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게 음악의 성자 밥 말리-거리에서 부르는 검은 돌멩이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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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게 음악의 성자 밥 말리-거리에서 부르는 검은 돌멩이의 노래
  • 한상봉
  • 승인 2019.11.1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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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슬프고 쓸쓸해 보이는 거니?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깨어나고 있어>(Coming in from thr cold)라는 레게음악의 한 구절이다. 밥 말리(Robert Nesta Bob Marley, 1945-1981)라는 흑인 가수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미리 유언이라도 남긴 것일까. 밥 말리가 죽자 1981년 5월 21일 자메이카의 빈민가 중심부에 있는 맥스필드가의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1만2천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무대 위에는 밥과 마커스 가비, 하일레 셀라시에의 초상화가 걸렸으며, “사악한 자는 그 사악함으로 멸망하지만 의로운 자는 죽음 속에서도 희망을 품는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아프리카의 대중잡지 <스피어>(Spear)에는 이런 사설이 실렸다.

“밥 말리의 음악은 사람들이 정의와 자유를 외치는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밥 말리는 흑인들에게 사랑과 자유라는 어려운 유업을 남겼고, 그것은 바빌론 체제[불평등사회]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이 위기의 시대에 더욱 많은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왜 한 명의 대중가수가 자메이카를 비롯해 아프리카 대륙과 인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땅에서 유배된 흑인들’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마커스 가비와 흑인들의 형제애

신세계를 향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의 두 번째 항해에서 육지를 발견하고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은 자메이카의 세인트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첫 번째 도시 세비야누에바를 세웠고, 원주민이었던 이라와크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으로 쓰러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땅에서 인종청소에 성공한 스페인 정복자들은 노동력 부족을 채우려고 앙골라에서 엄청난 수의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고, 자메이카 사람들은 바로 그 흑인노예들의 후예들이다.

밥 말리의 장례식에 내걸린 인물들은 아주 특별하게 이 대중가수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이들이다. 그중 하나가 마커스 모셔 가비(Marcus Mosia Garvey, 1887-1940)였다. 그는 1887년 세인트앤스베이에서 흑인 채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세례를 받고, 나중에 자기 동포들을 백인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한 ‘흑인 모세’로 불려졌다. 1907년 14살에 가비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으로 가서 인쇄공 도제로 일하면서, 스무 살이 되어서는 인쇄공들의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다.

자메이카 노동자들을 위한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던 가비는 훌륭한 연설가요 뛰어난 사업가로서 1914년 ‘만국흑인진보연합’을 창립하고 ‘흑인들의 형제애’를 강조했다. 흑인들의 인종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던 가비가 내린 결론은 흑인들의 신세계를 아프리카에 건설하자는 ‘흑인송환운동’이었다. 그는 흑인이 소수인 나라에서 흑인들은 결코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결국 백인들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아프리카에 흑인들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고통 받는 이들의 후예입니다. 우리가 더이상 고통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고 연설하며 수백만 흑인들을 감동시켰던 가비는 6백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1940년 폐렴으로 영국 런던에서 죽었다.

 

여인이여, 울지 마세요

밥 말리는 사실상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쉰 살이 다 된 영국계 자메이카 사람 노발 말리(Norval Sinclair Marley) 대위였고, 어머니는 열여덟 살의 흑인 처녀 세델라 부커(Cedella Booker)였다. 그들은 결혼은 했지만, 결혼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어머니의 반대로 세델라를 챙길 수 없었던 노발 말리는 밥 말리를 돌보지 못하고 떠돌다가 밥 말 리가 열 살 때 죽었다. 세델라는 세인트앤에서 혼자 아들을 양육했다. 밥은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세델라가 가게에서 일할 때 손님들에게 막대기 두 개로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자메이카 노점상들의 전통적인 노동요인 <이 토마토 좀 보세요>(Touch My Tomato)이다.

