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연모하는 자여, 자유롭게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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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연모하는 자여, 자유롭게 사랑하라
  • 한상봉
  • 승인 2019.10.1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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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 예수-4

그리고 곧 영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냈다.
그분은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12-13)

"그대가 별이라면
저는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이고 싶습니다
그대가 노을이라면
저는 그대 모습을 비추어주는
저녁하늘이 되고 싶습니다
그대가 나무라면
저는 그대의 발등에 덮인
흙이고자 합니다
오, 그대가
이른 봄 숲에서 우는 은빛 새라면
저는 그대가 앉아 쉬는
한창 물오르는 싱싱한 가지이고 싶습니다"

이동순 시인의 <그대가 별이라면>입니다. 이 사랑을 어찌해야 할까요? 한사코 그대 옆에 뜨는 작은별이 되고, 그대 모습 비추는 저녁하늘이 되고, 그대 발등에 덮인 흙이 되고, 그대가 앉아 쉬는 싱싱한 가지이고 싶은 게 연모(戀慕)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는 세례사건을 통해 하느님이 주시는 조건없고 한정없고 가차없는 사랑을 몸으로 느꼈지만, 정작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테지요. 왜 하필 사랑인가, 깊은 곳에서 묻고 싶었을 것일 테지요. 그래서 광야로 갑니다.

광야는 ‘땅끝’이라고 말할 만큼 살벌하고 황량하고 가차 없는 곳입니다. 관목과 가시나무가 듬성듬성 돋아 있을 뿐 생명의 거처라고 말하기 힘든 곳입니다. 그래서 자크 뒤켄은 “마치 악마와도 같다”고 표현했지요. 산성화된 갈색땅, 그 끝에 사해(死海)가 있고, 그 바다는 모압산을 비춘 채 영원히 침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낮에는 끔찍한 더위가 찾아오고, 밤이면 민둥산의 깍아지른 절벽도 숨을 멈추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다광야에선 언제나 불안과 공포가 엄습합니다.

이 때문에 광야는 수행자들에게 고독과 명상의 장소가 되기도 했지만, 혁명가들에겐 피난처를 제공하는 요새이기도 했지요. 그들은 아무도 쉽사리 찾아들지 못하는 이곳이 오히려 안전지대였던 셈입니다. 바로 이곳에 에세네파 사람들은 수도원을 세워 엄격한 생활을 했답니다. 1947년 극적으로 발견된 사해문서에 따르면, 이곳에 에세네파의 쿰란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금욕생활과 하느님의 심판 예고 등 세례자 요한의 사상과 닮은 점이 많았습니다. 물론 요한은 에세네파의 엘리트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말입니다.

 

모레토 다 브레시아_광야에서의 그리스도
모레토 다 브레시아_광야에서의 그리스도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광야에서 예수가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다고 짤막하게 전합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그 유혹이 무엇이었는지 덧붙입니다. 사십일을 단식한 예수에게 먼저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고 주문합니다. 그 다음 성전꼭대기에 데려가 뛰어내려보라고 다그치죠. 천사들이 네 발을 손으로 받쳐 주리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사탄에게 절을 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노라 약속합니다.

첫 번째 유혹을 두고, 자크 뒤켄은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는 마술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소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녔다. 복음서를 보면 나중에 예수도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한다. 하지만 늘 망설인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당시 유다인들이나 요즘 사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굶주린 자에겐 빵이 절박하고, 지금 병약한 자들은 치유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강조하고, 치유은사를 베푼다고 사람들을 모읍니다. 사정이 딱한 사람들의 숨통을 쥐고 따라오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지요. <희망의 인문학>이란 책을 쓴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줄까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단,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이 훨씬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이 매일 겪는 굶주림과 병고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가난한 이들 중에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의 가난과 병고 자체에만 마음이 사로잡혀 있으면, 그동안 우리는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조종당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지요. 사실상 도움받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도 부자와 의사, 종교인들에게 주눅 들어 굽신거리며, 때로는 영혼마저 그들에게 저당 잡힙니다.

예수는 하느님 안에 머물며 충분히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에게 가장 큰 관심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먼저 사랑하였으니, 나도 그분만을 사랑하여 그분이 “아들아!”하고 부를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빵은 필요하지만 빵에 사로잡히면 빵 때문에 망합니다.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허세를 부리는 일입니다. 특별히 성직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유혹인데, 사제들은 자칫 자신이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양 행세하기 쉽습니다. 먼저 수행하고 덕을 닦아야 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하는 주교도 있었습니다. “내가 명령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더라도 순종해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순종했으니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고, 잘못된 명령은 하느님이 알아서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니 일단 평신도들은 사제들에게 순종해라”하고 말입니다. 사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곧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는 이를 두고 “너희 하느님이신 주님을 떠보지 말라”고 말합니다.

위엄에 찬 복장과 위엄에 찬 목소리, 위엄에 찬 예식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엄을 갖추는 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 말 한 마디가 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가고, 내 그릇된 행동 하나로 많은 영혼이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천사의 시중을 받는 지도자가 되러 온 게 아니라, 세상이 타박하는 가련한 인생들을 섬기는 종이 되려고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 진심(眞心)을 시험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예수가 당시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았듯이, 예수는 먼저 권력과 재산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려야 했습니다. 희생에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다릅니다. 그리고 맘몬에 대한 추구는 언제 어디서나 우상숭배입니다. 재산 그 자체야 가치중립적일 테지만 재산에 얽매이는 순간, 그 탐욕이 우리의 영혼을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란 말보다 더 위험한 신념은 ‘신앙을 가지면 부자 된다’는 유언비어입니다. 이런 생각은 살아서 부자, 죽어서 구원이라는 공식을 낳기 때문입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빈민지역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마누엘이라는 사제가 있었지요. 그런데 한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내가 사제가 아니었더라도 지금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했을까? 내가 만일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더라도 지금처럼 고통을 감당했을까? 만약 내가 성경의 말씀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다면 나의 사랑은 불순하다’고 말입니다.

그 사제는 아무런 전제 없이도, 하물며 영혼의 구원이라는 보상이 없더라도 사랑할 수 있어야 순수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고심하던 마누엘 신부는 그 뒤로 사제생활뿐 아니라 신앙생활마저 접어둔 채 무신론자가 되어 평생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마누엘은 죽음에 임박해서 이렇게 마지막 기도를 했답니다. “주님, 제가 무신론자로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누엘 신부는 그 어떠한 보상도 마다하고 사랑했습니다. 사실 그는 전제 없이 하느님만 사랑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에게 사탄의 유혹이었고, 그래서 예수처럼 “물러가라! 사탄아.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에게 엎드려 절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가 유다광야에서 경험한 것은 ‘결여된 사랑’이었다”고 엔도 슈샤쿠는 <예수의 생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해와 광야를 둘러싼 쿰란공동체뿐 아니라 세례자 요한조차도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와 하느님의 분노를 앞세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삭막한 광야로 둘러싸인 유다 땅과 다르게 비옥한 토지에 둘러싸인 채 일상으로 가난을 경험하고 있던 갈릴래아 출신 예수는 ‘어머니다운 하느님’이 세상에 더 필요하다는 것을 광야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모든 유혹을 넘어서는 사랑, 그래서 두려움 없는 사랑, 죄를 묻기 전에 먼저 손을 잡아주는 사랑이 그분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훗날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연모하는 자는 이와 같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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