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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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11.2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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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예전의 벗들은 다 떠나갔고, 가서 소식이 없고 몇몇 동지들만이 적적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어쩌다 얼굴을 보게 되더라도 예전 그 사람 같지 않았다. 호리호리하던 몸매는 망가져 ‘배사장처럼’ 아랫배가 불룩 나오고, 얼굴에 살이 올라 그래도 시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안심하면서 한편으론 서글펐다. 홍안의 청년이 50대 60대가 되었으니 나잇살을 먹었다고 한다. 이럴 때, “세상 다 그런 거야” 하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니고 보면, 나도 많이 거친 시절 속에서 뒤쳐진 모양이다. 나이 들면 너그러움이 미덕인데, 미덕이 지나치면 총명함을 잃는다. 예언보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말도 때로 변명처럼 들리고, ‘지혜로운 예언’은 없을까, 뇌까려 본다.

한창 교회개혁을 주장하고, 교회의 민족·민주·민중적 변혁을 외치던 때, 신학을 공부하던 열렬함이 배인 ‘청년신학동지회’ 시절이 그리워, 다시 한 번 그리운 동지들 불러 모임을 만들면서 ‘맨발신학회’로 이름 지었던 적이 있다. 물론 이 모임은 시운(時運)이 따르지 않아 시작도 하지 못하고 그만 두고 말았지만, 갈릴래아 호숫가를 맨발로 걷던 예수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요즘은 체중계 위에서 되새긴다. 몸무게가 늘어날 때마다 한숨을 쉬고, 나의 게으름과 태만을 탓했다. 이따금 배도 좀 들어가고 체중이 줄어 안심할 때마다, ‘첫마음’을 생각한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며 “그래, 이거야!” 하던 마음을 되잡는다. 허나, 이 모든 게 잃어버린 세월을 그리워하는 망령이 아니길 빈다. 지금도 생생하게 다독거려도 좋을 신앙이길 바란다.

곁에 있어도 곁에 없어도 나를 다독거리는

이제는 소설가 한강의 부친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더 잘 기억하는 소설가 한승원의 산문집을 우연히 서점에서 만났다.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2018, 불광출판사). 프로필을 보니, 1996년 고향인 장흥으로 내려가 바닷가에 ‘해산토굴’을 짓고 성찰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책을 보니, 불자인 한승원은 여느 스님들보다 더 수행적이다. 성철과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을 사모하였지만, 생전에 한 번도 그분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사람이다. 보지 않아도 더 사무치게 알아보던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이런 이야기 한 자락 내놓았다. 한 선비가 몇십 리 밖의 마을에 사는 동문수학하던 벗이 보고 싶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더불어 시를 읊고 싶어 환장할 것 같아 집을 나섰다. 그는 벗을 머리에 그리며 가다가 꽃을 보고 산을 보고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강뭉을 보고 우짖는 새를 보고, 제가 본 것들에 대해 벗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며 벗과 시를 지어 나누기도 하고,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 재를 넘으며 불어오는 바람에서 벗의 향기를 맡기도 했다.

들판을 가로 질러 산모퉁이를 돌아 벗이 사는 집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걸음을 재촉해 그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선비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벗과 나눌 말과 흥이 이미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집 앞에서 발길을 돌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굳이 손님맞이로 그의 아내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고, 이미 벗과 나눌 이야기를 다 해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사무친 사랑과 그리운 이는 굳이 보지 않아도 본 것이고, 설령 만난다 한들 돌아서면 다시 그리운 게 사랑이다. 곁에 있어도 곁에 없어도 나를 다독거리는 그 사람, 편지나 책만 보아도 가슴 울렁이는 그 사람, 수십 수백 수천 년 전에 태어나 시공을 달리 하는 사람이라도 마음이 통하면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현존하는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다.

정말 아름답게 그늘진 저녁놀을 바라볼 때, 그때 그 사람도 저 하늘 보았을까, 헤아리며 가슴 저미는 사람이다. 지금은 다소 배가 나왔어도, 예전처럼 또록또록한 눈빛을 보이지 않더라도, 속 깊은 곳에서 ‘우정’을 느끼게 해 주는 그 이의 부끄러운 얼굴이 새삼스럽다. 전진의 용맹함과 후퇴의 부끄러움을 모두 아는 그런 사람이다. 있어도 건방떨지 않고 없어도 비굴한 눈빛을 보이지 않는 순정한 사람이다. 나도 어쩌지 못하는 생 앞에서 겸손하고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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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맨발

한승원은 오십대 초반 어느 초가을에 겪은 ‘맨발’에 대한 각별한 경험을 전했다. 대구 파계사 뒷산 중턱에 있는 암자에 올랐다. 어느 주간 불교신문사의 부탁으로 그 암자에서 수행한다는 스님을 인터뷰 하러 가던 길이었다. 이 암자는 성철 스님이 십여 년 동안 울타리를 쳐놓고 수행하여 득도한 곳이라 한다. 그분은 지금 없지만 이 암자에 성철 스님 못지않게 도를 닦은 고명한 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침 그 스님을 취재하고 돌아가는 방송사 기자들을 오르막에서 만났다. 암자에 도착해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앉았다. 그리고 스님의 ‘맨발’을 보았다.

