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튼, <칠층산> 작가 또는 관상하는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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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 <칠층산> 작가 또는 관상하는 수도자
  • 웨인 심직
  • 승인 2016.06.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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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과 함께 기도하며-3

트라피스트회 수도자가 되다

토머스 머튼

머튼은 1939년 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 학위를 위해 연구할 계획을 가졌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시와 실험적 소설들을 썼고 째즈 음악을 들었고 여행을 하였다. 머튼은 그의 새로운 종교적 믿음이 비전을 변화시켰으며 이제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깊은 평화와 행복의 경험이 그에게 허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이 새로 발견된 기쁨 안에서 그를 괴롭혔다: 신부가 되어야만 하는가?

머튼은 이 새로운 자각에 평상시 지니고 있었던 내면의 낭만적 정서로 응답했다. 그의 영적인 안내자 다니엘 월시는 트라피스트에 대해 말했다. 그들의 생활 방식을 들으면서 머튼은 “그 안에 끼고 싶은 욕구가 없었다... 그 이름 자체가 단지 나를 떨리게 만들었다”고 말했다(<칠층산>에서). 머튼은 오히려 기쁨, 가난, 단순함의 삶을 사는 프란치스코인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를 방문하였다. 보잘 것 없다는 감정을 극복하고, 그는 프란치스코회 신부와 면접하면서 과거 생활의 죄들을 열거하였다. 친권소송사건에 대해 들은 후 그 신부는 머튼의 수도회 입회 청원을 철회하라고 말했다. 깊이 실망하여 머튼은 결론지었다. “나 자신의 크나큰 비참함 외에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수도원에 들어 갈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칠층산>에서).

머튼은 성보나벤투라 대학의 영어과에 일을 얻었다. 그는 기도, 전례, 영적인 독서, 산책 등을 통해 철저한 생활을 하였다. 생활은 훌륭했고 평화로왔다. 교사 생활 첫 해 동안 머튼은 켄터키에 있는 게세마니 수녀원에서 성주간 피정을 하며 보냈다. 그 피정은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망을 더욱 강하게 하였고 하느님이 결국 그를 트라피스트 수도자로 부르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게세마니를 떠났다.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 돌아 와서 머튼은 캐터린 드 후엑 남작 부인이 할렘가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머튼은 그녀에 의해 설립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집이 수도생활에 대한 좋은 대안이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 나는 성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너무나 약하고, 자존심만 앞세우고, 자기 중심적인 어린애에 지나지 않으며, 글쓰기에 관심이 있고 하느님께 속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한때 추문에 휩쓸리기도 했습니다.” 할렘가의 우정의 집은 머튼에게 가난과 비인간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자신의 보잘 것 없음과 영적인 불편함이 그 집에서 섬기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머튼의 동질감을 강화시켜 주었다.

머튼은 단호한 선택에 직면했다. “할렘가인지 게세마니인지?” 그는 기도했고 선택은 더욱 명백해졌다. 그는 사제에게 어떤 교회법적 장애가 그의 길을 막고 있는 지를 물었다. 사제는 게세마니 수도원장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충고했다. 머튼은 수도원에 편지를 썼고 거기에서 크리스마스 피정을 하도록 요청하며 수도원에 입회하고 싶다는 마음을 비추었다. 수도원장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머튼은 군대 소집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머튼의 마음은 게세마니로 이끌리고 있었다. 그는 수도원이 그를 받아 주기를 희망하면서 가기로 결정했다. 1941년 12월 9일 그는 켄터키 행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수도원에 있고자 하는 나의 바램은 믿음을 넘어 증가되었다.. 그들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나는 군대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그것은 재앙이 될 것인가? 전혀 아닐지도 모른다. 이 모든 노력 후에 내가 수도원에서 거절된다면 군대로 가야 할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나머지는 그 분의 손안에 있다... 나는 자유로웠다. 나는 내 자유로움을 다시 찾았다. 나는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내 자신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분에게 속하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칠층산>에서)

게세마니의 트라피스트 수도원

머튼은 수도원의 허락을 기다리며 빈 손님방에 머물렀다.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 들렸을 때 밋밋하고 차가운 건물들조차 그의 영적 열정을 무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꺼이 그의 이름을 포기하고, 루이스라는 수도자 이름을 받아들였으며 모든 현세적 재산들 그리고 그의 (마음에 있는) 작품들을 포기했다.

