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죽음의 강을 건너 "너로서 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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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죽음의 강을 건너 "너로서 살았느냐?"
  • 유형선
  • 승인 2019.10.2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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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의 어느 뒷골목에서 태어난 사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거리청소부였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했습니다. 다섯 살 때 누나들 따라 교회에 나가면서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해방되고 이듬해 가족을 따라 한국에 왔고 아버지는 소작을 했습니다.

열여섯 살에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돈이 없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야학도 다니고 책도 빌려 보고 글도 썼습니다. 그러나 열아홉 살 무렵 앓기 시작한 결핵으로 결국 온몸이 망가졌습니다. 수년간 극진히 간호해주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떠난 이듬해, 아버지는 남동생만이라도 결혼을 시켜 집안의 대를 이어야겠다며 1년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강아지똥],  권정생 지음 |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2017년
[강아지똥], 권정생 지음 |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2017년

이른 새벽 옷 보따리 하나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거지가 되어 노숙을 했습니다. 배가 고프거나 각혈을 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차라리 어머니 곁으로 가려고 몇 번이나 인적 드문 산속에 자리를 봐두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40일간 단식한 예수님도 생각나고,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 아모스, 엘리야, 팔려간 요셉, 요한 세례자와 바오로 사도도 생각났습니다. 건강이 극심히 악화되어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고, 그해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듬해 스물아홉 살, 한쪽 콩팥과 방광을 제거했습니다. 의사는 2년은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신춘문예 응모였습니다. 작은 교회 종치기가 되어 흙담집에 기거했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온 몸을 던져 글을 썼습니다. 수년 후,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모집에 당선됐습니다. 한국 그림책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 하느님을 만나는 날, 우리가 마주할 질문은 ‘왜 다른 사람처럼 살지 못했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왜 마더 테레사가 아니었느냐?’, ‘왜 안중근이 아니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때 ‘너로서 살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창조물은 생산물과 달리 모두 저마다 서로 다른 독자성을 지녔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창세 3,9)
 

* 한국천주교 수원교구 주보 (2019년 10월 20일)에 게재한 글입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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