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바니에, 라르슈에 닻을 내린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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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니에, 라르슈에 닻을 내린 신앙
  • 한상봉
  • 승인 2019.07.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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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영성가 둘을 꼽으라면 당연 토머스 머튼과 헨리 나웬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토머스 머튼은 미국 켄터키 주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영적 성장을 이루었고, 헨리 나웬은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슈 공동체에서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집’을 발견하였다. 라르슈는 ‘방주’라는 뜻인데, 헨리 나웬이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만난 곳은 라르슈 공동체를 설립한 장 바니에가 처음에 정착했던 프랑스 트로슬리였다.

나웬은 1983년 가을, 트로슬리의 라르슈 공동체 자료센터 사무실 문에 꽂혀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자신의 영적 갈망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는 노틀담과 예일, 하버드대학교에서 언제나 영성에 대해 강의하였으나, 늘 영적으로 허기져 있었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를 처음 본 인상을 이렇게 전했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의 가슴은 단번에 벅차올랐다. 내 자신을 소진시켜 버린 긴 여정 후, 아버지와 아들의 부드러운 포옹은 그 순간 내가 갈망했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긴 여행에서 완전히 소진된 아들이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안아주기를 원했다.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집을 찾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처럼 되고 싶은 것은 바로 나의 전부였고, 내가 되고 싶은 모든 것이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나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만나고, 간청하고, 훈계하고, 위로하며 돌아다녔다. 이제 나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리에서 그저 안전하게 쉬고 싶을 뿐이다.”

결국 헨리 나웬은 트로슬리의 라르슈 공동체에서 한 해를 보내고서, 1986년 8월에 토론토에 있는 라르슈 ‘새벽공동체’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헨리 나웬은 “하버드에서 라르슈로 움직인 것은 내가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판관에서 참회하는 죄인으로, 사랑을 가르치는 교사로부터 사랑받는 자로 조금씩 한 걸음을 떼었다는 걸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헨리 나웬과 장 바니에.

 

라르슈는 복음을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복음을 사는 자리였다. 헨리 나웬이 제 삶의 정점을 찍었다고 믿었던, 라르슈 공동체를 이해하려면 먼저 장 바니에를 알아야 한다. 장 바니에(Jean Vanier)는 다른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복음서가 가리키는 ‘아름답지만 불가능한 말씀’에 진지하게 응답한 사람이다.

장 바니에는 어느날 트로슬리에서 분노가 치밀어 제정신이 아니었던 사람과 마주쳤다. 그는 난동을 부린 일 때문에 얼마 전에 공동체에서 나와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장 바니에에게 다가가서 팔을 치켜들고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당신 잘 만났어! 라르슈는 욕실도 있고, 모든 게 다 있지. 하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장 바니에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정 그렇다면, 나를 때리시오.” 그 사람은 장 바니에의 얼굴을 세게 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그날 이후로 장 바니에의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훗날 장 바니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제 얼굴 한복판이 아니라 한쪽 옆을 쳤어요. 아마도 제 코뼈가 깨지고 코피가 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상당히 체구가 컸던 장 바니에는 어떤 반격도 하지 않고 “당신이 원한다면 한 대 더 때리시오.” 했다.

<장바니에 우리와 함께>(톨, 2018)를 쓴 안 소피 콩스탕(anne Sophie Constant)은 이때 장 바니에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하는 복음서 말씀을 떠올렸는지 모른다고. 아니면 맹목적인 폭력 앞에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바니에는 자신도 그때 두려웠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곧 정신을 차린 상대방은 제집에서 음료수를 대접하고 싶어했다. 그 집 마당엔 셰퍼드 한 마리가 으르렁대고 있었다. 부엌에서 음료수를 내주며 그는 말했다. “성질이 순해요. 절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아요,” 겸손과 가난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장 바니에는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복음의 사람이었다.

전쟁의 아이, 해군이 되다

1998년 캐나다 시사주간지 <매클린스>가 “전시는 물론 평상시에도 용기와 희생정신을 보여준 인물 ... 캐나다 국민에게는 도덕적 나침반이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강직하고 명예로운 분으로 캐나다의 첫 번째 영웅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은 조르주 필리아스 바니에가 라르슈 공동체의 설립자였던 장 바니에의 아버지다.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이며, 1928년 9월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장 바니에가 태어났을 때 조르주 장군은 국제연맹의 캐나다 군사대표부 대사였다.

