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나는 때로는 가난을 비난하고 때로는 변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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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나는 때로는 가난을 비난하고 때로는 변호한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9.11.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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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을 통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형제들을 도울 수 있다. 우리가 먼저 발가벗지 않고서는 궁핍에 찌든 우리 형제들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 우리의 사랑을 보여줄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가난은 이질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가난과 가난이 지닌 기쁨과 슬픔에 대해 글을 쓰고자 노력해 왔다. 어쩌면 나는 지난 20년 동안 가난 그 자체에 대한 나의 느낌은 생략한 채 가난에 대해서만 써왔는지 모른다. 어쨌든 나는 때로는 가난을 비난하고 때로는 변호한다. 가난은 단순한 동시에 복잡하다. 가난은 사회적 현상인 동시에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난은 매우 역설적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지독한 가난뱅이’였지만 그보다 더 기쁨에 넘쳐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에게도 집에서 도망쳐 나와 동굴 속에 숨어 떨면서 눈물과 두려움으로 괴로워한 적이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몸담으려고 마음먹은 교회와 사제관을 보수하기 위해 (자기에게 정당하게 돌아올 상속재산으로 생각한) 아버지의 재산 일부를 훔쳤다.

그가 가난을 자기 정배처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가난해졌다. 그렇게 가난해지는 과정을 통해 프란치스코는 점차 성숙해졌다. 프란치스코가 질병에 대한 두려움과 결벽증, 나아가 세속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체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나병환자에게 입을 맞춘 뒤였다.

 

무엇을 이루려면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건너뛸 생각은 금물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분명히 깨닫는 것은 인생이란 수많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단계는 아주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도 한 번만 아니라 두 번이나 의식적으로 ‘나병환자에게 입을 맞춘’ 적이 있는데, 입을 맞출 때의 황홀한 느낌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다.

첫 번째는 이른 아침 성당 계단에서였다.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한 여자가 구걸하고 있어서 (빈민가에 사는 거지들에게만 성당에서 구걸하는 일이 허용된다.) 돈을 건네주자 (그 돈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나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내 손에 입을 맞추려 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눈과 코에 구멍이 뚫려있는 그녀의 추한 얼굴에 키스를 하는 것뿐이었다. 영웅적인 행위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아주 빠르게 입을 맞추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날부터 이웃을 향해 관심을 돌리기가 훨씬 수월해졌고, 그 순간 사랑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이가 다 빠진 메기같이 큰 입을 가진 술 취한 매춘부의 재워 달라는 부탁을 거절했을 때였다. 그 여자는 전에도 환대의 집에서 소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나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거절해야 할 때엔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단 우리 집에서 잘 수 없다고 하자 선선히 물러서긴 했는데, 갑자기 자기에게 입을 맞춰달라고 부탁했다. 역겹긴 했지만 어쨌든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런 일들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한편으론 쉽게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그러나 매일 매시간 우리가 소유한 물건을 포기한다는 것, 특별히 타인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기대를 버리는 일들은 매우 힘들다. 나 또한 그런 일들이 다른 어떤 일보다도 쉬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 발가벗을 수 있고 또 발가벗겨질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안락과 근심 걱정 없는 시간, 여유와 휴식을 추구하기 위해 문어발처럼 이리저리 꼼지락거리며 몸부림칠 것이다. 그것이 책이나 음악과 같은 내적 감각의 만족을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음식이나 술과 커피와 담배 같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어느 한 가지를 포기한다는 것이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재산이 어느 정도여야 알맞은 거요?” 하고 사람들은 묻는다. 에릭 길(Eric Gill)은 말하길 재산(property)은 ‘적당’(proper)해야 한다고 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재화의 양은 품위있는 삶을 영위할 만큼이어야 한다고 했다. 교황들의 회칙에서도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자선보다는 차라리 정의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지금도 여전히 보다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해 싸우고 있지만 치솟아 오르는 생활비에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 그들은 불공평한 임금 때문에 투쟁중이고 모든 파업은 불공평한 임금을 개선하기 위한 필요악이다. 그래도 여전히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현대경제는 전쟁준비를 위한 군수산업에 기초하고 있고, 그러한 경제체제야말로 가난에 대한 원인제공자로 현대의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위안거리가 있다면 한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죄없는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던 전쟁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제 이에 대한 속죄가 이뤄져야 한다. 요즘의 논쟁은 전쟁과 무관한 시민들까지 (‘방어’라는 잘못된 이름의)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당신이 모포를 만드는 직물공장에서 일한다면 당신의 일거리는 지금 전쟁과 관련이 있다. 만약 당신이 농사를 짓거나 식량생산을 위해 땅에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한다면, 당신은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거나 아니면 남들을 군대로 내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버스를 탄다면 그것은 곧 (전쟁을 위한) 세금을 지불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당신이 사는 물건엔 무엇이든지 세금이 부과되기 마련이므로, 이 세상에서 하는 무슨 일이든 사실상 국가의 전쟁준비를 지원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상인은 몇 푼의 이익을 헤아리며 부를 축적하는 법을 배웠고, 백만장자들은 능률적인 경영 전문가들을 거느리며 부를 축적해 왔다. 자신들의 본을 따른다면 어떤 사람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모든 ‘환대의 집’에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문밖에는 매일 하루에 두 번, 2,3백 명이나 되는 건강한 사람들이 빵을 배급받으러 줄을 선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써 보낸다. 이쯤 되면 가난이 아니라 궁핍이다.

나는 지금 내 앞에 걸려 있는 프리츠 아이젠버그가 그린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의 그림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빈첸시오는 포동포동하게 살찐 아이 하나를 팔로 안고 있는데, 가냘프고 얼굴이 창백한 또 한 아이가 그를 놓칠세라 옷자락을 꽉 움켜잡고 있다. 그렇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항상 그들과 함께 나눠야 하는 거고, 남들을 돕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발가벗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마 나의 평생직업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그토록 심한 가난을 원하지는 않으셨으리라 확신한다. 계급구조는 우리가 동의해서 만든 것이지 그분이 만드신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 때문에 혁명적 변화를 역설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질러진 수많은 죄악들이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그중에서 가장 큰 죄악은 자신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또 있다. 하찮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자유와 명예를 팔도록 은근히 강요하는 짓이다. 탐욕에서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지만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광고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저 세대에 화가 있을진저!)은 아주 여유있게, 우리의 욕망을, 종종 가정의 붕괴를 가져오는 그런 만족을 서슴없이 자극한다.

이러한 현대생활의 요소들 때문에라도 할 수 있는 만큼 인격적 책임을 가지고 꾸준히 가난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전해온 메시지는 바로 ‘십자가’다. 우리가 그동안 온통 죄악과 태만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의 불신앙과 아집의 깊이를 계속 보아오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일을 도와달라고 희망하며 글을 쓰고 호소하고 간청한 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뭇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일 뿐이다. 동시에 우리는 가난에 대한 사랑이 증폭되기를 기도하는데, 그것은 형제들과 자매들의 사랑으로 지속될 것을 확신한다.

[출처] <가톨릭일꾼> 195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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