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는 그저 '듣기 좋은'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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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리는 그저 '듣기 좋은' 소리인가
  • 유대칠
  • 승인 2019.07.29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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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42]

 

어쩌면 그냥 듣기 좋은 소리다. ‘사회교리’ 말이다. 100여 년 전 1891년 교종 레오 13세에 의하여 발표된 사회교리 문헌인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에선 노동의 존엄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100여 년 전 글임을 생각하면 임금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구체적입니다. 임금은 고용주와 노동자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하여 결정 나야 한다. 고용주가 자가 욕심에 따라서 이렇게 줄 것이니 이렇게 받아라 이렇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인격을 가진 인격체로 고용주와 노동자의 자유로운 합의로 결정되어야 한다. 노동자는 합의 없이 주는 대로 받는 존재가 아니다. 한마디로 노예가 아니다. 동등한 사람이다. 고용주의 부유함과 욕심을 위해 사용되는 노예가 아니다.

「새로운 사태」는 적절한 ‘임금’은 노동자가 최소한의 안락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고 적고 있다. 아무리 적게 주어도 안락한 삶을 유지할 정도는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2019년 최저시급은 8,350원이란다. 누군가는 이것도 많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주 40시간 노동해도 1,745,150원 정도일 뿐이다. 정말 양심대로 생각해 보자. 이 정도의 소득으로 안락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가? 200만원도 되지 않는 이 정도의 돈으로 말이다. 가톨릭교회는 이미 100여 년 전에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가톨릭교회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분노하고 있는가?

「새로운 사태」 이후 1931년 교황 비오 11세가 발표한 「사십 주년 (Quadragesimo Anno)」을 보자. 더욱 더 구체적이다. 임금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해 충분해야 한다. 물론 기업의 형편도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는 쉽지 않다. 구조적으로 기업의 고용주에 비하여 노동자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약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노동조합은 절실하다. 「사십 주년」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또,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발표한 「노동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역시 노동자들의 결속을 지지함과 동시에 이를 위해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분명히 했었다.

“이 모든 권리들은 노동자들의 자기 보호를 위한 필요성과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권리, 즉 단결권을 갖게 한다. 여러 직업 분야에 고용되어 사람들의 생존 권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제단체를 형성할 수 있는 권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체들을 노동조합이라 부른다. 노동자들의 생존 권익은 어느 정도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통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러 노동 형태와 직업 형태는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이러한 단체들은 이를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노동하는 인간」 20항)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 권익을 위한 단결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단결권을 위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노동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참 좋다. 듣기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러했는가? 교회 밖 부조리에 분노하지 못한 것은 게으름 혹은 교회 성장 중심주의에 바빠서라고 하자. 이 조차 이해할 수 없지만, 하여간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교회 안 부조리는 왜 그냥 넘어가는가?

한 때 천주교 대구대교구와 인천교구에서 들려왔던 노동조합 탄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혹시 우선 교회를 성장시킨 후 노동조합을 돌아보자는 생각이었는가? 이 역시 그 웃긴 낙수효과의 교회 버전인가? 우선 우리 교회가 부유해지면, 교회 기관(사업체) 안에 있는 힘없는 노동자들도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뭐 이런 자기 합리화에서 나온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욕심 때문인가? 사람 사는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니 우선 챙길 수 있을 때, 더 많이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일어난 것인가? 이젠 더 이상 교회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지만, 그 믿음에 힘이 생기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더불어 살자’는 말은 쉽다. 참 쉽다. 그러나 그리 살기는 어렵다. 고난 속 힘들어하는 이와 더불어 있기보다 돈과 더불어 있기가 편하다. 그게 나에게 더 좋아 보인다. 노동자의 아픔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저렇게 되지 말자는 마음일까? 자녀에게 저런 사람처럼 되지 말라 말하면서 그들과 자신들 사이 선을 긋고 돌아서서 너무나 당연히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 노력한다.

우선은 성장하자! 우선은 더 큰 부자가 되자! 이렇게 산다. 그런데 그런 삶은 절대 종교의 미덕이 될 순 없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임이 종교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나쁜 사업가다. 그냥 사업가도 아니고, 나쁜 사업가다. 철저하게 홀로 잘 살려는 나쁜 사업가일 뿐이다. 노동자를 그저 자기 부유함의 수단으로 여기는 나쁜 사업가다. 말 다르고 삶 다른 나쁜 사업가다.

‘더불어 있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너를 남으로 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너의 아픔과 기쁨을 남의 아픔과 기쁨으로 두지 않고 우리 가운데 나의 아픔과 기쁨으로 두겠다는 말이다. 과연 고용주로 있는 교회는 노동자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이라며 여기며 안아 주었는가? 한숨이 나온다.

지금 한 사람의 노동자 김용희 님이 강남역 교통 폐쇄회로 관제탑에서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그냥도 아니다. 단식을 하면서 말이다. 이 더운 날씨에 말이다. 긴 이야기는 뒤로 하자. 중요한 것은 노동조합을 무력화 하려는 이들이 이 땅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로 인해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이 땅에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하는 인간」 속 그 좋은 이야기가 한국 가톨릭교회의 실천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면, 이 슬픈 비극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노동하는 인간」 속 그 소중한 가치들이 신자들에게 일상이었다면, 노동조합의 문제와 노동자의 인권 그리고 소득에 대한 이런 저런 슬픈 담론들이 지금처럼 슬펐을까? 만일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이 교회와 신도들에게 일상이 되어 있었다면, 이 사회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사회교리가 듣기 좋은 이야기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불어 있음이다. 또 더불어 있는 교회와 신도다.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끼리만 잘 살자는 그런 우리가 아니라, 아프고 힘든 이들의 옆으로 달려가 그 아픔이 남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이라 안아주며 함께 울고 분노하는 그 더불어 있음 속 우리가 필요하다.

아파하는 이와 더불어 있는 ‘우리’, 약한 이와 더불어 있는 ‘우리’ 말이다. 어쩌면 바로 이런 더불어 있음이 교회의 일상이 될 때, 사회교리의 그 좋은 이야기들도 그저 좋은 이야기만은 아니게 될 것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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