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카르댕 추기경 "노동자 한 사람을 선봉투사요, 동료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는 사도"
상태바
조셉 카르댕 추기경 "노동자 한 사람을 선봉투사요, 동료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는 사도"
  • 김정대 신부
  • 승인 2019.07.26 21: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창립자 조셉 카르댕 추기경 기념미사 강론

오늘 카르댕 추기경을 기념하는 미사인데, 저는 이 강론을 통해서 제가 어떻게 JOC(지오세) 회원들과 동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동반했던 시간과 경험을 먼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 경험 안에서 내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카르댕 추기경의 삶을 통해서 그 고민을 어떻게 정리했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왜 우리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하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노동문제는 무엇인지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제가 JOC(지오세)회원을 만난 것은 1992년 4월이나 5월 쯤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해 2월에 예수회 수련원에서 첫 서원을 하고 신학원으로 옮겨 철학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신학원에서는 비록 철학을 공부하는 연학수사들의 주 사도직은 연학이지만 현장성을 갖게 해주기 위해서 일주일에 한 번 외부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봉사하는 사도직을 권장했습니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교회주소록을 열어서 이런 저런 단체를 찾아보고 어떤 단체인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관심을 가진 것이 가톨릭 노동청년회였습니다. 사실 제가 수도생활을 하게 된 계기도 직장 생활 중에 경험한 노동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톨릭노동청년회에 관심이 갔고, 연합회 지도신부와 연락을 해서 구로본동의 팀 회합에 매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팀 회합은 복음 나눔, 생활 나눔 등 한 달을 주기로 매주 다른 주제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기억에 나는 것은 생활 나눔입니다. 이는 “관찰-판단-실천”이라는 사회 분석 방법론을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동에 접목시킨 영성 식별 방법론입니다. 즉 지오세 회원들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목격하고 복음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복음적 관점에서 어떻게 실천할지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지오세 회원들의 영성은 추상적이지 않고 신심활동이 아닌 노동 현장과 사회 제도 그리고 노동자들을 변화시키는 활동적 영성입니다.

이런 활동은 각 개인에게 자기 자신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지오세 회원들은 비록 교육 수준이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늘 당당하고 자신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당함과 자신감이 지오세 회원들로 하여금 착취의 현장에 있는 다른 노동자들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의 예: 윤순녀 수산나 선배의 활동 (버스 안내양, 성탄 부활절 초대, 그리고 그들의 노동문제를 관찰하게 된 것이 회사에서 안내양들이 차비를 삥당을 친다고 운행 후 안내양들의 몸을 수색하며 성적 수치심을 주는 것을 사회 문제로 알림, 지학순 주교는 안내양들의 삥당은 무죄라고 노동 착취를 지적함)]

 

나의 사도직에 임하는 자세: 내가 노동자에게 적응하기

팀 회합은 늘 늦게야 끝났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이다 보니 모임 시간은 늘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늦게 끝날 수밖에 없고 또 뒷풀이까지 하면 더 늦어지곤 했습니다. 문제는 수도자인 저였습니다. 공동체에서는 귀가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까지 들어오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서두르곤 했는데 심지어 다른 팀원에게까지 서두르도록 강요하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는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도직이란 타인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인데 내가 타인에게 나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요구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동체의 원장 신부님께 특별히 사도직에 나가는 날은 귀가 시간을 지킬 수 없음을 이해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구로본동에서 지오세 회원들과 팀 회합을 하며 지오세 정신과 전통 그리고 회원들과 익숙해 지고서 1994년부터는 지오세 전국 본부에서 평신도 회장의 협력자로 1년 반 동안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안타까운 일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동이 정치적인 활동인가 순수하게 종교적인 활동인가의 인식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적인 활동과 정치적인 활동 논란