깨끗하고 산뜻한 잿빛 승복 차림인 스님은 양말을 신지 않았는데, 맨땅을 디뎌보지 않은 듯싶은, 살결이 투명할 정도로 얇고 말랑말랑한 맨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꺼운 방석 위에 반가부좌를 하고 앉은 스님은 자기 한쪽 맨발을 한 손으로 주물럭거리고, 상체를 천천히 양옆으로 흔들면서 찾아온 이들의 절을 받았다. 첫 인상으로도 유들유들한 스님의 표정이 역겨웠다고 한승원은 기억한다. 스님은 대수롭지 않은 듯 인터뷰를 거부했고, 그냥 차나 한 잔 얻어 먹고 가라고 했다.

이 와중에 몇몇 신도들이 찾아와 절을 올렸다. 검찰지청 검사 부부를 포함해 여럿이 찾아와 절을 하면 스님은 무슨 사교의 교주인 듯 상체를 슬슬 흔들면서 절을 받았다. 그리곤 찾아온 신도들을 상대로 ‘데모크라시한’ ‘멜랑콜리한’ ‘핸섬한’ ‘심플한’ 따위의 영어와 프랑스 단어들을 섞어 이야기했다. 말할 때 서양 사람들처럼 어깨를 으쓱 하는 등 몸짓 손짓을 하곤 했다.

젊은 보살이 파전을 부쳐내고, ‘곡차’라는 해설과 함께 매실주가 나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스님은 여기저기서 들은 말들을 짜깁기하여 순진한 신도들을 데리고 노는 게 아닌가. 스님의 번들거리는 이마, 굳은 살 한 점 박혀 있지 않은 보들보들한 맨발, 그건 스님의 허위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였다. 한승원이 이때 '내 속의 도깨비가 스님을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말했다고 했다. 대뜸 내지른 말은 이러했다.

“입적하면 스님은 아마 틀림없이 석가모니 부처님 앞으로 가시게 될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제가 생각하기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스님의 따귀를 한번 호되게 때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이 자식, 너는 오만할 뿐만 아니라, 속에 허위가 가득 차 있어서 틀렸어!’ 하고 나서, ‘지옥에 가서 진짜로 도 닦고 다시 오너라!’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잠잠해진 것은 당연하다. 성철 스님 흉내나 내고 건들거리던 스님은 창백한 얼굴로 한승원을 따라 일어나 묵묵히 암자 마당 밖 오솔길까지 배웅해 주었다고 한다.

지옥에 가면 교황과 주교들이 수두룩하다는 농담이 있는 것처럼, 스님 행세하고 성직자 행세하는 종교인들에게 한승원의 이야기는 후련하면서도 뒤끝이 쓰다. 절집에서나 예배당, 성당에서나 ‘행세하는’ 자들이 적지 않음을 내가 알고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멋쩍은 표정으로 한승원의 뒤를 따라 일어나 오솔길 초입까지 배웅하는 그 스님의 뒤태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갑자기 엄습하는 부끄러움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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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맨발

한승원은 <부처님의 맨발>이라는 글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하실 때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였다. 부처님의 제자 카샤파(가섭)가 부처님 열반한 지 칠일 째 되는 날 해질녘에 땀을 흘리며 쿠시나가라에 있는 부처님 관 앞으로 달려왔다. 천리 밖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대중에 전하기 위해 분투하다가 부음을 듣고 달려온 카샤파는 엎드려 절을 했다. 그때 관 아래쪽이 우지끈 터지면서 부처님의 두 맨발이 뻗어 나왔다. 어떤 제자는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고, 어떤 이는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냉정한 것은 카샤파 뿐이었다. 카샤파는 부처님 맨발 앞에 엎드려 두 손으로 두 발을 감싸 안았다.

