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종교심성과 토머스 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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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종교심성과 토머스 머튼
  • 웨인 심직
  • 승인 2016.06.18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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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과 함께 기도하며-4

머튼의 은둔시기

1965년 8월 돔 제임스 수도원장은 토머스 머튼에게 수도원에서 1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작은 언덕 위의 콘크리트 블록 오두막에서 은둔하며 살도록 허가했다. 그 오두막은 원래 다종교 단체들의 모임을 위해 지어졌었다. 머튼은 대부분의 수도자들에게 수도회의 전통적인 침묵이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소수의 수도자에게는 홀로 사는 삶이 필요하며, 자신에게 그러한 삶은 “수도적 소명의 절정”이라고 생각했다(<수도적 삶의 여정>에서).

은둔소에서 노르위치의 줄리안과 같은 신비주의자들에 대해 몰두하여 연구하면서 머튼은 자신이 영적 여정에서 중대한 시점에 있다고 깨달았다. 50번째 생일 직후 머튼은 그의 생활, 특히 고독에 대한 부르심을 평가했다. “여러번 다시, 나는 이 생활이 그럴 거라며 항상 찾았고 희망했던 생활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평화, 침묵, 목적과 의미가 있는 생활이다”(<대화의 서약>에서). 머튼은 고독이 마스크를 벗기고 어떠한 거짓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깨달았다.

평상시 머튼은 기도했고, 묵상했고, 청소하고, 나무를 베고, 글을 썼다. 그는 수도원에서 미사를 했으나 은둔처에서 식사를 하였다(결국 경당이 은둔처에 마련되었다). 머튼은 피부염으로 고생했고 활액낭염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알레르기로 고생하였다. 상수원으로 사용했던 시냇물이 오염된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은둔처로 물을 날라야 했다. 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머튼은 날이 밝기 전에 숲속에서 산책을 하는 시간과 방해받지 않는 기도 시간들을 소중히 여겼다.

여러 가지 고통과 유머감각을 지닌 이 은둔자는 다방면의 사람들과 계속 호의와 우정의 관계를 키워 나갔다. 학자들, 운동가들, 작가들, 신학자들은 은둔처로 머튼을 방문하였다.

머튼은 수도적 삶의 쇄신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하였다. 예를 들어 <행동의 세상 안에서의 관상>과 <수도적 삶의 여정>의 글들은 대부분 “수도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20세기에 수도자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라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머튼은 하느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구성된 삶보다 제도적 통제를 강조한 기존의 수도회의 순명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또한 결론지었다: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다. 반대로 수도원에 있으면서 나는 세상의 모든 몸부림과 고통들에 진정으로 참여한다.”(존경할만한 독자에게, <칠층산>의 일본판 서문에서).

동방으로의 여행

머튼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다른 종교들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종교적 체험을 나누는 것은 세상의 일치와 평화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튼은 하느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속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꼈고, 유대인들, 불교인들, 마호멧 교인들과도 규칙적으로 서신을 교환하고 있었다.

동양의 종교, 특히 선불교는 머튼의 흥미를 돋구었다. <선과 욕구의 중생들>, <신비가들과 선의 대가들>은 선에 대한 그의 글들을 많이 담고 있다. 선의 수도승, 다이세츠 스즈끼의 1964년 방문은 중국의 현인 장자에 대한 그의 관심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머튼은 노장파의 시들을 번역하는데 특별한 기쁨을 가졌는데, 그것들이 자신의 영적 관심을 너무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머튼은 상호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 애썼으나 이러한 교류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극동에서 열리는 동·서양의 대화 및 수도적 삶의 경험에 관한 회의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았을 때 그는 새 수도원장 돔 플래비안 번즈에게 허락을 청했고 받았다. 아시아 수도자들과의 깊은 연대감으로 그는 자신을 새로운 계시에 눈을 뜨는 겸손한 순례자로 생각했다. 상상과 마음속에 있던 동양의 문을 두드림으로써 그는 이제 그 신비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머튼의 마음속에는 이 여행의 모든 양상이 마음의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토머스 머튼과 달라이 라마

마지막 순례여행

머튼은 <아시아 여정>에서 그의 동방 순례에 대해 말했다. 그는 뉴델리, 캘커타, 다지링 등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그리고 많은 현인들을 만났다. 이들 가운데에는 달라이 라마도 있었는데, 그는 머튼의 겸손과 영성에 감명을 받았고, 챠트랄 림포체는 머튼을 “자연의 부처”라고 불렀다. 머튼은 스리랑카를 여행했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그는 유명한 인사가 아닌 구도자로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다른 수도적 전통에서 정보와 사실들만을 얻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오래된 수도적 비전과 경험을 받아 마시려고 왔습니다.” 택시 운전자들, 수도자들, 수녀들을 막론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지성, 멋, 영성에 즉시 응답했다.

스리랑카에서 바위로 깎은 거대한 부처상을 방문하는 동안 머튼은 또 다른 중요한 경험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제까지 심미적 조도에서 보이는 아름다움과 영적인 효과를 갖춘 그러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아시아 여정>에서). 이 심미적 신비적인 교화의 순간은 머튼의 관점을 뚜렷하게 했고 그에게 표면을 넘어 볼 수 있도록 하고 진실을 둘러싼 착각을 뛰어넘게 했다.

1968년 12월 10일, 머튼은 방콕 회의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다. 그 연설 제목은 ‘마르크스주의와 수도적 관점’이었는데, 그를 몇 주일 동안이나 몰두하게 하였다. 그 연설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수도주의는 모두 세상의 변화를 촉구한다고 제안했다. 즉, 마르크스는 경제구조의 혁명을 주장하며 수도주의는 의식의 변화를 주장한다고 설명했다. 머튼의 주제는 내적인 변화가 수도자의 서원의 핵심에 있다는 것이었다.

오후 4시경, 머튼의 발표 후 있었던 휴식 시간 중에 한 사제가 머튼을 데리러 갔다. 그는 고장 난 선풍기에 의해 감전되어 죽어 있는 머튼을 발견했다.

죽었을 때, 머튼이 지니고 있었던 상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우리가 참다운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그분과 가장 축복 받은 우정을 가진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영을 보이면서 있어야 한다.” 머튼의 유해는 그가 저항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죽은 미국인들과 동행하여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평신도들과 수도자들의 참석 속에 게세마니에서 장례미사를 치른 후 그의 형제 수도자들은 머튼을 수도원 교회 옆에 있는 작은 묘지에 묻었다. 장례 예절의 마지막에 <칠층산>의 결론부분에서 따 온 다음의 문구가 읽혀졌다:

“너는 나의 고통과 가난의 진정한 고독을 맛볼 것이고 나는 너를 내 기쁨의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너는 내 안에서 죽을 것이고 모든 것을 나의 자비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이 목적을 위하여 너를 창조하였고 너를 프라데스로부터 산 안토닌으로, 오크햄으로, 런던으로, 캠브리지로, 로마로, 뉴욕으로, 콜롬비아로, 성체성당으로, 성 보나벤투라 성당으로, 게세마니에서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시토 수도원까지 오게 하였다. 네가 하느님의 형제가 되고 화상을 입은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은 1994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세인트 매리 출판사에서 발간된 웨인 심직의 <Praying with Thomas Merton>을 <참사람되어>(2001.1)에서 편역한 것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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