장 바니에는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고 싶어해서, 열세 살에 영국의 다트머스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당시 아버지 조르주는 캐나다 퀘벡 지역 총사령관이었다. 본래 변호사였던 조르주가 직업군인이 된 것은 평화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 나치에 대항하는 전쟁은 범인류적 차원에서 치러지는 전쟁이며, 악에 대항하는 영적 투쟁이라고 믿었다. 조르주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서는 고통에 시달리는 수많은 영혼들이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그들은 히틀러에게 핍박을 받고, 압제에 시달리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때의 블루아 병사처럼 나도 소리 높여 외친다. ‘홀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러나 아들의 문제는 다른 차원이었다. 조르주는 전쟁중인 유럽으로 아들을 보내는 것을 걱정했다. 대서양을 항해하는 선박 다섯 척 중 하나가 나치의 잠수함 공격을 받아 바다에 침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해군이 되고 싶다면 열일곱 살이 되어 밴쿠버에 있는 캐나다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 조르주는 장 바니에와 면담하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거라.” 이것은 장 바니에가 앞으로도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훗날 바니에는 이렇게 말했다.

“거절하고, 안 된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저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히 반항조차 못 했겠지요. 하지만 만일 그랬더라면 제 안에 있는 무엇인가는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마음에는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셔서 저는 제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제 직관을 믿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날 아버지는 제게 두 번째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해군사관학교 생활은 그리 녹록한 게 아니었다. 장 바니에는 영국인 속에 섞인 캐나다인이었고, 성공회 신자들 속의 가톨릭신자였다. 사관학교에선 기도시간마다 이상한 광경이 반복되곤 했다. 제복차림으로 연병장에 모인 500명 생도 중에 몇 안 되는 가톨릭신자들은 “가톨릭신자들은 헤쳐 모여!”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연병장 구석 울타리 너머에서 ‘성모송’을 외우고, 다른 생도들은 연병장에 그대로 정렬한 채로 ‘주님의 기도’를 올렸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군종신부는 어린 소년들에게 <호교론>을 읽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정작 장 바니에가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눌만한 상대는 성공회 사제였다.

“호교론을 읽으라니, 그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책을 읽었지만,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도 깨달을 수 없었으니까요. 차라리 복음서를 읽어 보라고 권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요.”

 

젊은 시절의 장 바니에
젊은 시절의 장 바니에

 

항해하는 신앙

장 바니에는 자신이 해군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는 나를 해방시켜 주셨다. 그 순간부터 나는 성인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었으며, 가족을 떠나 표준 궤도에서 벗어난 인생 항로에 접어들 수 있었다. 마침내 나는 인생이라는 모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이었다고 바니에는 믿는다.

“만일 제가 본래의 성격과 기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캐나다에 머물러 있었다면,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환경 속에서 순종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공부를 더 많이 해 예수회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지식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테고 신앙이나 교회, 하느님에 대해 더욱 이론적인 지식으로 무장했을 것입니다. 또 프랑스 파리에 있는 소르본 대학교에 진학해 학위를 마쳤을 테고, 틀림없이 사제가 되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더욱 모험적이고, 표준에서 좀 벗어나는 인생길이었습니다. ... 적절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바람직한 견해, 그런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던 저는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었어요.”

1946년 사관생도들은 프로비셔호를 타고 첫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네 달 만에 영국으로 돌아 왔는데, 장 바니에는 바다에서 인생을 배울 수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배 위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다른 데로 도피할 수도 없고, 늘 바쁘면서도 혼자였다. 금속과 목재로 된 단단한 바닥을 딛고 서 있으나, 그 아래에는 온통 출렁거림뿐이었다. 안도감을 주는 엔진 소리 너머로 한없이 드넓은 바다의 물결소리가 들려 왔다. 출렁거리는 물 위에서 인간은 군림하는 듯 했지만, 매 순간 스스로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시험하는 무대였다.

비록 군인 신분이었지만, 장교가 되어서도 장 바니에는 여전히 종교적 갈망이 컸다. 항해를 마치고 육지에 도착하면 동료들과 떨어져 성당으로 갔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연인처럼 미사에 참석했다. 그는 수도자처럼 시간전례를 바쳤다. 아침일찍부터 잠자기 전까지 아침기도,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 저녁기도, 끝기도까지. 틈날 때마다 시편을 읽었다. 부모의 경건한 신앙을 내려받은 탓인지, 큰 형 조르주도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였다.

장 바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몇 사람을 꼽으라면 뉴욕에서 가톨릭일꾼운동과 ‘환대의 집’을 설립한 도로시 데이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 농부로 나치의 군대에 입대하기를 거부하다 총살형을 당한 프란츠 예거슈테터, 캐나다 토론토와 뉴욕 할렘가에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살아가는 ‘우정의 집’을 세운 캐서린 드 휴엑 도허티(Catherine de Hueck Doherty, 1896-1985. 마돈나하우스 창립자)등이었다. 특히 도허티는 토머스 머튼의 <칠층산>을 읽고 알게 되었다.

