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23세 교종, 교회를 어머니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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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23세 교종, 교회를 어머니의 모습으로
  • 박종인 신부
  • 승인 2019.07.26 22: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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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23세 교종 기념미사 강론-박종인 신부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요한23세 교종의 본명이 무엇인줄 아시나요?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이탈리아어: Angelo Giuseppe Roncalli)라는 속명을 가지고 계세요. 아주 가난한 베르가모의 시골마을 농부의 아들이었어요. 제 기억에는 요한 23세와 관련된 영화가 있었는데, 집안사람들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성당에 못가는 이야기가 나와요. 마을에서 집집마다 아이들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공공연하게 지우는 일도 벌어졌고, 그만큼 가난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었어요. 론칼리는 그러한 현실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것이지요.

론칼리 신부는 그러한 것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교회가 사람들을 옭아매는 쪽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해방시켜주고, 죄책감을 덜어주는 쪽으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하고 있었죠. 어제(69일 성령강림대축일) 오신 성령께서 이분을 그런 식으로 몰아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꿈에도 정말 사람의 일을 모르는 것이, 교회는 사실 성령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아무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각 지역의 교회가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그 다양성이 결국은 성령 안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신비를 계속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론칼리 신부는 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내적인 고민들이 교회를 통해서 무엇인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터전이,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것이 끝까지 변치 않았고, 놀랍게도 이분이 교황으로 선출되셨지요.

사람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교황명이 가지고 있는 어떤 칼라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교황이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교회와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끔 돌려놓았는지는 놀라운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제가 미사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가 저한테 무조건, 일방적으로 요왕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사실, 의미로 봐서는 론칼리 신부님이 추기경으로, 교황으로 선출된 다음에 요한이라는 세례명. 그러니까 요한이라는 교황명을 잡았을 때의 의미는,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기를 원했지만, 어찌 보면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을 회심시키는 역할. 더 구체적으로 그 분의 삶을 보면, 전쟁과 폭력에서 평화와 사랑으로 이 지상의 사람들을 민족들을 회두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셨던 분이 아닌가, 그것을 꿈꿨기 때문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것이라고 저는 믿어요.

이런 교종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죠. 재임기간 5년 안에 2차 바티칸공의회를 하시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포도주를 마시다가 결정하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쉽게 얘기하면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지요. 제가 살펴본 자료에 따르면 당신께서 그냥 성령의 움직임이셨다.”라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게 신학적으로 얘기해서 성령의 움직임이지 사실 즉흥적으로 하셨다고 볼 수 있지요. 어찌 보면 이것은 당신이 성장했던 시기의 신자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고민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 교회가 어떠한 이야기라도 들려주고 싶었던 상황인데, 이것을 이제는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요한 23세 교종
요한 23세 교종

 

공의회  소집의 비하인드 스토리

당시에 어떻게 보면 구태의연했던 교회. 현대를 맞이해야 했던 교회가 여전히 현대를 맞이할 자세가 안 되어 있었고, 론칼리 신부 75세가 넘어간 상황에서 어찌 보면 브릿지 식으로 짧게 교황직에 머물라고 뽑아놨는데, 이분이 그런 일을 하실 줄 아무도 몰랐겠지요. 이분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교회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해방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분명히. 원래는 1963년에 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하고자 생각을 해서, 그것을 알아보라고 실무자들에게 얘기했더니 한 신부가 그랬대요. “도저히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1963년에는 열 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63년이 안되면 62년에 열면 되겠네.” 그래서 1년이 앞당겨졌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1년이 앞당겨져서 1962년에 개회를 하게 된 거예요.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렇다고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요한 23세에게 가장 본받고 싶은 품성이 있다면 유머에요, 유머. 어떤 상황도 그냥 무겁게만 지내지 않았던 것이지요. 영화에 나왔었나?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교황으로 선출되고 얼마 안돼서 보좌관과 함께 로마시내를 산책하러 나갔는데, 부녀자들이 옆에 지나가면서 오 마이 갓, 저렇게 뚱뚱한 사람이 다 있어!!”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랬더니 교황으로 선출된 론칼리 추기경이 뒤돌아보면서 "아니, 무슨 콘클라베미인 콘테스트인 줄 아냐"고 받아쳤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하튼, 당신이 겪게 되는 일에 대해서 유머러스하게 표현 할 줄도 알았던 것이지요.

사실 어떻게 보면 행동하는데 있어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교종 요한 23세와 싱크로율이 엄청 높아요. 그러니까 지금 교종 프란치스코 처럼, 시기적절하게 고아원도 방문하고, 양로원도 방문하셨지요. 언제는 교도소를 방문했는데, 교도소에 가서 방문 메시지를 그대들이 올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왔습니다.”라고 하셨다고 해요. 멋들어지지 않나요? 그런 식으로 현장을 찾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이미 반세기 전에 이야기를 했던 분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 차원에서 굉장히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결국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바오로 6세 교황이 2차 바티칸공의회의 회기를 마감하게 됩니다.