예전에는 엄격한 규율의 시토 수도회라고 알려진 트라피스트회는 베네딕토 성인의 규율을 따르는 가장 엄격한 공동체이다. 트라피스트 공동체들은 침묵과 관상에 헌신한다. 머튼은 중세로부터 시작된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종교적 훈련들을 따랐다. 그는 백 명 이상의 수도자 공동체에서 단순함, 일상, 침묵(수화로 의사소통), 홀로 있음, 제한된 힘든 노동, 그리고 기도로 살았다. 그는 기쁨에 넘치는 열정으로 응답하였다. 생전 처음 머튼은 진짜로 집에 있는 것같이 느꼈다. 그는 후에 수도원에서의 지원자 생활이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고하곤 했다.

머튼은 새로운 질서의 생활에서 평화와, 깊은 침묵, 고독 그리고 전원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밖의 변화들이 그의 활동적인 지성의 분화구를 막지 못했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를 굽히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머튼의 남동생, 존 폴이 찾아와서 캐나다 공군의 일원으로 해외에 가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 그 다음해 봄, 머튼은 동생의 비행기가 북쪽 해안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는 슬픔을 표현하면서 한 편의 시를 썼다.

내 동생을 위하여: 1943년 작전 중 실종으로 보고됨

사랑하는 내 동생아, 내가 잠들지 않으면
나의 눈은 너의 무덤을 위한 꽃이 된다.
내가 빵을 먹을 수 없을 때
나의 단식은 네가 죽은 곳에서
버드나무처럼 살 것이다...
(<칠층산>에서)

머튼은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관상 생활을 하는 수도자의 생활에서 글쓰기의 적합성을 놓고 괴로워하였다. 머튼은 가능한 책들을 계속 생각해 왔으나, 반면 관상가로서의 머튼은 책 쓰기를 포기하고자 했다.

수도승인 머튼은 그의 장상들에게 이 딜레마를 보고했다. 그들은 그에게 쓰라고 말하였다. 머튼은 시토회 삶에 관하여 시들과 짧은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후 1946년 그는 자서전 <칠층산>을 썼다.

개인일기에서 (후에 「요나의 징표」로 출판됨) 머튼은 자신을 ‘요나’로 언급하였고 대립적인 욕망에 직면하여 싸우는 예언자로 표현했다. 종신 서원이 다가 오면서 그는 수도원 안에서 작가가 되는 것과 싸웠을 뿐 아니라 트라피스트의 관상 생활이 그에게 너무나 활동적이 아닌지 의문을 가졌다. 보다 적은 시간의 노동과 공동 기도 그리고 더 많은 고독과 개인 기도를 하는 카르투시안회에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48년 수도원장 제임스 폭스는 고독을 원하는 머튼의 욕구를 알아듣고, 그에게 매주 일요일 숲 속에서 지내도록 허락했다. 후에 수도원의 현대적 농장 장비가 소음을 증폭시켰기 때문에 그는 머튼에게 작품을 쓰도록 지하실을 주었고 점차적으로 숲속의 연장 창고를 제공하여 작업할 수 있게 했다. 머튼은 그 창고를 안나 성녀의 은신처로 불렀다. 그것은 그가 찾고 있었던 해결책처럼 보였지만 머튼은 더 커다란 고독의 가능성을 계속 찾고 있었다.

1948년 <칠층산>의 발간과 대중적 관심은 머튼의 생활을 변화시켰고 저술과 관상 생활 사이에 긴장을 높여 주었다. 1940년대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윤곽과 머튼의 젊은 이상주의를 반영하면서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출간이래 계속해서 인쇄되었다. 책의 성공은 시골의 켄터키 지방에 고립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세계적인 주의가 집중되게 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게세마니에 몰려들었고 트라피스트가 되기를 원했다. 머튼의 이야기는 모든 연령대에 공감을 주었고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머튼은 그 자신을 작가인 동시에 트라피스트 수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품 바로 직전에, 자신에 대한 의심이 머튼에게 다시 찾아왔다. 그는 멍해졌고 기도도, 쓰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서품을 받기 전 날 다음의 일기를 썼다.

“나의 생활은 은총과 의무를 피하려는 커다란 혼돈이며 반의식적인 구실의 얽힘이다. ...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불충실은 나를 아프고 절망하게 만드는 대신 그분의 자비의 팔 안으로 더욱 무턱대고 뛰어들게 한다”(<요나의 징표>에서)

그는 이 어두움의 시기를 인내했고 다시 새로운 평화를 발견했다. 토머스 머튼은 1949년 루이스 신부가 되었다.