1950년 4월 뉴욕 항구에 도착한 장 바니에 중위는 ‘우정의 집’이 있는 할렘가로 달려갔다. 머튼은 <칠층산>에서 “그들은 불결한 동네에 살면서 일하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망각하고 방치해 버리는 익명의 거대한 대중 속으로 함몰되어가는 삶을 산다. 그러나 복음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널리 전파하며 거룩한 존재가 되고, 성령과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한 모습을 한 채 하느님과 일치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꿈꾼다.”고 전한다.

장 바니에는 뉴욕에 머무는 일주일 내내 우정의 집에 머물렀다. 부활절에는 항공모함으로 그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스무 명 남짓한 가난한 사람들, 백인과 흑인, 아주 소박하지만 행복해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공동체 생활의 기쁨’을 맛보았다. 결국 바니에는 ‘우정의 집’을 보고 한 눈에 반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갈망으로 해군에 사직서를 냈다. 해군생활 8년만의 일이다.

가장 비천한 자리를 찾아가면서

평생의 동반자요 영적 스승이었던 토마 필립 신부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장 바니에에게 어머니 폴린은 파리 인근 수아시쉬르센에 있는 ‘오 비브’(Eau Vive, 살아있는 물이라는 뜻) 대학생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도미니코회 소속 토마 필립 신부를 찾아가도록 추천했다.

토마 신부는 오 비브 공동체를 평화의 학교로 만들고 싶어했다. 연령과 출신과 상관없이 이슬람, 개신교, 가톨릭 등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이곳에 모여 공부하고 기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2년 갑작스럽게 토마 신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로마에 소환되고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장 바니에가 일시적으로 오 비브 공동체의 책임을 맡았지만, 급기야 이곳에서 자신도 해고되었다.

스승과 헤어지고 공동체에서 떠나면서, 그때부터 8년 동안 방황이 시작되었다. 1956년을 시점으로 장 바니에는 프랑스 벨퐁텐의 트라피스트 수도원과 노르망디 지방의 작은 농가에서 살다가 포르투갈의 파티마로 건너가 미국인 수녀들이 사는 수녀원에 속한 정원사의 집에 머물렀다.

파티마에서 장 바니에는 아침 일찍 새벽 4시에 성당으로 가 성체 앞에서 기도하고 미사를 드렸다. 미사가 끝나면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공부하고, 기도했다. 그는 이 시기에 고독한 생활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예수님처럼 가장 비천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장소를 프랑스 트로슬리에서 발견했다.

1959년 장 바니에의 아버지 조르주가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장 바니에가 찾아간 곳은 트로슬리에 있는 발 플뢰리였다. 이곳에서 토마 신부가 30여 명의 지적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에서 사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장 바니에는 토론토대학교에서 전임교수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했다.

젊은 철학자 장 바니에는 발 플뢰리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창고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방치되었고, 회색의 높은 담장과 쇠창살에 둘러쌓인 채 마치 유령처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간병인들과 직원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곤 하지만,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바니에는 이들을 떠날 수 없었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 마음 속에서 이끌림과 두려움이 동시에 생겨났습니다. 이끌림과 거부감,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끌림과 온통 비정상인 것들 앞에서의 거부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넘어 제가 매료된 것은 우정을 갈구하는 그들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마치 꽃 주위를 맴도는 꿀벌들처럼 제 주변에 서성거렸습니다. 그들은 손으로 살짝 건드리며 물었죠. ‘다시 와 주실 거죠?’ 저는 인간관계를 열망하는 그들의 소리없는 외침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방주, 라르슈 공동체

