열림은 계속되어 신뢰라는 긴 영적여행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기도가 축제의 시간이 되고 점차 기도한다는 것이 산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침묵 중에 내 안의 모든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기도 속에서 내가 나 자신임을 깨닫는다. 받아들임으로 항상 새롭고 다른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게 되며 이 열림으로 성령을 받는다. 또한 이 받아들임은 어떤 것을 바라는 것이며, 이 희망이 있으면 낙담없이 삶을 그대로 바라보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웃과 함께 하는 기도, 이웃에 대한 연민이 있는 기도가 참다운 기도이다. 연민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생긴다. 하느님에로의 회심은 자연스럽게 이웃에 대한 회심으로 연결된다. 이웃에 대한 회심으로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전 인류공동체에 회심, 즉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변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비전에 순종하며, 단순히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투신하는 삶을 산다. 변혁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꾸로 되기’를 일으키는 힘이 우리와 영원히 일치하고 있는 하느님 안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으로 세상을 거꾸로 돌려 놓았다. 기도는 변혁을 요구한다. 또한 이 변혁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는 우리가 지닌 확신, 사고를 끊임없이 넘어서는 가난을 요구한다.

한편, 위와 같이 기도를 제대로 하기 위한 개인적이며 자발적인 노력 이외에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여러 가지 시도와 노력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전 세계적인 그리스도교 전통과 오늘이라는 상황 속에서 기도에 관해 올바로 이해하고, 기도에 관한 다양한 체험들을 나누며, 기도의 다양한 전통, 형식, 방법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관 상

관상은 한 존재의 중심에서 하느님이 사랑받고 이해받는 상태, 하느님과의 만남을 뜻한다. 이 사랑의 주고 받음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계가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보며, 나의 삶, 이웃, 세계의 삶이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하느님의 빛으로 보는 것인데 이 보고 깨우치는 것을 관상이라고 한다.

예언적, 행동적 영성에서 관상은 변혁적 행동 한 가운데에 있다. 이 변혁적인 행동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하느님이 우리에게 더 살아 있는 하느님이 되는 관상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예언적 행동과 관상적 체험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즉 “예언적 관상”이 예언적 행동과 관상적 체험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

관상을 통하여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며, 우리 심연의 가난과 무력함도 있는 그대로 직관에 의해 깨우치게 된다. 관상기도는 말, 개념, 생각, 상징을 넘어서는 것이며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성령의 기도라고 하겠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전례

전례는 공동체 차원의 예배를 의미한다. 공동체 예배는 세상에 대한 체험, 주님에 대한 체험을 한데 모여 나누고 하느님의 말씀과 빛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그 체험들을 빠스카 신비의 빛으로 새롭게 인식하기 위하여 거행하는 것이다. 공동체 예배의 요소는 세상에 대한 체험, 성령에 대한 체험, 전통 속의 그리스도 사건, 그리고 공동체이다.

예식

예식은 일상 생활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특히 전환기와 연결되어 변화를 겪어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예식은 삶의 사건들과 우리 자신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찬례

예수의 성찬례는 인류의 해방을 위한 최고의 기도이다. 여기에 인간 해방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성찬례의 근본 의미가 있다.

성찬례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느님이 취하셨던 획기적이고 단호한 역사개입과 이스라엘 민족의 투쟁행위를 연결시키고 기억하는 것이며, 인류구원과 인간해방을 충실히 수행하는 하느님의 계약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과 사회정의 실천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성찬례는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느님과 동료 이웃에 대한 의무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성찬례와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교회가 공동체 건설, 정의와 인권옹호, 일치의 회복, 참회와 회개, 공동선 증진, 세계 질서의 회복, 타종교와의 대화에 이바지하기를 기대한다. 또한 한계가 없는 희생적 삶을 상징하는 사랑의 잔치가 되고 현세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강한 삶을 구현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성찬례가 총체적, 인격적, 내적, 행동적, 변혁적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성찬례는 교회의 사적인 사건이 아니며,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하는 이유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불의한 구조와 타협하여 성찬례를 거행한다면 힘과 생명, 참일치는 기대할 수 없다.

성찬례의 의미를 사는 길은 진정한 생명과 희망, 참사랑을 발견하는 길 뿐이다. 이 길은 무상의 길이고 전적인 투신을 요구하는 길이다. 우리의 삶, 가치관, 행동 모두가 성찬례적인 의식에 기초하는 길이다. 이 길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성령의 불로 정화된다.

지상의 빵없이 하늘의 빵은 있을 수가 없다. 지상의 빵이 독점되고 지배의 도구가 될 때 성찬례의 빵은 불의한 것이 된다. 또한 하늘의 빵을 청한다는 것은 육체를 위한 물질적 빵을 동시에 청하는 것이다.

성찬례의 필수적인 것은 공동체 차원이다. 성찬례는 고립된 개인의 실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예수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예수의 단 하나의 식탁에 모여야 한다. 또한 공동체 차원에서 어떻게 정의활동에 참여해야 하는가를 올바로 알기 위해 우리에게는 성찬례가 필요하다.

성찬례가 표현하고 기념하는 희망은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하면서도, 인간존재와 인간역사의 최종 목표가 파멸이 아니라는 하느님으로부터의 낙관성을 잃지 않는 희망이다.

마지막으로, 성찬례는 인간과 세상 모두의 변혁이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이요 축복이라고 여기며 이를 감사하며 기억한다. 감사로서의 성찬례는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성찬례의 핵심적인 측면이다.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영성

지금까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의 동화, 연대를 통하여 형성되는 영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 영성은 추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그것도 해방과 변혁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억압과 불의, 착취와 고통의 위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이다. 암흑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인간화와 하느님 나라를 더욱 절실히 추구하는 영성이다. 또한 가난한 이들이 겪는 위기상황은 현실의 모든 측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총체적 해방을 목표로 한다.

가난한 이들 편에 서는 하느님의 구원방식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방식이므로 그분의 제자들 역시 가난, 무력함, 소외됨을 통하여 부활과 생명, 새로남을 얻고자 한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의 영성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성 역시 모순과 역설의 과정을 거쳐 구원을 이루는 영성이므로 우리에게는 이런 주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의 신앙이 요구된다.

인간화와 하느님 나라를 향해가는 이 무력하고 불확실한 여정, 모순과 역설이 가득한 여정은 인간존재에 대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사랑, 인간과의 계약에 대한 그분의 충실성을 기도, 관상, 예식, 전례를 통하여 자주 기억하고 되새기며 의식하는 작업 없이 계속될 수 없다.

사회사목, 사회활동과 영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서로를 강화, 심화시킴으로써 하느님과 가난한 이웃, 우리 자신들간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변화시킨다. 특히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무조건의 사랑과 계약에 대한 충실성을 표현하고 있는 성찬례는 그분의 제자라는 우리들의 신원과 그분의 구원사업인 우리들의 사명, 목표, 여정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우리 삶에 중심으로 자리잡고 삶을 지탱시켜주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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