공의회가 준 선물들

2차 바티칸공의회의 기본 정신이 뭔지 아세요? 이게 교의를 제대로 확인하고 다시 안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목적인 배려에 관련된 고민이었어요. 여러분들 다 눈치 채셨겠지만, 백성들이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낙태를 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용서받을 수 있고,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거예요. 어떤 사람이 좋아서 낙태를 했겠어요, 사실? 예를 들자면 그런 거예요. 죄를 짓는데 좋아서 했겠냐는 것이지요. 그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 세계가 당신들에게 제공해주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고, 그런 것 때문에 무엇보다도 당장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교회가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해줄 수 있으며, 또한 갈라져있는 다양한 공동체들 특히,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갈라져 있는 공동체들이 무엇인가 하나로서 이야기를 진행해 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이 공의회를 에큐메니컬 카운실 (Ecumenical council), 초교파적 공의회라고 하지요. 그 타이틀을 걸 수가 있어요. 그래서 초교파적이고, 모든 종파를 초월해서 사람들이 만나는 공의회가 이루어졌고, 역사적으로 큰 규모였어요. 그때 자료사진을 보면, 개신교 목사님들, 정교회 주교님들도 오셨고, 심지어 거기서 눈에 띄었던 것이 세계적인 초교파공동체로 유명한 떼제공동체의 로제 수사님이 그때 초대를 받아요. 로제 수사님도 거기 와서 어떤 식으로 대화가 가능할 것인지 모색을 했어요.

2차 바티칸공의회가 우리에게 준 큰 선물 중에 하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라는 가능성을 열어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죠. 그리고 이제는 회중과 함께하는 미사.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바오로 6세 전례라고 부르는 데,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결정이 난 미사방식이에요. 각 나라말로 미사를 드리고, 제대를 두고 사제와 회중들이 같이 바라볼 수 있게끔 만들어진 전례입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죠. 

사실, 엄밀히 따지면. 제대가 벽에 붙어 있다가 약 5미터정도 떨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 유럽교회에서는 거의 삼분의 일 정도가 떨어져 나가요. 어떻게 라틴어를 안 쓰냐. 라틴어만이 하늘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에요. 우리나라는 관계가 없지요. 유럽 사람들은 라틴어만이 천상의 의미를 전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바오로 6세 전례를 전례도 아니라고 했어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떨어져나가요.

전례 때문에  빚어진 갈등

비오10세회라고 여러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1986년에 요한바오로 2세랑 척이 진 사제그룹이었어요. 마르셀 르페브루(Marcel Lefebvre)라는 주교가 자기 마음대로 4명 정도 되는 사제들에게 주교품을 주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때 이 상황을 포착한 요한바오로 2세가 파리로 특사를 파견했어요. 요한바오로 2세는 보수적인 교황이었어요. 자기가 명령하지 않은,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을 절대 간과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 서품식을 거행하지 않도록, 파견된 특사가 가서 설득을 했는데, 말을 듣는 줄 알았더니 잠깐 파리 관광을 시켜준다고 하면서 데리고 나간 사이에 서품을 줘버렸어요.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요한바오로 2세가 르페브루와 그 일당들을 파문을 시켜요. 파문이 풀린 것이 언제냐 하면 아마 2009년도였을 겁니다. 그 뒤 베네딕토 16세가 풀어줘요. 베네딕토 16세는 라틴어 미사를 좋아했거든요. 그게 우두머리들 잘못이지 그 전례를 좋아하는 백성들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는 식으로 풀었는데, 이게 웬걸, 풀어준 후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다시 파문을 한 것인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 당시 트리엔트공의회 전례는 라틴어를 쓰고, 사제들이 방패 같은 제의를 입고, 28 가르마를 하고, 벽을 향해서 팔을 벌리고 기도를 하는 모습. 우리가 유럽의 흑백영화에서나 보는듯한 장면들을 연출하는 전례를 "트리엔트공의회 전례"라고 하고,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전례를 "바오로 6세 전례"라고 해요. 교회는 사실 이 두 가지 전례를 모두 존중했는데,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의 현대 교회 즉, 세상을 바라보면서 미사성제가 이루어지는 이 교회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여전히 있고, 당시에도 그것 때문에 거의 절반이나 되는 신자들이 떠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때 요한 23세는 백성들이 들어야 될 그 희망의 메시지, 세상이 들어야 될 평화의 메시지를 위해서 과감하게 감행을 하셨고, 또 그 후계자인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요한 23세가 어찌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오늘날 보여주고 계신 모습을 그때 이미 예시로 보여주셨고, 여전히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은 이 세상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여전히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이 과정에서 나름대로 고충도 겪고 있는 상황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에게 이것을 통해서 희망을 주고 있음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교회가 어머니의 모습처럼 우리를 탓하기보다는 우리를 당신 품으로 이끌어 들이고, 우리를 위로하려고 하고, 우리에게 늘 따스한 품과 먹거리를 주려고 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오늘 교종 요한 23세의 기념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종인 요한 신부
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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