저는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동을 종교적인 범위에 가두어 놓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신심단체가 아니라 액션단체입니다. 그리고 이 단체의 활동은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서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제도를 개선하는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당연히 정치적인 활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의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정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은 노동자들의 정치성과 계급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동자를 정치성과 계급성이 없는 근로자로 불렀습니다. 근로자란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노동절이 아닌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4년에 비로소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의 싸움의 결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성과입니다. 사실 기득권자들은 부지런히 일을 하는 근로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은 노동자들을 위한 날이 아니라 노동자를 착취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외면하는 정부의 노동 정책을 홍보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오세 회원들은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하게 된 것을 너무 기뻐했고 그 기념식 행사에 지오세 깃발을 들고 나가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회원들 내부에서 깃발을 들고 나가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지오세 활동을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활동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대중 집회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정치적인 활동이라고 보고, 이런 정치적인 활동에 지오세 회원이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이 논란은 깃발을 들고 나가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청년노동조합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로 

노동자들의 정치성과 계급성에 관해서는 까르딘 추기경의 삶과 정신을 보면 명확합니다. 까르딘이 태어나기 전 유럽 사회는 산업혁명(1760-1820)의 기술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을 통해서 엄청난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공업화로 인하여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을 촉진했고, 전통적인 신분 체계를 붕괴시켰습니다. 또 노동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노출 되었고, 심지어 아동 노동이라는 비상식적인 상황도 발생하였습니다.

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교회로 상징되는 제도 및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848년 <공산당선언>으로 혁명적 사회운동은 교회를 적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라는 교황 회칙을 반포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사회 문제에 관한 분석과 해결책을 제시한 첫 번째 회칙입니다.

카르댕은 교황 회칙이 반포되기 약 10년 전인 188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일할 생각을 하고 사제가 되어 청년 노동자들의 조직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는 1915년부터 노동청년 조직을 브뤼셀 전역에 확대하여 마침내 1920년 "청년노동조합"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시 벨기에 교회의 청년연합회는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청년노동조합을 청년연합회에 소속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카르댕은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는 청년연합회 안에서는 청년노동조합의 노동청년들이 자율성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청년노동조합이 교회의 일치를 깨뜨린다고는 이유로 청년노동조합을 해산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카르댕은 교황 비오 11세를 만나 청년노동조합의 해산 문제를 제출하여 교황의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에게 “이제야 마침내 대중에 관해 말을 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가톨릭일꾼 http://www.catholicworker.kr)고 반가워하며 카르딘의 노동청년운동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1925년 가톨릭노동청년회라고 이름을 바꾸고 200명의 대의원이 모여 창립 평의회를 열어 정식 발족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르댕이 처음 생각했던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청년 노동조합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신심단체가 아니라 다른 노동조합 활동과 같이 계급성과 정치성을 갖는 운동입니다. 카르댕은 이렇게 말합니다.

“반(反)사회주의와 반공주의로는 노동자 계급을 구하고 교회에서 멀어진 민중을 다시 교회로 이끄는 데 충분치 못하다. 마르크스주의 안에는 하나의 진리의 핵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을 사람들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즉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에 세계를 구원할 임무, 메시아적 사명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이다. 공산주의를 논하는 교황의 회칙은 문제를 부정적인 면에서만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내용이 공산주의를 말살하는 방법만 찾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노동자 계급의 사명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가톨릭일꾼 http://www.catholicworker.kr)

카르댕은 마르크스의 사회분석 가운데 노동자 계급이라는 사회적 계급성에 대해서 인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동자 계급에 세계를 구원할 임무, 메시아적 사명을 부여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성과 노동자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평신도 사도로서의 활동이 합해진 것입니다. 그는 또 지오세 활동의 계급성과 정치적 활동을 비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소박한 노동자 한 사람을 선봉투사요, 동료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는 사도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단순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작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시고 크고 오만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감추셨으니 감사하다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또 역사를 보십시오. 작은 이들이 교회를 키워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작은 이들의 부요함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가톨릭일꾼 http://www.catholicworker.kr)

사실 지오세 회원들은, 마치 사제가 매일 미사를 봉헌하듯, 동료 노동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작업대를 제대로 삼아 자신을 봉헌하는 활동을 하는 사도들입니다.

