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앙은 갈증이 아니라 갈망에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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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앙은 갈증이 아니라 갈망에서 찾아온다
  • 한상봉
  • 승인 2019.11.04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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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 예수-7

그들은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즉시 그분은 안식일에 회당으로 들어가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매우 놀랐다. 그분은 율사들과 달리 권위를 지닌 분으로서 그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그들의 회당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소리쳤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은 우리를 없애러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잠자코 그에게서 떠나가라”고 하시며 꾸짖으셨다. 그러자 더러운 영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그에게 떠나갔다.(마르 1,21-28)

앞으로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는 일
깊은 밤까지 잠 못 들며 뒤채는 일
가슴 설레는 일은 없을지도 몰라.

폭풍같은 운명으로 찾아오는 낯선 사랑의 손님도
이제는 기대할 수 없겠지

그래도 괜찮아.
양지녘 햇볕 한 줌 같은 온기
있는 듯 없는 듯 야트막한 담장 사이로
눈길, 손길 마주치면
다사로이 웃어주는 이웃들이 있으니.

바람 따라 춤을 추거나
씽씽 달음박질을 할 순 없어도
다문다문 이야기 나누며 걸어갈 수 있으면 돼.

남은 인생.

조희선의 <중년 이후>라는 시입니다. 조희선의 시집 <아주 잠시>를 읽으면서 뭔가 한 고비를 넘고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시 중에 ‘따뜻한 말’이란 게 있는데요, “춥지 않느냐는 말에/금방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외로웠던가 봅니다” 하더군요. 

우리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흥분된 사랑보다 잔잔하게 다가오는 친절에 더욱 감동을 느낍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열애(熱愛)보다는 우묵한 손길에서 편안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연인보다 친구가, 사랑보다 우정이 귀한 세월을 맞이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간디처럼 하루에 한 끼만 드셨다는데, 마하트마 간디처럼 52세에 해혼식(解婚式)을 하셨다지요. 이제 결혼을 풀고 친구로 살아가자는 것이지요. “춥지 않느냐”는 한 마디로 충분히 교감을 나눌만한 상대를 만나는 것이지요. 평생을 살아 익숙한 사람을 낯설게 다시 만나 살자는 것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준비 없이 너무 쉽게 예수, 그분의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분과 열애에 빠져 온몸이 녹아버리듯 정신이 혼미해지고, 그분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헛갈리기도 합니다. 그분에게 옴팍 빠져들어 하나가 되고, 그분께 온전히 함몰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없는 상태를 신비체험이라고 하지만, 문제는 남의 체험을 제 것인양 오해하는데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요즘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물의를 빚고 있는 나주 율리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나주 율리아 씨가 신비체험을 했는지 어쩐지 모릅니다. 그녀가 말하는 게 진리인지 거짓인지, 하느님인지 우상인지, 실상인지 허상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시키고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현혹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잔잔하고 고요한 가운데 차오르는 거룩한 갈망이 아니라 기적과 조증(躁症) 상태에 집착하는 인상을 풍기기 때문입니다. 

신비가들의 공통된 특징은 겸손함과 타인을 섬기는 태도입니다. 그가 ‘사랑’이신 그분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성령은 겸손하고 친절하지요. 그분의 성령은 소란스럽지 않고 미풍처럼 부드럽기 때문이지요. 참 신앙은 갈증이 아니라 갈망에서 찾아오는 법입니다. 갑작스런 청천벽력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 속에서 그리운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영화 [Killing Jesus] 중에서

