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믿음이고, 믿음은 경영을 무시할 수 있다
상태바
신앙은 믿음이고, 믿음은 경영을 무시할 수 있다
  • 최태선
  • 승인 2024.07.01 12: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연립주택 4층이다. 그런데 요즘 물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생수를 구입해서 먹고 있는데 배달이 쉽지 않다. 하루는 물을 나르는 사람이 쌍욕을 하면서 올라오는 것을 들었다. 이해가 가면서도 막상 욕을 하는 것을 들으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일로 고민 중에 있다.

앱에서 물을 살 때 대부분의 경우 한 번에 많이 구입해야 싸다. 그래서 한 번에 여섯 개 묶음 여섯 개 정도를 구입한다. 그것을 들고 올라오려면 그야말로 중노동이다. 들고 올라올 분을 생각해서 음료수 한 병이라도 드리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그분들의 힘듦을 해소해드릴 수는 없다.

고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물었다. 사실 질문을 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물 나르는 사람들이 힘들기 때문에 애초에 그들의 임금이 높다며 고민하지 말라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한 번은 아내가 물을 나르고 있는 배달원과 마주친 적이 있다. 아내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음료수 한 병을 주자, 그 사람은 아내에게 “이렇게 한 번에 많이 시키면 우리 죽어요.”라고 말하면서 한 번에 두 묶음만을 시켜달라는 부탁을 했다. 우리 집이 4충이지만 실제로는 5층이라면서 힘듦을 토로했다.

나는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나는 매일 물병 여섯 개를 들고 1층 화단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것인데도 힘이 든다. 그러니 올라오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배달하는 사람의 죽는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나야 운동 삼아 그 일을 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은 그 일이 고역일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에 시킨 물을 다 먹기 전에 정수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사실 싱크대가 좁아서 정수기를 놓을 자리가 없다. 정수기를 놓으면 우리가 많이 불편해진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에게 힘든 일을 남에게 시킬 수는 없다. 1층에 내려놓고 연락을 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 역시 세 번을 24킬로의 물을 들고 계단을 올라올 자신은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새삼 떠오른 주님의 말씀이다. 생각할수록 이 말씀은 심오하다. 이것은 단순히 남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말라는 가말리엘의 “은률”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 잘도 이름을 붙였으면서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황금률을 돌처럼 여긴다. 그러나 황금률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견인하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귀한 그리스도의 권면이다.

우리 집의 물 문제를 통해 오늘날 사람들의 사고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황금률과 같은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인지 절감하게 된다.

사실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내 자식이 물 배달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고민도 필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문제를 놓고 고민했고, 배달원의 쌍욕과 하소연을 들은 후에야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확인한 셈이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것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그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적은가.

며칠 전에도 감자 농사를 지어 판 한 목사님의 글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신앙은 믿음이지만 사업은 경영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지난 봄에 홍천에 사는 지인의 밭에 감자를 심었다. 그리고 어제 다시 그곳에 가서 감자를 캤다. 한낮의 열기에 어지럼증이 일었지만 아내와 딸과 손자가 힘을 합해 그것을 다 캤다. 사실 캐놓고 보니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양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심었고, 하느님이 자라게 하신 소중한 소출이었다.

우리는 상품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 콩알만한 감자도 소중했다. 호미에 찍혀 상처가 난 감자는 더 소중했다(상하기 전에 먼저 먹어야 하기에). 그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담아 4박스를 싣고 왔다. 그 대가로 우리는 십만 원을 놓고 왔다. 오는 도중에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놓고 갔느냐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한 일은 신앙이었다. 감자 네 박스는 우리가 한 노동의 대가로도 모자랐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들인 수고는 물론 지인의 수고를 안다. 십만 원이라는 돈도 그에 대한 대가로는 충분치 않다. 나는 그런 마음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믿음이고, 믿음은 경영을 무시할 수 있다. 너무 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우리가 어제 한 일이 하느님 나라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철저히 경제의 원칙을 무시한다. 감자 농사를 지은 목사님이 말하는 경영이 바로 내가 말하고 있는 경제의 원칙이다. 이미 그 목사님도 경제의 원칙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꺼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한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기부나 구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정심도 아니고, 유기농재배에 대한 대가도 아니다. 그것은 신앙에서 비롯된 하느님의 경제의 실천이다.

물론 하느님의 경제의 원칙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이다. 우리가 홍천에 가서 한 행동은 하느님의 경제 원칙을 따르는 것이었고, 거기에 돈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돈은 다만 흥을 돋우는 역할만을 하고 우리는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경제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원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의 경제를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런 일들이 일상이 되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상은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세상의 경제인 경영이 자리할 곳은 없다. 아마도 내게 농사를 지을 기회가 주어지면 나는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돈은 그냥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으로부터 적은 사람으로 흐르는 물처럼 흐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농사는 다만 신앙의 매개일 뿐 경영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힘들게 캐서 더 힘들게 나 감자 박스를 다른 분들에게 보낸다.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사람들에게 어리석거나 억지처럼 들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어리석고 억지처럼 사는 것이 하느님 백성의 사는 방식이다. 세상의 경제방식에 따라 경영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만 신앙으로 그것을 감내한다면 그곳에서 성령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내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으로 행하는 믿음에서 벗어나는 일이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믿음으로 행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도 나는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보고 싶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