 

 

왜 우리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는 무엇인가?

저는 노동이란 인간이 생활에 필요한 재료를 생산하는 인간의 활동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고 이렛날에 쉬셨다.” (창세기 2,2) 또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손수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빗으셨고 (2,7),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습니다(2,15).

따라서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활동과 맞닿아 있고 신성합니다. 저는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1992-1995년 가톨릭 노동청년회 회원들의 활동에 동반하면서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노동청년은 세상 모든 금을 합친 것 보다 더 귀하다”는 카르댕 추기경의 말을 단순히 믿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철을 깎고 물건을 만드는 노동을 하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늘 당당했으며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회의 친구들에게 JOC 회원들에 대해서 말하였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노동은 신성하다고 힘주어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친구 중 한 사람은 저에게 “직업에 귀천이 없고 노동이 신성하다고 하는데, 실제 우리 사회 문화 안에서도 그렇다고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저는 잠시 멈칫했습니다. 물론 그는 노동이 신성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을 꼬집은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우리 사회의 노동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문화는 노동을 경시하는 문화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노동은 인간적이며 동시에 창조적인 하느님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고귀한 노동으로 인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그들의 고귀한 노동의 의미를 무시하고 노동자도 하찮고 불필요한 존재로 여깁니다.

비정규직과 같은 형태의 노예노동은 존재하면 안 된다 

한 사회가 어던 사회인지는 그 사회에서 누가 배제되는가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노동인구, 즉 임금 노동자수는 약 2천만이 조금 넘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인구의 40%에 해당합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을 천시하므로 40%의 구성원이 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33%(661만 4천명, 2018, 10월 통계)가 비정규 노동자들인데 그들은 배제에 배제를 겪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노동의 고귀함을 인정한다면 특별히 비정규직과 같은 형태의 노예노동은 존재하면 안 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작년 11월 말 경에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을 운송하는 콘베이어벨트를 운전하는 청년 노동자 김용균이 콘베이어벨트에 몸이 끼어 몸이 분리되어 죽었습니다. 그 현장에 찾아온 그의 어머니는 자식이 그런 환경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식의 동료 노동자들에게 너희들 여기서 다 나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 그건 인간의 노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과로사로 쓰러져 죽는 집배원 노동자들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풍요롭게 쓰는 전기와 안락하게 앉아서 받아 사용하는 물품들이 누군가의 희생 더 나아아가서 죽음을 담보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고귀한 인간성을 위해서라도 인간 노동의 고귀함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인간 노동의 고귀함이 존중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들의 노동의 댓가를 정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이며 그들이 노동하는 곳의 노동 환경을 안전하고 인간적인 환경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사회의 절박한 노동문제는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전 고용 형태의 노동입니다. 이 비인간적인 비정규직 제도를 개선하지 않는 한 우리는 고귀한 인간성을 잃고 스스로 비인간화 될 것입니다.

 

여전히 노동사목 필요해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노동사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는 지오세 회원들의 평신도 사도직은 너무 빨리 그 수명을 다 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노동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할 노동자 사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교회가 가난한 노동자들을 현장에서 깊이 만나는 장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또 노동사목과 관련한 기관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분히 관료적인 위치에서 기관을 운영하고 노동자들을 만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현장 노동자들의 고통과 절박함을 공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해서 어떠한 연민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도직이 아니라 사업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노동사목을 할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난한 노동자들을 만나야 합니다.

또 교회는 권위적인 리더십이 아닌 관계적 리더십으로 가난하고 약한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격려함으로서 그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다른 동료 노동자들을 구원으로 이끌도록 노동자 사도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노동 단체와 연대하려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마음을 열고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함께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길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것입니다.


김정대 신부
예수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