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길은 나만의 내밀(內密)한 지성소이다
상태바
숲 길은 나만의 내밀(內密)한 지성소이다
  • 박철
  • 승인 2019.08.12 14: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철 칼럼

부산에 온지 어언 16년째이다. 횟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사람이 어디서 살던지, 자기가 사는 터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신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 내가 이 자리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는가를 스스로 캐물어야 한다. 또한 나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거듭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스스로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에 있든지 마찬가지이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마주치는 삼간(三間)의 접점에 왜 내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묻지 않고서는 나는 확인되지 않는다.

내가 부산에 와서 자주 가는 곳은 봉오리산이다. 야트막한 산이다. 숲이라고 해도 좋다. 산속 나무숲에 들어가 있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 숲 속에 나를 맡기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세속의 모든 욕망이 사라진다. 숲 속에 들어가 있으면 가장 솔직한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의 실체를 거울 들여다 보듯이 알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각자들이 산으로 들어갔는가 보다. 숲에 들어가 자연을 통해 숲의 음성을 들으려면 침묵하는 것이 좋다.

 

걷기 명상은 발을 통해 땅을 느껴볼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기도 하며, 자신과 자연을 관찰하고 성찰하기 위한 길이라 고도 할 수 있다.
걷기 명상은 발을 통해 땅을 느껴볼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기도 하며, 자신과 자연을 관찰하고 성찰하기 위한 길이라 고도 할 수 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이 땅에 온 순례자란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순례자란 무엇보다 먼저 발로 걷는 사람, 나그네를 뜻한다. 걷기란 신에 대한 항구적인 몸 바침이며 육체를 통하여 드리는 기나긴 기도이다. 봄철이든 여름철이든 상관없이 륙색을 짊어지고, 가을이건 여름이건 비를 맞으며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혼자 걷는다는 것,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보다 더 큰 행복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끊임없이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걷기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려면 혼자 걸어야 한다. 혼자 걸으며 세계의 침묵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혼자 걸을 때 자연은 우리에게 말하기보다 듣기의 자질을 더 키우게 한다. 세계에 대한 겸손한 경청자로 다시 태어난다. 걷기와 침묵은 나를 구원해 주었다. 걷기와 침묵은 속도를 늦추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준다. 침묵은 단순히 내가 입을 다물 때 생기는 말의 부재가 아니라 침묵은 총체적이면서 독립적인 현상으로, 외적인 요소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노영희'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운동이란 것이 끝내 허무와 환멸을 그에게 안겨다 주었다. 그 뒤로 사람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은둔하며 살았다. 일주일에 두 번 가량 산을 오르면 혼자 생각에 잠겼다. 3년쯤 된 어느 날, 그는 너무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분명 말을 건 것은 꽃이었다. 그때의 희열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새와 대화를 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냥 혼자 소리거니 했다. 그러나 아니다. 실제적인 대화이다. 우리는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다른 피조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덮어져 있는 더러운 것들을 제하여 버린다면 이 자연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며 우리들의 친구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이다. 그 깨달음은 바로 신비이며 경외감이다.

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 속의 죄(罪)이며, 세속적인 욕심이다. 세상적인 지식들이 우리를 덮어씌우면 우리는 장님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는 말과 글의 포화상태에서 살아간다. 짐짓 나의 글과 말이 또 하나의 공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산과 바다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자연인이다. 아직 깊은 깨달음이나 영성(靈性)의 깊은 세계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내가 가야 할 길을 자연을 통해 배운다. 모름지기 자연은 삶의 교과서이다. 나는 산과 숲에서 영감을 받는다.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에서도 하느님의 생명의 신비와 숨결을 느낀다. 마음을 모으고 가만히 있으면 자연이 주는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뭇잎 팔랑거리는 소리, 불규칙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 청설모가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소리, 샘물 떨어지는 소리, 딱따구리 소리, 사람들 발걸음 소리 등등.... 더 깊이 집중하면 자기 내면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나무 십자가를 한손에 쥐고 “여기는 주님 땅!” “한반도의 평화를!” 암송하며 천천히 걷는다.
나무 십자가를 한손에 쥐고 “여기는 주님 땅!” “한반도의 평화를!” 암송하며 천천히 걷는다.

오늘도 나는 숲길에 들어섰다. 한여름 날씨답게 햇살이 강렬하다. 숲길에서 만나는 가장 다정한 벗은 나무들이다. 나무가 주는 교훈을 마음에 새긴다. 숲에 사는 나무들은 옮겨 다닐 수가 없는 처지이니 별다른 사건이 없는 한 옆자리에 함께 자라는 나무와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들의 숙명은 수많은 문제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하나의 공간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데 있다. 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나누고, 양분을 흡수할 땅을 나누고, 서로의 가지와 가지가 만나는 수직의 공간도 나눠야 한다. 그래서 이동할 수 없는 존재인 나무가 옆의 나무들과 다차원적으로 공간을 나누며 해로하는 방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대부분의 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벌린 채 햇빛을 쐬며 살아간다. 이는, 아마 긴 시간 동안 터득한, 광합성에 가장 효율적인 공간 활용법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옆 나무의 가지를 가리기도 하고 옆 나무의 가지와 직접 부딪히기도 한다. 특히 좁은 공간을 나눠야 하는 나무들은 그 처지가 더욱 곤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숲에는 그 한계를 놀라운 관계로 승화하여 우리 인간들을 꾸짖는다. 그런 점에서 나무는 나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니 산이나 숲을 걸을 때는 겸손해야 한다. 가급적 말도 삼가야 한다. 비개인 후, 많은 지렁이들이 길가로 소풍을 나왔다. 밟힐까봐 조심해서 숲길을 걷는다.

 

나는 숲에 들이는 행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나만의 내밀한 지성소라고 생각한다.
나는 숲에 들이는 행위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나만의 내밀한 지성소라고 생각한다.

사족(蛇足)

소나무기도 : 이해인 수녀님이 어느 모임에서 “나무가 손을 모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만유 위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면,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말은 쓰지 않을 것이다. 봉오리산 끄트머리 힐링동산(내가 붙인 이름) 한 바퀴가 600미터이다. 오솔길 사이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면서 "하느님, 이 부족한 사람을 어루만져주소서!"하고 기도하며 돌면 20분쯤. 그렇게 세 바퀴를 돌면 1시간 걸린다. 등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내 안에 하느님의 영이 충만해짐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 이 부족한 사람을 어루만져주소서."

박철
좁은길교회 목사. 탈핵부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부산예수살기상임대표.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