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순종을 요구한다면...하느님께 순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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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순종을 요구한다면...하느님께 순종을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9.07.1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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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자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또 교회는 그러한 자유를 얼마나 많이 제약하고 있는지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이미 스스로 간절하게 순명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거의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 나는 <뉴욕 사람들>이라는 풍자만화 속에서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나요?” 하며 등장하는 어린 주인공을 좋아했다. 그러나 항상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내 가슴속 탐욕과 욕망을 따라 이리저리 쫓아다니기에 나는 지쳐 있었다. 그것들은 나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내 안의 욕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주는 대로 따라하라고, 자꾸 나를 부추기기만 한다.

그 후 나는 양심에 따라 가톨릭신자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조건부로 세례를 받으면서, 교회가 내게 제시한 장엄하고 엄숙하고 아름다운 진리에 “믿습니다!” 하고 응답했다. 그동안 이런 ‘순종’이 그리 문제된 적은 없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에게 교회는 어마어마한 이상을 심어주었고, 설령 우리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듭해 고꾸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 안에는 우리를 위로하고 용서하고 받쳐주며 양육해줄 고해성사와 성체성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

그게 하느님의 일이라면

1933년 나는 프랑스 농부 피터 모린을 만났고, 피터는 나에게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거리의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신문을 발행하자고 제안했다. 그 무렵 나는 예수회 주간지인 <아메리카>(America)와 예수고난회 월간지인 <표지>(Sign)에 기고를 하고 있었고, 과거 뉴욕의 포리스트회 원장이었던 조지프 맥솔리 신부에게 영적 지도를 받고 있었다. 나는 피터가 제안한 모험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조언을 듣고자 이 세 신부님들을 만났다. 맥솔리 신부는 물론 두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윌프리드 파슨스 신부와 해럴드 퍼셀 신부는 단호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아니,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어요. 사람들 속으로 가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또 그게 하느님의 일이라면 언제까지고 계속될 테고.”

나는 그분들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피터와 내가 우리 자신을 위해 뭔가 일을 벌인 것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외롭게 그 자체의 실수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계제도의 허락을 받고 시작했다면 이번에는 교회가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나는 재정적 책임 따위는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시민의 권리와 사회정의에 주목해야 할 우리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다.

성 아우구스티노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이 (나는 그저 그의 <고백록>을 읽어보았을 뿐이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뜻대로 행하라.”는 그분의 슬로건을 우리의 것으로 삼았다. 이 말씀에는 자유가 숨 쉬고 있었다. 이 자유는 우리처럼 세속적 불의에 저항하는 이상주의에 매료되어 시작한 대부분의 일들이 언제나 도중하차되곤 했지만, 여전히 인류가 추구해 왔던 이상이었다. 성경과 성인들의 작품들을 탐구하면서 나는 더 이상 다른 위대한 지성들의 뒷받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평신도가 선봉이 되어

캔자스 시의 오하라 주교는 우리의 좋은 친구였고, 가톨릭일꾼운동 초창기에 우리를 자주 방문했다. 오하라 주교는 스스럼없이 우리를 친구로 대해 주었고, 우리가 어떤 호소를 하면 흔쾌히 도와주었다. 간혹 <가톨릭일꾼> 신문에 실린 내용 가운데 자기와 의견이 다른 기사가 실리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서 우리에게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하라 주교는 어느 중요한 방문 자리에서 피터에게 “피터 씨, 우리(주교)를 이끌어주면 우린 당신이 하는 대로 따라갈 테요.” 했다.

피터는 주교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평신도로서 선봉에 서라는 요구였다. 영적 투쟁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평신도가 되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독생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사는 법과 죽는 법을 가르쳐주실 정도로, 나아가 최후의 막강한 적인 ‘죽음’을 만나서도 어찌 해야 할지 몸소 보여주실 정도로 사랑하신 평신도로 자기 사명을 다해 달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모든 방법으로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일치를 꾀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등,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만난 이들을 깊이 신뢰하고, 선의를 지니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단점과 다른 사람들의 단점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와 고위 성직자들이 할 수 없었던, 또 하지 않으려고 했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분야에 과감히 뛰어 들었다. 이따금 실수를 저지르곤 했어도 큰 탈은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걸음들을 계속 돌이켜보면서, 피터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던, 낡은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거듭 고민하고, 거듭 행동했다.

