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그분을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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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그분을 만날 때
  • 웨인 심직
  • 승인 2016.08.25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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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과 함께 기도하기-11]

<주제>

우리의 영적 여정은 피할 수 없이 잘못된 희망과 착각을 버리도록 배우는 황량하고 정화시키는 자리인 마음의 광야로 우리를 이끈다. 머튼은 우리에게 인내하고 하느님께 겸손하게 의탁하도록 설득시킨다.

<시작 기도>

사랑하는 주님,
사막의 때에 제가 조용히 머물고,
당신께 신뢰를 두며 당신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도록 가르쳐 주소서.
오로지 당신께만 완전하고도 한결같이 의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하소서.
아멘.


머튼에 관하여

처음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토머스 머튼은 장미빛 안경을 통해 수도원의 생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또한 그는 수도원의 전통이 자신의 정신에 미칠 변화의 효과도 인정했다: “사랑의 시작은 진실이며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전에 하느님은 우리 영혼안에 있는 거짓들을 정화시키셔야 한다”(<칠층산>에서).

양성 시기에 머튼은 그의 육체적, 정신적인 끈기를 시험하였다. 베네딕또 성인의 관점에 따르면 수도의 길은 희생의 길, 영혼이 겉치레를 벗어 던지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준비하도록 하는 광야로의 좁은 길을 마련한다.

머튼은 수세기 동안 광야로 사람들을 나가게 했던 열망을 경험했고 사랑 안의 하느님과 일치하는데 필요한 정화의 자리로 향하기 위해 현세 사회의 유혹과 멀어지게 되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의 희생, 노동, 그리고 일상생활이 머튼으로 하여금 이전의 생활을 떠나서 영적 여정을 시작하도록 자극하였다. 수도원의 일정은 그를 녹초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기도와 명상을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났고 그것은 2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그는 일했고 공부했고 기도했고 묵상했다. 그의 식사는 주로 야채와 빵이었고 거기다가 개인적으로 금욕생활을 더 추가하였다. 게세마니를 둘러싼 전원에 대하여 서정적으로 쓸 때, 그는 너무나 자주 켄터키 지방의 날씨, 여름의 찐득찐득 더운 날씨와 겨울의 축축하고 차가운 날씨를 가볍게 보았다. 들판에서의 일은 관상기도에 도움을 주었지만 종종 그의 기력을 소모시켰다.

수도원의 규율은 머튼의 분산된 생활에 질서를 가져왔다. 참으로 수도원의 규율과 규칙적인 생활은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좀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도록 수도자 내면의 거친 점을 다스리는 것이다. 머튼은 자서전, <칠층산>의 마감부분에서 하느님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것이다. 나는 너를 고독으로 이끌 것이다. 나는 네가 아마도 이해할 수 없는 길로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너를 대항하여 무장할 것이고, 너를 부정하고, 너를 아프게 하고, 너에게 고통을 주고, 그래서 너를 고독 속으로 작아지게 만들 것이다.

... 너는 선물들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를 무겁게 짓누르고 부술 것이다. 너는 기도의 기쁨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들은 너를 아프게 할 것이며 너는 기도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 그러나 너는 나의 고통과 나의 가난에서 진정한 고독을 맛 볼 것이며 나는 내 기쁨이 있는 높은 데까지 너를 이끌 것이다. 너는 내 안에서 죽을 것이며 이 목적을 위해 너를 창조했던 나의 자비 안에서 모든 것을 찾게 될 것이다.

... 그렇게 하여 너는 하느님의 형제가 될 것이며 화상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멈춤>

삶의 이 시점에 마음 안에서 당신은 어떤 광야를 경험하고 있는가? 그 광야는 오직 하느님 한 분에게 어떻게 의지하라고 당신에게 요청하는가?

 

사진=김용길

머튼의 말

관상을 하는 일상적인 방법은 나무들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물도 없는 사막을 관통하는 길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라. 정신은 광야로 들어가 무턱대고 아무 방향으로나 움직이는데, 비젼으로부터 멀리, 하느님으로부터도 떨어지고 모든 충만함과 기쁨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른 뼈들로 가득찬 황폐함- 모든 우리 희망과 좋은 의도들이 사라진 황폐함 이외의 다른 길로 이끈다는 것을 거의 믿기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관상의 새로운 씨>)

사막의 아버지는 빛을 밝히는 사람(비젼을 추구하는 이)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에고, 혹은 자기 의지의 위험한 무아지경에 대한 집착의 위험을 감히 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피상적이고 순간적이며, 스스로 세운 자아와 조금이라도 같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의 초월적이며, 신비스럽고, 반 밖에 알려져 있지 않는, 내면의 감추어진 진정한 자아 안에 자신을 통합시켜야 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순간적인 실존의 가치관들에 죽었던 것처럼 자신도 그러한 가치관들에 죽어야 했고 전혀 새로운 지혜의 빛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야 했다. (<사막의 지혜>에서)

 

성 찰

광야, 혹은 사막은 예언서, 시편들, 출애굽기의 배경을 형성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설교하였으며 성령은 예수를 사막으로 데리고 가서 유혹을 받도록 꾀었다. 머튼에 따르면, 우리 각각을 위한 부르심은 광야에서의 예수님과 같이 정화되고 시험을 받은 후에 새로운 삶을 되찾자는 것이다. 특별히 머튼은 유일한 지주가 예수님일 수밖에 없는 사막으로 하느님이 수도자를 부르신다고 믿었다.

