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나도 농민들처럼 노동하고 싶다"
상태바
톨스토이 "나도 농민들처럼 노동하고 싶다"
  • 로버트 엘스버그
  • 승인 2019.12.13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로버트 엘스버그의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노동하는 것을 배우기(1)

"노동에서 오는 기쁨 없이 살아가는 것은 즐거움이 없는 삶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사막의 동굴에서 고용주나 십장이 없이도 초기수도자들은 매일 많은 시간을 손노동으로 보냈다. 밭을 가꾸고, 바구니를 엮거나 만드는 일이었다. 이처럼 그들은 바오로 사도의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Ⅱ데살로니카 3,10)는 엄한 훈령대로, 필요한 물질적 요구들을 스스로 채웠다. 노동이 전혀 영적인 삶의 목적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축복으로, 일에 의해 치유되는 것으로, 지루함과 슬픔을 몰아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막의 교부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노동자체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효율성이나 보상의 차원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된다. 폴 원장은 동료 은수자들 처럼 많은 시간을 종려나무 잎파리로 바구니를 짜는데 보냈다. 바구니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을 때, 그는 불을 질러 바구니를 다 태우고 나서 다시 시작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바보 같은 모습이라고 간주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초기 수도승들의 연대기를 보면 다른 의미가 있었다. 폴원장은 그런 행위를 통하여 “손으로 일하지 않고서 수도승은 그의 자리에 머물러 사는 것을 견딜 수 없으며, 거룩함의 정점에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노동은 창조적 선물

영원의 빛으로 볼 때에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은 이와 비슷하게 바보짓으로 보인다. 우리는 내일이면 다시 더러워질 마루를 닦는다. 또한 어떤 사람의 마루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책을 쓰고 발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인간조건에 있어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노동(일)은 단지 매일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방법뿐만이 아니다. 또한 노동은 우리가 청구서를 갚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노동은 어떤 의미에서 이 우주에 인간의 독특한 자리를 표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노동을 통하여 계속되는 창조사업에 참여한다. 또한 노동으로 물질과 맞서고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우리의 모습도 형성시켜 간다.

혼자서 하든, 대중의 갈채 속에 하든 노동은 온 마음을 다해 수행 할 때 오로지 자유롭게 주어질 수 있는 선물이 된다. 노동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개입되지만, 언제나 우리의 영혼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행복에 대한 모든 믿을만한 처방은 노동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매우 자주 행복에 관한 대중 “광고들”은 노동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시간을 정확하게 족쇄같이 채우면서 행복을 휴가나 “여가시간” 때에만 가능한 것으로 예치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노동은 단순히 성가신 필수품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은 생계를 버는 수단이며 행복은 그 필수품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휴가를 즐길 때에만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개입된 과제, 일, 노동에는 더 깊은 행복이 있으며 우리의 존재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성인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올바른 정신에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의미나 행복은 실제로 모든 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노동과 거룩함

레오 톨스토이는 말년에 이 주제를 “도덕에 관한 이야기”들 중의 하나인 <한가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에서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톨스토이는 특히 사회적 기대가 주는 부담과 영적인 갈망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에 대하여 자세히 말한다. 중년기에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리나> 등의 작품으로 유명해진 그는 이제 거의 자살을 생각할 만큼 절망 속에 있었다. 특권과 안락의 삶을 누린 후 그는 이제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고 느낀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성찰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행복의 추구가 거룩함에 대한 초대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룩함이란 삶을 하느님의 규율과 일치시키는 것이고 톨스토이가 이해하는 한, 산상수훈은 이 거룩함에 대한 요약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거룩함은 톨스토이가 보건대, 교회 혹은 수도원보다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서 더 발견된다.

그는 자신이 속한 특권계층과 그의 땅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비교해 보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아무리 고달파도 이 평범한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일하고 삶의 선함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면서 밤에 잠든다. 물론 농민의 삶에 대한 이런 인식에는 감상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농민들과 그들의 단순함, 신앙, 그리고 노동의 삶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면서 톨스토이는 그에게서 빠져나간 행복을 찾고자 했다.

 

<한가한 사람들에게...>에서 톨스토이는 한 이상적인 젊은 청년의 입을 빌어 자신의 이상을 표현한다. “나는 나의 전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에 가서 가난한 이들 사이에 살 것입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고, 손으로 노동하는 것을 배우며, 내가 받은 교육이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눌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기관을 세우거나 책을 써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형제로 살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땅에서 단순한 삶을 시작했다. 농민들과 함께 들에 나가 일도 했다. 그는 “게으름이 아니라, 노동이 모든 인간 존재의 행복을 찾기에 있어 분리될 수 없는 조건”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가르쳤던 이상을 결코 완전히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가족과 끊임없이 부딪쳤다. 또한 그 자신도 괜찮을 때에는 들에 나가 일했지만, 집에 돌아와선 비단 잠옷을 입고 잤다. 행복에 대한 그의 추구는 모호한 측면이 많았고, 82세에 죽을 때까지 갈라진 양심으로 괴로워했다.

올바르게 사는 것...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의 기반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무엇이 올바른 삶을 구성하는가? 톨스토이의 생각에 의하면, 올바른 삶이란 단순히 외적인 도덕규약에 복종하는 것 그 이상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과 거룩함에 대한 추구가 한 곳에 모이는 조건, 궤도 위에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조건은 보편적인 도덕률이 우리 영혼에 실제로 새겨질 때에 가능하다.

그러한 삶은 이 세계의 상식적인 지혜를 거부하는 삶이다. 톨스토이에 따르면, 그것은 매일의 삶에서 어떤 비전을 갖고 사는 것이다. 이기심과 경쟁보다 사랑과 연대를 나누며 사는 삶이다. 톨스토이 자신이 그가 그렸던 조화를 결코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가? 노동, 행복, 거룩함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성인들의 삶에서 더 넓은 지지를 받았다.

 

로버트 엘스버그 /1955년 미국 잭슨빌에서 태어났다. 존재의 의미와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을 찾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다니다 2학년을 마치고 1975년 도로시 데이와 함께 5년 동안 일했다. <가톨릭일꾼>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198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모교로 돌아가 종교와 문학을 공부한 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변화된 가톨릭교회 모습을 체험했다. 도로시 데이의 작품집을 냈으며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1학년을 가르쳤다. 1987년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메리놀 수도회 Orbis 출판사 편집장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 <모든 성인들>과 <모든 여인 가운데 복되도다> 등이 있다. 도로시 데이 시성식 추진위원회와 헨리 나웬 재단 위원이며, 현재 세 자녀와 함께 뉴욕 주 오시닝에 살고 있다.

이 글은 2003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가 발간한 <The Saints' Guide to Happiness>(Robert Ellsberg)를 <참사람되어> 2005년 3월호에서 편역한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