“이봐요 이 토마토를 좀 보세요
이 얌이랑 이 감자 좀 보세요
살짝 보기만 하세요
너무 꽉 쥐지는 마시구요”

어머니 세델라가 킹스턴에 일자리를 얻어 떠났을 땐, 밥 말리 혼자 아침엔 한 무리의 염소를 이끌고 골짜기를 올랐고, 밤에는 다시 이리저리 뛰는 염소들을 단속하며 골짜기를 내려왔다. 염소들이 풀을 뜯는 동안 밥 말리는 친구에게 얻은 막대피리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어떤 의미에서 밥 말리는 버려진 아이였고, 이런 환경이 그에겐 시적 감성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저항적인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던 1965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노래했던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에는 항상 어린아이들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밥이 노래를 만들 때면 그 방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었고, 밥의 노래는 아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밥의 밴드 이름이 ‘웨일러스’(Wailers), 즉 ‘울부짖는 자들’이었던 것처럼, 그가 지은 음악과 노랫말 속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 버림받고 길 잃은 소년의 괴로운 울음소리, 막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나중에 한 기자가 밥 말리에게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느냐고 질문했을 때, 밥은 “시작이라, 울음, 그래요, 울음과 함께 시작되었죠.” 하고 대답했다.(1973) 밥은 무책임한 백인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아버지에 대해 알지도 못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일주일에 겨우 20실링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 나는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는 영감을 얻었습니다. 내가 계속 교육을 받았다면 아마도 멍청한 바보가 되었겠지요.”(1975)

“나의 아버지는 뭐 알고들 계시겠지만 바로 영국 출신입니다. 그는 그러니까 ... 뭐 당신들이 짐작하는 바대로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셈이지요.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를 건드렸고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그는 영국인이었고 ... 그럴 겁니다. 나도 한번은 그를 보았으니까요. 나의 어머니요? 나의 어머니는 아프리카인입니다.”(1978)

존 바에즈도 리메이크해서 불렀던 밥 말리의 대표적인 노래가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No, woman, no cry)인 것은 당연하다. 그 여인은 어머니 세델라이며, 아내 리타이며, 자메이카의 고통받는 밑바닥 민중인 흑인들이었다. 자기만큼 가난하고 억압받고 희생당한 이들의 처지에 몸으로 공감하며, 그들에게 “눈물을 거두고” 지치지 말고 투쟁하며 앞으로 나가자고 밥 말리는 독려한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눈물을 그쳐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눈물을 그쳐요.
그래요, 나는 우리가 트렌치타운의 정부청사 앞마당에 앉아 있던 때를 기억해요.
그때 우리가 만난 좋은 사람들과 섞여 있던 위선자들을 관찰하고 있었죠.
우리는 좋은 친구들을 얻기도 하고,
좋은 친구들을 잃기도 해왔어요. 그 길을 따라.
이 밝은 미래에 당신은 과거를 잊을 수 없어요.
그러니 눈물을 그쳐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눈물을 그쳐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안돼요, 눈물을 그쳐요.
그래요, 나는 우리가 트렌치타운의 정부청사 앞마당에 앉아 있던 때를 기억해요.
조지가 불을 붙였고, 통나무는 밤새도록 타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과 나눠 먹을 옥수수 죽을 만들어요.
내 두 발이 나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죠, 그러니 난 힘차게 나아가야죠.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모든 게 다 잘 될 거예요."

 

 

밥 말리는 킹스턴 서부 빈민가 트렌치타운에서 “복종하지 않으며 굳세게 자랐다”고 말한다. 스티븐 데이비스는 발 말리의 평전 <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다-밥 말리>(여름언덕, 2007)에서 밥 말리가 성장했던 동네를 이렇게 표현했다.

“닭장 같은 판잣집들과 불법거주자들의 가건물들이 계속해서 늘어가는 가운데 더럽고 가난한 이른바 내국 난민-그들은 자메이카라는 나라의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그 가시 때문에 생긴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들이 그곳을 채워가고 있었다. ... 빈곤과 영양실조로 신음하는 아이들이 넘쳐나고, 발진 티푸스와 소아마비가 창궐하며, 짐승 우리 같은 곳에 갇혀버린 억눌린 자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이 뿌옇고 냄새나는 게토에서 밥 말리가 이제 한 명의 남자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트렌치타운에서 사람은 곧 울음이었고, 킹스턴의 빈민가 사람들은 ‘수난자들’(sufferers)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동일시했던 구약의 고통 받는 부족의 이름을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Israelites)이라고 불리었다. 이 수난자들의 통곡과 울부짖음이 지난 세기의 가장 놀랍고 주목할만한 문화현상인 ‘라스타파리’(Rastafari)운동, 루드 보이(rude boy), 레게를 낳은 반란의 영혼에 불을 지폈다.”(55-56쪽)