“죄지은 방관자”

지침, 아픔, 진료소에서 보낸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해는 머튼에게 결실의 해였다. 그는 묵상에 관한 책을 3권이나 끝냈다: <관상의 새로운 씨앗>, <사람은 홀로 사는 섬이 아니다>, <고독 속의 사색>.

1951년 6월 머튼은 허원한 젊은 수도자들에게 영적인 성장과 공부를 지도하는 일을 맡았다. 수련장이라는 이 새로운 책임은 머튼의 시간을 크게 제한했다. 그는 이런 관찰을 하였다: “나는 새로운 실존의 문턱에 서 있다. 새로운 학생들에 의해 온전히 형성되려는 사람이 바로 학생들의 선생이다”(<요나의 징표>에서). 그렇지만 그는 글쓰기를 계속했고 관상의 길이 다른 이들에 대한 책임과 연민을 포함해야 한다는 깨달음도 그 안에서 더욱 깊어졌다.

머튼은 시민인권운동에 예리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틴 루터 킹의 활동을 가까이 따랐고, 킹처럼 마하트마 간디의 글에 깊이 빠졌다. 참으로 머튼은 그의 인생에 있어 중심적인 다음의 사건을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넓게 또 깊이 독서했다.

1958년 3월 18일 머튼은 켄터키 루이스 빌에서 치과 진료 약속이 있었다. 4번가와 월낫가의 교차로 모퉁이에 서 있는 동안, 그는 갑자기 모든 사람들과 그가 연결됨을 알게 되었다. 1956년 이후 한 간행물에 쓰고 있었던 글의 제목은 ‘죄지은 방관자의 추측들’인데, 그는 여기에서 이러한 깨달음을 묘사하려 했다:

“나는 갑자기 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깨달음으로 압도되었다.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서로에게 이방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길거리 모퉁이에 서 있으면서 머튼은 거룩함이 침묵, 고립,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관상적 생활이 점차로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 하고 또한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야 함을 알았다.

이러한 깨달음 후 바로 머튼은 도로시 데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 설립자인 그의 직분을 인정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이 연대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당신들은... 아직도 눈을 뜨고 있는 소수에 속한다. 나는 점점 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인디언들이고 흑인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호피족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확신하면서) 점점 더 내 갈망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이 밖으로 나가는 허락을 받아 인디언들이나 어떤 그런 그룹들 속에서 은둔 선교사처럼 같이 살아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수도원 생활에 활동적으로 관여했지만 머튼은 정의와 평화 문제에 더 관심을 두었다. <죄지은 방관자의 추측>에서 그는 자신을 혼란스럽고 절망적이며, 냉소적이고 폭력적인 세상 속에서 “죄지은 방관자”로 묘사했다. 인류에 대한 책임으로서 머튼은 계속되는 저술을 통해 이 세계에 대해 직분을 수행했다.

정부의 냉전 정책에 가톨릭이 일반적으로 지지하는데 대항하여 머튼은 비폭력과 평화 만들기에 관한 글들을 출판하였다. 그는 책 한 권 두께 정도의 <냉전 편지들>의 모음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출간되지 않았다. 수도원장이 머튼에게 그런 주제의 글쓰기를 중단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머튼은 그 지시에 화가 났으나 자신의 생각을 이미 말했고 하느님이 그 순간에는 명백하지 않으나 긍정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이용하실 거라고 믿으면서 침묵을 받아들였다.

자신은 평화 문제에 대해 행진이나 글쓰기조차 할 수 없었지만 머튼은 편지를 보내거나 방문하는 행동가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평화에 대한 투쟁에 참여했다. 그는 평화에 대한 갈망이 영적인 생활에 기초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비록 결과가 즉각적으로 증명되지 않더라도 어떤 선한 행동은 헛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동시에 머튼은 관상적 차원이 없다면 어떠한 행동도 왜곡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60년대의 혼란은 점점 더 세어지기 시작했다. 1963년 존 에프 케네디가 암살되었고 할렘 폭동이 1년 후에 있었다. 출간 제한이 완화되었고 그는 <파괴의 씨앗>을 발간하였다. 그는 또한 단행본인 <비폭력 간디>를 썼는데 인도에서 생성되었고 실천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과 관련있는 간디의 기본 원리들을 나타내 주었다.

머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고 다른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북돋았다. 젊은이로서 머튼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찾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왔었다. 이제 그는 이 일치를 위한 열정적인 고투가 그를 형제 자매들 사이에서 평화와 평등을 위해 일하도록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1994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세인트 매리 출판사에서 발간된 웨인 심직의 <Praying with Thomas Merton>을 <참사람되어>(2001.1)에서 편역한 것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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