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불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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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불한당
  • 한상봉
  • 승인 2016.06.0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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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사랑>, 리북, 한상봉 지음-7
예수의 생애에 관한 중세기 이디오피아 교회 제단화 이콘.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을 칠 녀석들이 항상 기득권자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어찌하랴, 예수 역시 그런 불한당들이 아우성치던 시대에 그 또한 불한당의 한 사람으로 ‘메시아’라는 칭호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그가 만약 로마제국과 헤로데 안티파스와 원로원으로부터 ‘메시아’라는 칭호를 얻었다면 별 문제려니와, 갈릴래아와 유다의 거지 떼에게 ‘주님’ 소리를 들었던 것이라면, 이는 분명 불온한 것으로 역사가 기록했을 것이다. 역사 기록은 항상 지배자의 독점적 특권이었으니 말이다.

예수는 기원전 4년 또는 기원후 6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가 헤로데 대왕 생존시에 태어났다는데, 헤로데가 이승을 떠난 것은 기원전 4년이었다. 또한 루카복음에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으로 총독 퀴리니우스가 실시한 ‘호구 조사’, 즉 납세자 등록을 행할 때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데, 그것은 기원후 6∼7년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여기서 기원전 4년이란 폭군 헤로데 대왕이 죽고 나서 생긴 정치 공백을 틈타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고, 이 때문에 로마 총독인 바루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소요를 진압하던 때였다. 그 후 총독이 헤로데의 재산을 몰수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예루살렘 주민이 다시 봉기하였다. 바루스는 다시금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군 지도자의 하나인 갈릴래아 사람 유다의 본거지인 세포리스(나자렛 부근)를 쑥밭으로 만들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가면서 곳곳에 2천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한편 기원후 6년경에는 유다 전역에 걸쳐 납세 거부 운동이 일어났다. 갈릴래아의 유다가 바리사이파인 사독과 함께 다시 나타나서 “이 인구 조사는 우리를 노예화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지킵시다! 하느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면서도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멸망의 주를 섬기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라고 설교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며, 파산하고 절망한 유대의 민중이 규합하여 부자들을 인질로 붙잡았으며,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로마 주둔군과 거기에 협력했던 자들을 단도(短刀)로 습격했다.

예수는 그러한 민중 소요의 격동기에 태어났으며, 고향인 나자렛은 갈릴래아의 촌읍으로 반란의 진원지 세포리스에서 남동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아마도 나자렛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봉기에 참가했을 것이며, 이래저래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팔려 갔을 것이다. 따라서 나자렛은 반역의 고향으로 천대받는 땅이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라고 했을까? 나중에 나자렛과 아무 상관도 없는 바오로 사도 역시 ‘나자렛 도당의 괴수’로 고발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알아본 결과, 이 자는 몹쓸 전염병같은 놈으로서 온 천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이며 나자렛 도당의 괴수입니다."(사도 24,5)

이 땅에서 성장한 예수가 불한당(不汗黨)으로 성장한 연유는 이러하지 않았을까?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기원후 37)는 갈릴래아를 통치하면서 세포리스를 수도로 건설하였다. 예수는 아마도 이 대규모 건축 사업에 목수 등의 장인(匠人)으로 동원되었을 것이며, 이 때문에 예수는 일찍부터 떠돌이 생활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저 몸뚱이밖에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짐꾼이나 건축 노동자, 거렁뱅이로 사회 밑바닥 백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이들에게 ‘타는 목마름’이 없을 수 없다. 그 원망(怨望)이 마리아의 태교(胎敎) 노래에 그대로 실려서 복음서에 전한다. 마니피캇(Magnifikat), ‘마리아의 노래’다. 이 노래는 권세 있는 자, 교만한 자, 부유한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자, 배고픈 자가 구원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리라고 예견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들어 있다고 했던 이 노래는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이 열망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는 거렁뱅이처럼 태어나고, 후레자식으로 키워지고, 불한당처럼 거리를 떠도는 신세를 감당해야 하였다. 하느님은 가련한 민중을 상징하는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아 주셨기에, 마리아에게 희망의 싹이신 메시아 아기씨를 안겨 주셨다. 그리고 이 메시아는 거룩한 성전이 서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다의 고을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었다(마태 2,6; 미가 5,2).

또한 메시아는 궁전이 아니라 비천한 말 밥통(구유) 위에서 찾아지며(루카 2,7), 유대인 가운데 가장 천박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목동들의 경배를 받으며(루카 2,8-20), 기껏해야 동방 박사들, 이방인 점술사들의 경배를 받으실 분(마태 2,1-12)이다. 스스로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고백했던 떠돌이가 예수의 신원이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는 분이다.

그리고 이런 천박한 불한당들은 한결같이 “그 사랑 때문에” 평생을 떠돌다가 국가 안보의 이름으로 군대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체포되어 으슥한 곳에서 암살당하거나 또는 백주 대낮에 거리에서 처형당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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