열광적 신앙이 아니라 확고한 신앙을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삼으시고, 많은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하셨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회당에서 미친 사람을 고치시고, 열이 오른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나병자환자와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이분이 사람들을 질병에서 해방시킨 것은 하느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던 모든 환경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불결하지 않으며, 전생에 지은 죄의 앙갚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그들을 누르던 ‘악령’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제 그들은 하느님을 ‘주님’이라 부르게 되겠지요. 결국 만인이 만인에게 ‘형제자매’라 부르는 세상을 일구는 사람이 되겠지요.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는 한사코 이들에게 함구령을 내립니다. 마귀에게도 그분이 누구신지 드러내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 명령하고, 나병이 물러간 이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나 아무 것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분은 겸손하게 당신이 하셔야할 일을 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예전부터 ‘치유성회(治癒聖會)’라는 걸 떠들썩하게 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고, 가톨릭교회 역시 성령기도회나 치유기도회가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 모양새가 영험 있다는 무당을 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당이 작두 위를 걸어가듯이, 나주의 율리아 씨는 살과 피로 변한 성체를 보여주며 자신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래 기적에 의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사적 계시 자체가 문제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열심한 신앙이 문제라기보다, 대부분 신앙의 방향이 그릇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조차 “너희에겐 더 이상 보여줄 기적이 없다”했고, 보여준 기적마저 떠벌이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는데, 오늘날 치유은사를 받았다는 자들과 사적 계시를 받았다는 자들은 대체로 떠들썩합니다. 자신이 특별한 은총 안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 안달하며 기성 권위에 기대어 로비에 열성입니다.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을 때, 그분이 “율사들과 달리 권위를 지닌 분으로서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예수시대의 율사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에 속했으며, 이 율사들은 언제나 구약성서와 조상들의 전통을 근거로 가르쳤는데, 예수는 당신의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기성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당신의 삶으로 복음을 살며 말을 건네셨지요. 그 말이 사람들에게 힘차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지배하거나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당신의 마음을 그저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 나눔의 결과가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열광적 신앙이 아니라 확고한 신앙을 바라셨습니다.

“춥지 않느냐” 말 한 마디로 충분히 아름다운 신앙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전주교구 문선구 신부나, 부산교구 강우성, 강우영 형제 신부, 나주 윤 율리아와 상주 황 데레사 등이 논란거리가 되었고, 이른바 사적 계시나 환시문제가 아니더라도 치유 치병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결국 돈벌이와 세력확장에 나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흔히 신심을 앞세우지만, 현실적 이득을 취하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교주처럼 우상화시킵니다. 특별한 능력이 주는 카리스마가 권력화되는 것이지요.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는 "한 사람의 득세는 다른 사람의 우매함을 필요로 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추종자들을 어린애 취급하고, 영적 거지로 만들며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려 듭니다.

이런 점에서 황 데레사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정호경 신부가 제시했던 기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정 신부는:

(1) 언제 세상이 마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
(2) 입만 떼면 하느님, 성령, 성모를 들먹이지만 가족과 이웃관계를 해치는 사람.
(3) 개인체험(마음의 상처, 보상심리 등이 하느님 이름으로 투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성당과 인연이 없으면 무당의 잡귀잡신의 이름으로 투사된다)을 덮어 놓고 하느님 계시라고 믿고 퍼뜨리는 사람.
(4) 병 치유에만 집착하며 성령, 성모를 들먹이는 사람.
(5) 우리 사회의 '세상의 죄'를 외면하고(불의, 부정, 인권탄압 등) 개인의 깊은 상처, 죄책감(예: 입시생 부모, 낙태를 경험한 여자 등)을 건드려 100일 미사예물, 헌금 등을 요구하는 사람.
(6) 복음정신인 '가난의 삶'을 싫어하고, 하느님, 성령, 성모의 이름으로 돈을 모아 거창한 사업(대개 하느님 계시로 이 사업을 한다고 함)을 하려는 사람.
(7)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엔 별 관심이 없고, 성령, 성모에 대한 개인주의적 신심만 강조하는 사람.
(8) 자유에로 부르시는 주님보다 연옥, 지옥, 형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불안, 공포의 신앙을 조장하는 사람.
(9) 성령, 성모를 들먹이며, 권력자, 부자와 유착된 행동을 하는 사람.
(10)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웃, 세상을 위해 몸바침에서 겪는 고통인데, 개인 고통을 덮어 놓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라고 우기는 사람.

이들은 사이비니까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지옥에 대한 공포심과 죄책감을 빌미로 사람들을 영적 포로로 만드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입니다. 그분이 전한 하느님이 자비는 은근하고 고요하며 성실합니다. “춥지 않느냐” 말 한 마디로 충분히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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