당시 자메이카는 약 1천 명의 부자들이 50퍼센트 이상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이 턱없이 부족해서 가족을 제대로 부양할 수 없었고, 농촌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남성인구의 65퍼센트, 여성인구의 32퍼센트가 일을 원하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비자발적 실업상태’에 놓여 있었다. 자메이카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이들은 ‘천국에서 지옥을’ 살아야 하는 빈민거주지역으로 내몰렸다. 스티븐 데이비스는 “그을린 대지와 빽빽하게 들어선 판잣집들이 기이한 모양의 열대 관목들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낮 동안의 트렌치타운의 풍경은 마치 오래된 피폭지((被爆地) 같았다.”고 전한다.

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밥 말리는 14살까지 어렵사리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를 가득 채우는 떠들썩한 소음 속에서 일찍이 단짝이었던 버니와 함께 익숙한 찬송가와 흑인영가를 불렀고, 리듬 앤 블루스 음악에 푹 빠져 라디오를 끌어안고 살았다. 15살이 되자 발 말리는 교과서를 세델라에게 건네주며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때부터 밥은 용접공장에서 수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아세틸렌 화염과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불꽃들과 함께 낮 동안 노동하고, 밤이면 친구들과 화음을 맞춰 노래 연습에 열중했다. 스승은 유명한 가수이며, 진지한 비평가이며, 엄격한 교사였던 조 힉스(Joe Higgs)였다.

조 힉스는 ‘힉스 앤 월슨’이라는 유명한 듀오의 일원이었고, 다른 동료들처럼 피상적인 화려함을 좇지 않고 버림받은 트렌치타운에서 정치의식이 투철한 거리의 시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는 이웃들에게 수업료 없이 완벽한 음정과 높은 화음을 구사하는 비법을 전수하였고, 무엇보다 천편일률로 사랑노래만 부르던 대중가요에서 벗어나 라스타파리운동을 지지하고, 빈민가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있던 극단적 소외감을 노래로 불렀다.

그는 밥을 공연에 데리고 다녔으며, 키타 코드를 이용한 반주법, 간단한 작곡법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1961년 무렵부터는 밥도 용접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노래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보호장비 없이 용접하다가 사고가 발생하면서, 밥은 시력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아예 공장 일을 접고 노래만 하기로 작정했다. “노래가 나의 길”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레슬리 콩의 음반가게에서 오디션을 보고 첫 번째 음반으로 자신이 작곡한 <함부로 비난하지 마>(Judge Not)라는 싱글앨범을 냈다.

1962년 8월 6일 자메이카가 영국에서 독립하고, 밥 말리도 본격적으로 음악세계에 뛰어 들었다. 1963년경에는 영국에서 비틀스가 등장하고, 롤링 스톤스가 활동을 개시하였고, 미국에선 밥 딜런이 저항음악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그 해에 밥 말리는 피터 토시, 버니 웨일러와 함께 3인조 그룹 ‘웨일링 웨일러스’(Wailing Wailers)를 결성했다. 당시 프로듀서였던 콕슨 도드가 이름을 ‘웨일러스’로 바꾸라고 권유하자, 밥 말리와 친구들은 ‘더 웨일러스’라는 이름으로 <정신 좀 차려>(Simmer Down)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1964년 1월 자메이카 방송순위 1위를 했고, 순식간에 이들은 스타가 되었다. 이 노래는 루드 보이(Rude boy, 거리 청소년)운동 차원에서 “정신 좀 차려, 흥분을 가라 앉혀.”라며 빈민가의 비행청소년들을 위한 댄스리듬을 연주하였다.