장 바니에는 트로슬리에 머물기로 작정하고, 1964년 라파엘과 필립, 두 지적 장애인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첫 번째 집을 구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이 이름을 노아가 만들었던 피난처 ‘방주’라는 뜻을 지닌 ‘라르슈’(L'Arche)라 붙였다. 해군출신이었던 장 바니에다운 발상이었다. 이곳은 시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집’이다. 헨리 나웬이 경험했듯이 환대와 축제같은 일상이 머무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계획도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막연했다. 지적 장애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지만, 장애인 보호시설이나 기관에서 겪는 그들의 고통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복음서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이 더욱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돕고 싶었다. 그 후 매일매일 조금씩 라파엘과 필립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공동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라르슈 공동체는 두 가지 원칙만 밝혔다. “라르슈 공동체는 가톨릭 공동체이지만, 신앙은 오로지 각자의 선택에 맡길 것”과 “가난함의 중요성”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고, “행정당국에 구체적인 도움을 청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가 힘을 합쳐 지복직관의 정신으로 평화와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 집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한편 발 플뢰리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라르슈는 창설한지 아홉 달 만에 발 플뢰리를 통합하게 되어, 건물 두 채, 작업실 여러 개, 작은 성당까지 갖춘 50명이 넘는 대가족을 거느린 공동체가 되었다. 갑자기 큰 공동체의 책임을 맡게 된 장 바니에는 본래 시설을 마치 일반 가정집처럼 꾸며 놓았다. 커다란 구내식당을 없애고 대신 작은 식당 세 개, 식구들이 커피를 마시며 저녁시간을 보내는 거실, 공동 공간 여러 개, 또 그들이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들었다.

사랑하며 경청하는 자, 장 바니에

장 바니에는 무엇보다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되찾아 주는 사람이었다. 장 바니에는 누군가와 ‘동반’한다는 것은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혹은 그가 있는 곳 어디서나 하루에도 몇 시간씩 앞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구부린 채 온 정신을 집중해 상대방이 말하는 것, 혹은 말하지 않은 것에 귀를 기울였다.

그 사람들은 공동체 봉사자뿐만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젊은 여성, 술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남성, 장애를 가진 자녀 때문에 절망하는 부모들, 방황하는 젊은 사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동생에게 화를 내는 장애인 여성, 집을 떠나 도시에 나가 살고 싶어하는 청년, 모두가 그의 이야기 상대가 되었다. 장 바니에와 함께 있으면 누구라도 수다스러워진다.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처럼 그에게 아무런 가식 없이 솔직히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기쁨으로 맞이해 사랑으로 바라봐 주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금 네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1968년 장 바니에는 토론토교구 사제들을 위한 피정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놀랐다. 평신도에게 이런 요청을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파리공제조합 강당에선 800명, 파리 유네스코 대강당에선 1,500명 앞에서 강연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좀 떨리는 듯하지만 자신있고 단호하며 명료하며 간결했다. 그는 청중을 선동하거나 훈계하지 않았다. 그는 환호와 갈채를 바라지 않는다. 애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무엇을 팔러 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8년 퀘벡에서 열린 제49차 세계성체대회에선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교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고된 기쁜 소식’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거리에서 지내는 노숙인들에게 ‘하느님께선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한마디 툭 내뱉고는 제 갈 길을 가기보다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나서서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푸른색 잉크를 사용해 글을 쓰는 장 바니에는 비행기 안에서, 공항에서, 기차역에서, 틈 나는 대로 글을 쓰면서 총 30여 권의 책을 펴냈다. 그의 글은 줄바꿈이 자주 등장하는 시(詩)같은 글이었다. 이유는 글에도 침묵의 공간, 긴 호흡, 리듬을 만들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 바니에는 복음서를 윤리적이거나 신학적인 책이 아니라 만남의 이야기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요한묵시록의 표현처럼 문밖에 서 계시며 우리가 문을 열어 맞이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한껏 사랑하고 치유하기를 당부하시는 분이다. 하느님 역시 계율과 금기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평화로 인도하시는 ‘다정한 분’이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장 바니에는 라르슈 공동체가 전 세계에 설립되면서 바빠졌는데, 특히 1971년 마리 엘렌 마티에와 루르드에서 장애를 가진 이를 중심으로 순례하는 ‘신앙과 빛’ 단체를 창설하고, 첫해 부활절에 15개국 12,000명의 순례자가 모이면서 쉴 틈이 없었다. 이처럼 장 바니에의 말년은 피정과 강연, 전 세계 라르슈 공동체 방문, 빛과 신앙 순례 등으로 분주했다. 한 해의 절반은 거의 타지에서 보냈다.

그는 1997년 바오로 6세 교종상을 받고 2015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을 수상하고, 2016년에는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지옹 드뇌르 코망되르 훈장도 받았다. 그는 여생을 처음 정착했던 트로슬리의 라르슈에서 보내다가 2019년 5월 7일 파리에서 이승을 떠났다.

우리 모두가 형제이며, 특히 가장 약한 지체가 가장 소중한 지체라고 믿었던 장 바니에는 그들의 몸을 만질 수 있어야 하느님의 현존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생애를 봉헌했다. 그가 자주 인용했다는 본 회퍼 목사의 옥중시 한 편이 그의 유언처럼 맴돈다.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느님!”

[참고] <장 바니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안 소피 콩스탕, 톨, 201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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