나는 교회 안에서도 엄청난 자유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신출내기 신자들에게는 그들이 이미 지니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자유가 무엇인지 생생히 보여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이 될 자유가 있다. 그런데 가톨릭신자에게도 확신에 가득 찬 철학적 아나키스트가 될 자유가 있음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사람들은 자유기업 역시 존중받아야 하지만, 협동적 소유정신과 공산적 소유정신이 재산의 사적 소유와 나란히 병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까막눈처럼 알지 못한다.

요한 23세 교종 “순종과 평화”

순종은 사랑의 문제인 동시에 의지의 문제다. 공포와 힘으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23세 교종(Papa Giovanni XXIII, 1958-1963 재위)의 모토가 바로 “순종과 평화”였다. 교종은 자신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전에 모든 것을 법률(교회법)로 정해 두려는 모든 인습을 비난했다. 이 때문에 교종은 교회 안에서 바리사이들의 빈축을 샀지만, 백성들에게는 갈채를 받았다.

요한 23세 교종
요한 23세 교종

교종은 긴 생애 동안 언제나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냈다. 불가리아와 터키에서 교황사절로 보낸 몇 년간은 때때로 침묵과 고독과 정적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교종으로 일하면서 그가 내린 결정들은 교회와 세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었다. 교종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토 발두치 신부는 그의 저서 <요한: 과도기의 교황>에서 요한 23세 교종을 가리켜 “개방적이며 본질적 이상을 지닌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요한 23세 교종의 지도력은 “교회의 모든 장소에 드리워진 부드러운 커튼의 뒤편에서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길과 공간으로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왔다. 교종은 “진리에 대한 순종이란 도덕적 덕목일 뿐 아니라 신앙의 특수한 원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교회개혁의 반대자들 때문에 납득할 수 없는 좌절감을 맛보면서도 언제나 제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요한 23세 교종은 자신을 시므온으로 여겼다. 숱한 세월의 좌절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성전에서 메시아를 기다려온, “온통 실패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다 바쳐 수많은 세월을 기다림만으로” 보낸 시므온처럼 교종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로마에 머물지 못하고 대부분의 생애를 그리스나 불가리아, 터키와 같은 가톨릭교회의 변방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교종은 로마 교황으로 선출되기 몇 년 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므온은 자기 생애에서 잃은 것이 별로 없었어. 시므온이 메시아를 기다리며 지낸 시간들 덕분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드러낼 준비를 했거든. 지금 얘기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나의 초라했던 삶도 평소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며 등에 걸쳤던 거친 옷처럼 과분하다는 생각이 드네.”

습관적인 신앙을 넘어서 불타오르는 사랑

요한 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 즉시 로마의 레지나코엘리 교도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죄수들에게 이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여러분이 나를 보러 올 수 없으니까 내가 여러분을 보러 왔습니다.” 오랜 사제생활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교종은 성무일도의 삼시경에 나오는 “당신 사랑의 불길로 우리 사랑이 불타오르게 하시고, 그 열정으로 우리 이웃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했다. 하느님께서는 교종으로 하여금 사랑의 불길로 온 세상을 휩쓸고, 그 사랑으로 온 교회가 불타오르게 하심으로써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는지, 오늘의 교회에 얼마나 큰 소란과 논쟁과 초조함을 불러일으켰는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남녀 수도자들은 물론 고위 성직자들조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를 떠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실천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신앙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인지 습관 때문인지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하고 또 실천할 수 있도록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훈련을 받아왔다.

누군가 요한 23세 교종을 평가하기를, 창문을 활짝 열어 신선하고 엄청난 돌풍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동안 교종은 순종에 대해 많은 것을 강조했다. 물론 교종이 처음부터 순종에 대한 다양할 갈피들을 모두 다 이해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미국 국민들이 느끼는 자유란 비판의 자유인데, 이런 비판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믿었다. 미국인들은 언제나 정치나 윤리적 악행을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악덕을 자신들만이 지닌 뜻 있는 덕목이며, 정직과 진실로 충만한 덕목이라고 착각해 왔다.

자유란 곧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파헤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난생 처음 그리스도교 신앙고백과 접한 사람들이 그러듯이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마치 우리가 ‘사도신경’을 천천히 외우면서 “이걸 믿어야 하나, 이것도, 이것도?” 하고 스스로에게 추궁하듯이 말이다.