사실 밥 말리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는 당시 스튜디오 뒤편에 있는 창고에서 잠을 잤다. 당시에 가수들에겐 제작자와 계약이란 것도 없었고, 노래에 대한 인세나 부가수입이 없었다. 출연료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작자에게 대가를 요구하다가 폭행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콕스가 운영하던 ‘스튜디오 원’에선, 망고가 익는 계절에는 뒷마당의 큰 망고 나무에서 스튜디오의 함석지붕 위로 망고들이 떨어졌고, 그럴 때면 모든 이들이 배가 고팠다. 이런 밥 말리에게 마이애미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밥 딜런의 노래 한 곡이 귀를 잡아 당겼다. <굴러다니는 돌멩이같이>(Like a Rolling Stone)였다. 이 노래에서 밥 딜런은 “구르는 돌멩이처럼, 집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 어떻게 느끼냐?”고 반복해서 묻는다. 밥 말리는 같은 제목으로 다른 가사에 다른 선율을 얹어 노래를 지었다.

“아무도 그가 길 위에 있다고 말해주지 않을 거야
네가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기 때문이지
너에겐 밤도 아침도 없구나
원래 시간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명멸하니까
어떤 느낌이니
완전히 혼자가 된 느낌말이야
집으로 가는 길도 모르는 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 같은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된 듯한 느낌말야”

 

 

노래하는 예언자

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밥 말리의 영혼을 다독거리고 구원처럼 삶의 비전을 전해준 것은 종교였다. 그것은 자메이카 흑인의 아프리카적 뿌리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묘하게 뒤섞인 컬트종교인 ‘라스타파리’(Rastafari)운동으로, 이들이 ‘흑인 모세’로 부르던 마커스 가비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1967년 초반 웨일러스는 자메이카에서 라스타파리의 금욕주의를 표방하는 최초의 보컬그룹이 되었다.

그들은 정해진 음식만 먹었고, 엄청난 양의 마리화나를 피웠으며,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비의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밥은 종교적 신념이 깊어지면서 킹스턴을 떠나 고향인 세인트앤에서 농부가 되어 옥수수를 재배하고, 데님 멜빵 차림에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은 점점 꼬여갔다. 물론 거기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오두막 옆에 있는 바위에 앉아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멋진 시간>(Nice Time), <힘 내>(Stir It Up) 등을 작곡했다.

1968년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해 디트로이트가 화염에 휩싸이고 뉴욕 할렘의 흑인거주지가 들끓고, 유럽에선 전쟁과 인간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자메이카의 급진적인 젊은이들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밥 말리도 자신의 엉킨 머리채를 잘라내고, 당시에 유행하던 ‘아프로’(Afro)스타일로 머리를 땋아 동그랗게 부풀리고 거리 시위에 나섰다.

그들에겐 백인 중심의 자메이카 정부와 체제 자체가 바빌론이었다. 이 와중에 밥은 한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밥의 음악은 “빈민굴의 록”(Trenchtown Rock)이자 “반란의 음악”(rebel music)이었기에 “네 권리를 위해 일어나”(Get up, Stand up)라고 선동한다. <작은 도끼>(Small axe)라는 노래는 제국주의 억압자들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울분을 ‘도끼로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에 비유했고, <버팔로 병사>(Buffalo Soldiers)는 비슷한 처지이면서 인디언을 살해해야 하는 흑인 병사의 복잡한 심정을 노래했다.

더 웨일러스가 1973년 발표한 <보안관을 쐈지>(I Shot The Sheriff)를 에릭 클랩튼이 연주해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성공시키면서 밥 말리는 세계적인 인물로 뜨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발표한 <여인이여 울음을 그쳐요>(No Woman No Cry)는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어, 밥 말리를 음악으로 혁명하는 라스타주의자가 되게 하였다. 이런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곡으로는 <혁명>(Revolution)과 <탈출>(Exodus) 등이 있다. 그리고 1980년에 발표한 마지막 음반은 <반란>(Uprising)이었다. 그러나 제목만 보고 이 노래들을 폭력적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다. 밥 말리는 언론 인터뷰를 자신의 신앙과 예언자적 발언의 기회로 삼곤 했는데, 1976년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인종은 우월하고 어떤 인종은 열등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철학은 결국에는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고 영원히 폐기될 것입니다. 그런 철학은 전쟁을 일으킬 뿐이지요. 자(Jah)께서 이미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고요. 신이 저에게 부를 노래를 주지 않았다면 저는 부를 노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문화를 팔 수 없습니다. ... 저는 우주적인 하나됨에 대하여 노래하는 사람입니다.”(스티븐 데이비스, 301쪽)