여기서 부처님의 맨발은 또 무엇일까.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 출가자의 표상이 ‘맨발’이다. 평생 대중을 교화시키려고 세상의 험한 길을 밝고 다닌 맨발. 발가락과 발톱은 돌부리에 차이고, 삐죽거리는 자갈과 가시로 인해 찔리고 긁힌 상처 그대로였다. 이 상처가 아물고 다시 상처입고 또 아물기를 거듭해서 발에는 옹이가 박혀 있고, 낡은 가죽을 덮어씌운 것처럼 너덜너덜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왕자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에는 소가죽으로 만들고 은장식, 금장식이 달린 신을 신었다. 그 신은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돌부리와 가치들과 독충을 막아주었다. 그런데 출가를 하면서 그 신을 버리고 맨발이 되었다. 고행 끝에 부처가 되어 고향에 돌아 왔을 때 아버지 슈도다나 왕은 아들에게 가죽신을 신기려고 하였으나 허사였다. 이제 여든 넘어 열반에 들면서, 부처님은 사랑하던 제자 카샤파에게 ‘맨발’을 보여주신다. 죽는 날까지 수행자의 모습을 잃지 말라는 당부였다. 카샤파는 이 맨발을 부여안고 어흑어흑 울었다.

 

예수의 맨발

그러면 예수님은 어땠을까? 그분이 갈릴래아 흙바람 속을 거니실 때 맨발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루카 10,4) 가라고 했다. 샌들을 신었다 해도, 마르고 닳도록 신었을 것이다. 그래서 샌들 사이로 흙먼지가 들어오고, 돌부리에 채이면 어김없이 발에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그분이야 태어날 때부터 빈민이요, 노동자였다. 성년이 되어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고, 스승이 되어서도 그 무리가 모두 다른 사람의 선의에 기대 탁발하는 신세이고 보니, 아무리 제자가 많아도 ‘맨발’이나 다를 바 없었다. 복음선포 사명을 수행하는 자는 누구나 ‘맨발의 청춘’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 맨발인 채로 살아가는 가난한 민중의 마음을 울릴 수 없다. 그들에게 행복하다, 말할 수 없다. 맨발이어도 행복한 이가 그분이고 그분의 제자들이어야 했다.

그리스도인은 튼튼한 가죽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그늘 안에서만 안심하는 사람들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 이유로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선포하고 주교들이 제후들처럼 대접받으면서, 맨발의 청춘은 사막의 은수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성직은 가난한 이들의 계급상승의 창구가 되고 심지어 성직을 매매하기도 했다고 하니, 맨발의 예수를 기억하고, 맨발의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것은 시대의 어리석음이 되었다.

다만 그 어리석음이 오히려 거룩하다는 생각을 다시 불러일으킨 자가 있으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다. 허나, 이 분을 스승으로 따르는 수도자들 가운데 정작 프란치스코처럼 맨발로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 누구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라며, 적절한 타협을 미덕으로 여긴다.

문익환의 발바닥

문익환 목사
문익환 목사

예전에 예수살이공동체 제자교육을 받으면서, 맨발수행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이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돌아올 차비만 주고 참가자들을 맨발로 거리에 내보낸다. 맨발로 돌아다니며, 제 몸으로 일을 해서 밥을 먹고 돌아오라는 수행법이다. 그 쑥스럽고 난감함이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하나뿐이다. 지하철 인근 길바닥에 떨어진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를 맨발로 밟았다. 쑥뜸을 뜬다고 할 때는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난데없이 발바닥을 찌르고 오르는 꽁초의 뜨거움이란 ‘아프다’는 말로 부족하다. 발바닥으로 세상을 감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부처님의 길이든, 예수님의 길이든, 수행자의 삶은 고달프다. 발바닥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참에 문익환 목사님이 아득한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히브리 민중사>(삼민사, 1990)를 지은 목사님은 평생 민중 역사의 길바닥에서 사셨고, 먼저 이승을 떠난 박종철이며 이한열 열사의 이름을 부르다 목이 쉬셨다고 한다.

1994년 1월 18일 오후 8시 20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분은 가셨지만 영결식이 있던 대학로에는 축복처럼 하얗게 눈이 내렸다. 이 광경을 자캐오처럼 서울의대 담벼락에 올라가 지켜보았다.

그분은 살아생전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노래를 불렀다.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 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난 발바닥으로>라는 이 시를 읽으면, 문익환 목사님이 누구인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평생의 갈망, 평생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시와 하나가 된 분 앞에서, 나의 맨발을 생각한다. 부끄러운 각질과 부수어진 발톱을 생각한다. 온몸의 압력을 견디며 그래도 어딘가로 나를 가게 해 주었던 고마운 발바닥이다. 이 몸이 다하면, 그제야 온몸과 나란히 누울 발바닥이다. 그 맨발과 발바닥을 떠올리며 스승을 생각한다. 그분들의 ‘낮은 곳으로만 향하던’ 사랑을 생각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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