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대 신부 "Our body is social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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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대 신부 "Our body is social body"
  • 김정대 신부
  • 승인 2019.08.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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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해고자 김용희님을위한 생명평화미사 강론: 김정대 신부

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1945년 오늘은 조선인들이 일제 강압 통치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해방 전 일제는 한반도의 자원과 인력을 수탈했으며 특히 태평양전쟁 동안 더욱더 악랄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강제 노역과 전쟁에 동원하였고 젊은 여성들, 심지어 어린 소녀들까지 일본군의 성노예로 착취하였습니다.

1945년 오늘 우리는 해방이 되었지만 이날부터 한반도는 분단이 시작되었고, 친일파는 다시 기득권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분단을 거부하고 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빨갱이라는 낙인을 씌우고 불이익을 주었으며 심지어 그들을 학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잔인한 친일 기득권 세력은 일제를 위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던 사람들과 일본군의 성노예로 착취당했던 여성들의 고통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회적 수치를 주어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 매여 1940대 초반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그들의 아픈 상처는 그들이 현재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게 하고 현재를 고통 속에 살게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거의 아픈 기억이나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에 들어갔지만 경찰특공대에 의해서 강제 진압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주변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그들의 억울한 처지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진압군에게 폭행 당했던 사람들,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지지하러 온 김용희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용희님의 삶은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삼성이라는 기업에 입사하면서 꼬이기 시작했고, 가정은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의 삶 역시 거의 20년 전에 멈춰 섰습니다. 그는 스스로 초일류 기업이라고 선전하는 삼성이 만들어낸 잔인하고 비극적인 한 인생입니다.

 

사진=신배경
사진=신배경

한 2년 전에 저는 여성 신학자들의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날 주 발제자는 숀 코플랜드라는 미국의 흑인 여성 신학자였는데, 그의 강연 중 “Our body is social body.”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몸은 사회적 몸이다. 즉 우리의 몸 안에 역사와 문화, 제도, 사회가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며 저는 일본군 성노예로 착취당해서 삶이 1940년 전후의 기억에 멈추어 선 할머니들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와 경험은 우리의 몸에 그대로 내재(구현)됩니다. “신체는 인간 존재를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형상화합니다.” 즉 우리의 몸에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뒷받침해주는 사회 구조와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역사 안에서 억압적인 사회 환경은 그대로 한국인들에게 내재화되어 잘못된 ‘사회적 몸(신체)’을 만드는데 기여했습니다. 한국인들의 ‘사회적 몸(신체)’에는 일그러진 문화, 사회 그리고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몸은 육체가 인식하는 방식을 제한합니다.” 억압적인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한국인의 ‘사회적 신체’는 그들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자율을 검열했고 사람들을 억압적인 문화와 제도에 순응하게 했습니다. 한국 문화는 어떤 면에서 매우 폭력적이고 경직된 면이 있습니다. 이런 한국 문화의 경직성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를 강요합니다. 획일화에 길들여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거나 가치를 따르지 않고 외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순응하며 삶을 살고 외부의 가치를 따릅니다.

이런 경직된 문화 안에서 특별히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눈에 띄는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구조적인 악을 거부하기 보다는 순응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의심하지 않으며 권력에 종속된 사람들이 “악의 평범성”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나치에 부역했던 ‘아이히만’이란 사람에 대한 전범 재판을 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단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를 중대한 범죄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한 것은, 멍청하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가 순전히 생각이 모자란 것입니다. 이 생각의 모자람이 모아진 모든 사악한 본능보다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의 평범성’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누가 억압적인 문화와 제도에 순응하길 거부한다면 그는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장 노동현장에서 노동조건의 부당함과 노동 인권 유린을 알렸던 사람으로 전태일 열사를 비롯해서 많은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약속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그 약속을 이행해줄 것을 요구하며 대통령과의 만남을 요구했던 비정규직 노동자 100명, 그 중에 한명이 김용균 청년노동자였습니다. 그는 비록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몸이 분리되어 죽음을 당하였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잘못된 제도에 순응하길 거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김용희님도 삼성이라는 폭력적 기업 구조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50일 가까이 이어온 단식 저항은 접었지만 오늘로 거의 70일 가까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회적 몸(신체)이 요구하는 대로 세상을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귀한 몸이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의 목소리를 낸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몸이 민감하게 인식될 때(우리의 육체적 몸이 느끼는 것을 민감하게 인식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됩니다. … 그리고 이 목소리는 사회의 일부로서 우리의 목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김용희님, 당신의 억울함을 우리는 이해합니다. 삼성은 변해야 하고 당신께 사과해야 합니다. 당신의 작은 몸짓은 우리 사회의 일부로서 우리의 목소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함께 이 작은 목소리에 연대하여 우리의 목소리를 만듭시다.

그리고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에 관해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성모님의 강인함에 대해서입니다. 사실 성모님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당신 몸에서 키웁니다. 이 생명을 잉태하여 키운다는 것은 인간성의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일 겁니다. 그런데 생명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강인한 측면일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 찬가는 바로 성모님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사실 그 당시 사회적 몸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 보다는 종교 지도자들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했을 겁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하느님이 주신 바로 그 몸이 느끼는 대로 세상을 보았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에 대해서 제가 상상하는 것은 사회화된 인간성이 아닌 바로 통합된 약함과 강인함이 올바른 우리 인간성으로서 썩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약한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과 같은 것입니다.

저기 위에 철탑에서 외로이 싸움을 하고 있는 김용희님은 다름 아닌 강인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해야할 것은 약함 혹은 부드러움을 끌어 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의 강함에 지지를 보내도록 합시다. 또 하느님 안에서 그가 부드러운 인간성도 잘 통합하도록 기도합시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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