밥 말리는 <하나의 사랑>(One Love)에서 하나의 사랑, 하나의 마음으로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라”고 청한다. 그는 흑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아프리카에 세우자는 운동을 벌였지만, 그는 인종주의의 사슬에 묶이지 않는다. 어느 기자가 밥의 음악이 반(反)백인주의를 표방하는 것인지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음악은 의로움을 옹호합니다. 당신이 흑인이라고요. 아닙니다. 당신은 틀렸어요. 당신이 백인라고요. 아니에요. 당신은 틀렸습니다. 인간은 보편적인 존재입니다. 백인들한테 반대하냐고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음악은 기성 체제에 저항하고 싸울 뿐입니다. ...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라스타파리가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사실을, 그가 우리를,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흑인 모두를 구원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까지 그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해야 할 어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백인들이 흑인들을 향해 그들의 귀를 열 때까지, 그 때까지는 그들을 향한 의심과 의혹 또한 불가피합니다.”(스티븐 데이비스, 302쪽)

밥 말리의 노래 <전쟁>(War)는 속박상태에 있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위해 노래하고 있지만, 이는 형제애를 위한 것이었다. 흑인이 해방되어야 만인이 해방되기 때문이다. “앙골라, 모잠비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우리 형제들을 비인간적 노예상태에 묶어두고 있는 그 수치스럽고 불행한 체제가 무너지고 완전히 분쇄되는 그 날까지/모든 것은 전쟁터야”라고 부르는 밥의 노래는 실제로 짐바브웨의 해방운동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 용기를 주었다.

 

 

평화의 노래

밥 말리와 웨일러스는 사회적 실천에 용감하게 나서는 보컬그룹이었다. 1976년 12월 5일 자메이카 선거를 앞두고 ‘자메이카에 웃음을’이라는 공연을 준비했다. 사실상 이 공연이 선거를 앞두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인민국가당을 응원하는 집회였고, 이를 우려한 세력들에게 밥 말리와 그 가족들, 웨일러스 멤버 모두가 총격 피습을 받기도 했다. 밥은 가슴뼈와 왼쪽 팔을 다쳤지만, 8만 명이 운집한 공연은 그대로 진행되고, 공연 후 바하마로 피신해야 했다. 이 총격사건 이후에 발표된 <유죄>(Guiltiness)에선 “압제자에게 화 있을진저/그들은 슬픔의 빵을 먹게 될 거야/압제자에게 화 있을진저/그들은 슬픔 내일의 빵을 먹게 될 거야.”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밥은 보복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선거에서 인민국가당이 총선에서 압승하였지만 자메이카는 분열되어 내전에 돌입했다. 밥은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걸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다시 자메이카로 돌아와 양쪽 진영의 화해를 요구하는 공연을 1978년 4월 22일 킹스턴 국립경기장에서 가졌다. 이날 두 정당 당수였던 마이클 만리와 에드워드 시가는 무대에 올라와 평화운동을 지지하는 의미로 손을 잡았다.

그해에 미국의 버펄로와 워싱턴 공연 중간에 뉴욕에서 유엔의 아프리카 대표들이 주는 ‘제3세계 평화 메달’을 받았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밥 말리는 “우리가 혁명을 위한 전투를 치를 때 총을 사야 합니다. ... 하지만 음악은 가장 위대한 총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니까요. 음악을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총은 바로 당신의 머리를 날려버립니다.”라고 말했다.

