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정말 구세주는 희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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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정말 구세주는 희망일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12.1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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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구세주가 탄생하신다고 한다. 그러면 정말 이 암울한 현실의 장막이 걷히고, 생때같은 목숨이 더 이상 죽어나가지 않아도 좋을 세상은 오는 것일까? 얼마 전 어느 신문에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죽은 노동자 1천2백명의 명단이 실렸다. 이를 두고 작가 김훈은 이렇게 적었다. “퍽, 퍽, 퍽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는 추락, 매몰, 압착, 붕괴, 충돌로 노동자의 몸이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다. 노동자들의 간과 뇌가 쏟아져서 땅 위로 흩어지고 가족들이 통곡하고, 다음날 또다시 퍽 퍽 퍽 소리 나는 그 자리로 밥벌이하러 나간다.”

작년 이맘 때 화력발전소 석탄 컨베이어 벨트에 짓이겨진 김용균을 보았을 때, 나는 성탄절이 와도 찬송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에게 성탄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우겼다. 김훈은 “제도화된 약육강식이 아니라면, 이처럼 단순하고 원시적이며 동일한 유형의 사고에 의한 떼죽음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고 방치되고 외면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1천2백 위의 원혼들은 제도적 폭력이 합법적으로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이승을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네들은 사고가 난 작업장 근처 어느 허름한 여인숙에 묵으며 밤마다 거리에서 통곡하고 있다고 했다.

구세주가 탄생하셨을 때, 마태오와 루카복음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찾아와 그분께 경배 드렸다고 전한다. 루카복음에선 ‘밤새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다. 어두운 세상을, 이 세상보다 더 캄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선물도 준비하지 못해 그저 마음으로만 고요히 아기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을 것이다. 그 아기는 이렇게 칠흑 같은 주변부 인생들을 위해 오셨다.

마태오복음에선 동방박사들이 두 손 가득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왜, 여기선 ‘박사들’이 예수께 조배하였을까?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는 헤로데 대왕의 적수였다. 헤로데는 당대의 권력과 제도화된 폭력의 상징이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대항해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킨 것처럼, 예수는 죽음이 그늘진 골짜기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기뻐할만한 소식을 안고 오셨다. 그분은 새로운 평화의 군주이기에 박사들의 조배를 받을 만 했다. 그들은 권력은 없지만 지혜를 예수께 선물하려고 왔다.

예수는 국가폭력/헤로데를 피해 곧 에집트로 달아나 난민으로 살아야 했다. 자기 땅에서 유배된 예수와 가족들은 이주노동자로, 이주여성으로, 이주아동으로 살아남았다. 가장 바닥에서 은총이 열매를 맺는다. 노예들의 하느님이 예수를 사지에서 일으켜 세우셨다는 이야기가 복음이다. 그러니, 우리 죽지 말고 살아남자. 충분히 기다려, 민중의 땅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자. 지금은 성탄절이 아니라 대림절이다.
 

*이 글은 수원교구 주보 2019년 12월 8일자에 실렸던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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