복음에 충실하게 순종한다는 것

신앙이란 우리가 순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입장아를 찧고 있을 때 요구된다. 곧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한 분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말한다. 우리가 순종의 자유와 불순종의 자유를 부여받았다면, 우리가 순종을 드려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뿐이라는 바로 그 신앙이다. 사랑, 아름다움, 진리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모든 하느님의 속성은 인간이 손으로 직접 만든 모든 작품들, 그 창조물들 속에서-그것이 다리가 됐든 교향곡이 됐든-자신의 모습을 발견케 하고 또 반성케 한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 순종하고 경배드릴 수 있을 뿐이라는 데 감사와 감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내 신앙이 비록 겨자씨만 할지는 모르지만, 그 잠재력은 별도로 치더라도, 내 믿음이 내게 사랑의 실마리와 사랑의 지식을 심어주리니, 그 사랑이야말로 감히 인간의 사랑으로는 견줄 수 없는 지고지순하고 강렬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주님께서 “나의 형제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기에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고, ‘소중한’ 그 원의(願意)를 모두 받들고 싶고, 그분을 따라 시베리아로, 남극의 황폐한 땅으로, 사막으로, 감옥으로 쫓아가고 싶고,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 바치고 싶다.

 

시몬 베유

하느님께만 순종하는 골치 아픈 사람들

과연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 교회의 으뜸이나 국가의 군주와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미천한 사람들에게 순종하기가 더 쉬울까. 정말 그럴까.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복음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 이 말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행하신 대로 너희도 남의 발을 씻어주라는 의미와 일맥상통 한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남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남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다.

시몬 베유는 순종에 대해 수없이 언급한 바 있다. 그녀는 “영웅이 경멸과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지닌 공통된 생각인데, 복음서에는 그것이 실제 주제로 나타나 있다.”면서 “그러한 생각은 군국주의, 중앙 집중화, 관료정치와 전체주의라는 로마 방식이 잔존해 있는 서방의 전통과 거리가 먼 전통”이라고 했다. 성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말하기를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라고 말한 것처럼, 하느님과 양심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얼마나 강렬하고 적극적인 덕목인가!

그래서 <가톨릭일꾼> 신문 편집자들과 열성적인 가톨릭일꾼운동 활동가와 봉사자들 때문에 뉴욕 법원 사무실은 극도의 인내심을 갖고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우리들이 평화운동 등으로 빈번하게 교도소에 들어가고, 우리들의 행동이 신문에서 논쟁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가톨릭일꾼의 생각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은 정부 차원에서 보면 무척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그들은 정부시책이나 방향에 무조건 동의하지 않는 탓이다.

교회가 순종을 요구한다면

언젠가 내가 성명서를 작성할 때였는지, 글이나 강연을 할 때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교회 안에서 누리고 있는 우리의 자유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고, 만약 스펠만 추기경(뉴욕 교구장)이 신문을 만들지 말고 펜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더라도 나는 전적으로 여기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했다. 다른 길이 또 열려 있으리라 믿는다. 어쩌면 <가톨릭일꾼> 신문에 대한 나의 소유욕이 지나치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왈가왈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나 자신 밖에 없다.

이런 내 생각에 피터 모린도 동의할 것이다. 미성숙한 신앙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은 더 깊은 차원에서 순종을 통해 교회와 자신이 결속되어 있다는 제2의 회심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럴 필요가 있다. (도로시 데이는 교회는 자신에게 언제나 스캔들이었지만, 예수가 십자가와 분리될 수 없듯이, 교회는 자신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떼어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편집자 주)

나는 신앙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것이 나에겐 가장 휘황찬란한 산물이다. 물론 내 손으로 얻어낸 선물이 아니라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바로 이것이 나를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와 그 교회의 명령에 대해 순종하도록 이끄는 거룩한 힘이다. 나는 내 마음 속의 이러한 확신에 대해 감사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며, 주님께서 나의 부족한 신앙을 채워주실 것이라 믿는 것이다. 나는 그처럼 믿기에 그분께 순종할 따름이다. Ω

출처_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도로시 데이 지음, 이건 옮김.

도로시데이: 가톨릭일꾼운동 창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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