즉, 광야는 고통, 걱정, 무력감과 상실의 때이며, 우리를 평상시 지탱해 주었던 버팀목들을 빼앗아 가는 시기이다. 사회적 존중은 매력의 일부를 잃게 되며 평상시의 위안들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데 실패한다.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과 홀로 있을 때를 구하도록 몰아 간다. 우리가 이 충돌들과 싸우게 될 지라도 고독은 우리를 끌어들인다. 우리는 우리의 사막이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고통, 걱정, 무력감, 상실의 경험 안으로 광야를 향해 끌리게 된다.

우리의 사막과 광야는 의미 없는 일, 고질적인 아픔, 부서진 관계,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가 여행하는 광야가 어떤 것이든지, 하느님은 예수께서 쏟으신 사랑에 의지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사막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머튼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하느님의 계획은 그들( 선택된 백성들)이 광야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며, 사막에서의 생활을 항상 되돌아보면서 그 때가 오직 하느님 한 분과 목가적인 시간을 나눈 때라고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독 속의 사색들」).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불평을 하고 거역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노예 살이에서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 주신 하느님,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잠시나마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이러한 거역과 분노를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고 모든 명령을 내리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단 사막에 직면하고, 상처받기 쉬운 우리의 나약한 실체와 대립하고 나면 하느님의 거룩한 품속으로 달려들 것이라는 것을 믿고 계신다.

★ “머튼에 관하여” 부분에 나오는 아래의 두 가지 진술에 대해 묵상하라. 예수께서 당신에게 그 말들을 하고 계시다고 상상하라. 그런 다음 그 말들이 어떻게 당신 생활에 적용되는지 보라. 또한 당신 스스로의 광야를 기억하도록 하라.

󰋮 “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너에게 무장할 것이며, 너를 부정하고 너를 아프게 하고, 너에게 고통을 주고, 그래서 너를 고독 속으로 작아지게 할 것이다.”

󰋮 “너는 선물들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들이 너의 묶인 짐들을 끊어 버리게 될 것이다.”

마침내, 당신 자신에게 물으라: 이러한 광야의 경험이 어떻게 하느님께 나를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였는가?

★ 당신이 지금 방황하고 있는 광야들 중의 하나를 묘사해 보라: 누가 그리고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당신을 무엇을 느끼는가? 어떻게 당신은 광야 속에서 헤매었는가? 왜 당신은 거기에 있는가?

당신이 묘사하는 것을 다 마무리했을 때, 다음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라:

󰋮 당신은 광야에 대항하여 불평하고 거역했는가?

󰋮 당신은 과식, 최대한 바쁘게 생활, 장시간 TV보며 광야로부터 기분전환 하려고 노력했는가?

󰋮 당신은 당신이 사막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가?

󰋮 당신의 한 부분은 있는 그대로 사물들을 보기 원하는가?

󰋮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당신도 사막을 통해 행군을 계속하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더 좋아질 것인가?

당신의 사막 경험을 하느님께 말하고 그것을 겪어 나가는데 필요할 은총을 요청하라.

★ 광야는 자주 지루하고 또 삶에 흔히 있는 경험이다.

󰋮 어떻게 일상생활이 당신에게 사막이 되었는가?

󰋮 나는 영적인 생활에 대하여 어떤 낭만적인 환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하느님 사랑의 보다 깊은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을 막았는가?

󰋮 나는 기도와 종교적 경험에서 어떤 좋은 느낌을 찾고 있는가? 하느님께 홀로 믿음에 의지할 수 있는 힘을 청하라.

★ 기지개를 펴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이 안내되는 묵상에 집중하며 들어가라:

사막을 상상하라... 넓은 지평선, 모래의 대양들, 열기, 강한 바람... 이 거대하고 빈 공간의 건조함과 황폐함을 느껴 보라... 당신의 삶에서 이같이 느꼈던 시간을 회상하라... 그 시간을 당신에게 묘사하면서 황폐함 속으로 가라 앉아 보라, 외로움과 비어 있음을 느끼고 희망 없이 여행하는 느낌을 느껴 보라.

이제 비로 적셔진 사막을 상상해 보라.... 꽃들이 어디에나 활짝 피어 있다... 마른 모래는 푸른 풀이 많은 정원이 된다... 광야 시절 동안 당신의 영혼을 비옥하게 한 은총을 회상하라... 황폐함 속에서 당신을 도와주었던 사람들과 사건들... 따뜻함, 음식과 휴식의 선물들... 당신의 마음에서 희망과 감사의 기도가 나오도록 하라... 하느님께 믿고 약속된 땅의 징표를 기다리면서 광야에서 인내하며 겸손하게 지탱할 수 있는 강함을 주시도록 요청하라.

 

하느님의 말씀

예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허기지셨다. 그 때에 악마가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하고 꾀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하고 대답하셨다. (루가 4,1-4)

<마침 기도>

“그러나 이제 나는 그를 꾀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고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언급하며 말씀하셨습니다(호세아 2,14).
오 하느님,
아무도 광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삶이 나를 광야로 데려가
나의 모든 자원들을 떼어버릴 때,
당신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아멘.

(이 책은 1994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세인트 매리 출판사에서 발간된 웨인 심직의 <Praying with Thomas Merton>을 <참사람되어>(2001.1)에서 편역한 것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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