뒤이어 열린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서 밥 말리는 엄청난 박수와 환호 속에서 <밀어붙여>, <떨치고 일어나>, <전쟁>, <대탈주> 등을 불렀다. 이를 지켜본 팝음악 평론가 존 록웰은 “말리의 라스타파리아니즘이 뿜어내는 폭넓은 감화력과 공연의 성공의 근거는 정치와 신비주의가 혼합된 그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지상에서 바라던 천국, <탈출기>를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자메이카나 제3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음악은 현대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상징이 되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고 했다. 실제로 짐바브웨의 독립을 위해 밥 말리는 에티오피아의 마르크스주의 정부가 주최한 대규모 군중집회에도 참석했다. 이듬해 <짐바브웨>(Zimbabew)라는 노래를 작곡하고, 아프리카 전체의 해방을 위한 투사가 되었다. <생존>(Survival)이란 앨범에 담긴 이 노래는 숲속에 머물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해방군과 인민혁명군 병사들에게 새로운 군가를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뿐 아니다. 밥 말리는 아프리카의 신비로운 부루 전통이 녹아든 드럼 연주를 전면에 내세우는 <바빌론 체제>(Babylon System)를 작곡해, 돈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비인간적 산업자본주의를 고발했다.

"우리는 거부할 거야
네가 우리에게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을
우리는 원래의 우리가 될 거야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어 가고 있어
네가 날 교육시킬 수는 없어
기회의 평등 따윈 없으니까
나의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의 자유와 해방에 대해"

1980년 4월 17일에 열린 짐바브웨 독립기념식에 초대받았을 때 밥 말리는 생애의 최고의 기쁨을 느꼈다. 짐바브웨는 영국과 투쟁한 게릴라 조직들이 모두 참여하는 총선거를 치렀는데,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가 이끄는 사회주의 성향의 민족연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짐바브웨 방문과 공연에 들어간 비용은 25만 달러가 넘었는데, 모두 밥 말 리가 부담했다. 밥은 게릴라 주둔지에 잠시 머물던 저녁에 만난 게릴라 전사 에드가 테케레에게서 가장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밥에게 “당신은 지금 고향에 와 있으며, 아프리카인은 아프리카에 살아야 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운명이 나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면서 자메이카로 돌아가지 말라고 제안했을 때, 밥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가슴이 벅차올랐다.

생애의 절정기를 건너가던 밥 말리는 사실상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밥은 미국 브룩클린에서 노동절 행사의 하나로 열리는 이민자들의 연례 카니발 행진에 참여하고, 보스턴과 뉴욕, 피츠버그에서 <이게 사랑인걸까>와 <노력하는 거야>를 불렀다. 급기야 어머니 세델라의 간청대로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 “성 삼위일체의 빛”이라는 뜻을 가진 베르하네 셀라시에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1981년 5월 11일 죽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치료받았던 독일의 이젤스 치료센터에 있을 때 런던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기자가 투병생활에 대해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나의 내면을 더 깊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통해 내 신념을 더 깊이 탐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 강해졌습니다.”

밥 말리의 마지막 앨범인 <궐기>(Uprising, 1980)에 실렸던 <구원의 노래>(Redemption Song)는 밥의 생애와 갈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옛 해적들, 그래 , 그들은 날 잡아 상선에 팔아넘겼지.
몇 분 후 그들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덩이에서 날 꺼냈어.
하지만 내 손은 전능한 신에 의해 강해졌어.
우린 의기양양하게 이 세대 속에서 나아갈 거야.
이 자유의 노래를 부르게 도와주지 않을래?
내가 가진 거라곤 구원의 노래들뿐이거든
구원의 노래들
정신적인 속박에서 너 자신을 해방시켜.
우리 자신 외엔 아무도 우리의 정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어.
원자력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 아무도 시간을 멈출 수는 없어.
우리가 옆에 떨어져 구경하는 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은 우리의 예언자들을 죽일까?
누군가는 그건 단지 일부라고 말하지.
우린 책을 실천해야 해.
이 자유의 노래를 부르게 도와주지 않을래?
내가 가진 거라곤 구원의 노래들뿐이거든
구원의 노래들"

 

 

[참고] <노래로 태어나 신으로 죽다-밥 말리>, 스티븐 데이비스, 여름언덕, 2007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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