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공장에 일하러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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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공장에 일하러 갔는가?
  • 에지드 반 브루크호벤 신부
  • 승인 2019.07.0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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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지드 반 브루크호벤 신부

 

어떻게 내가 공장에 일하러 갈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더듬어 볼 때,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은 것은 대도시에 산재해 있는 비그리스도교화 된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걸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벨런스 신부님의 영향과 지역 사도직의 경험을 통해, 복음적인 선택으로서 가난한 이들, 보잘것없는 사람들에 대한 매력을 발견한 다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장소를 택하면서 나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결국 그 구석진 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명백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직의 시작과 끝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선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 안에서, 현재의 구체적인 세계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만져볼 수 있는 실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와 이토록 멀어진 가난한 대중에게로 참으로 갈 수 있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는 것-그리스도는 가장 첫 번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처럼 일하러 가고,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으며, 그들처럼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이 점을 알아듣게 된 것은 내가 해고 되었을 때, 가장 가난한 이들 중 하나인 Br이 내게 “에지드, 자네가 곤란하게 될 때는 언제고 나한테 의지할 수 있다네. 자네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 와서 묵게나.”라고 말해준 때였습니다. 그 당시 나는 그와 같은 수준에서 완전히 친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나는 수많은 그의 동료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 중에 꼴찌가 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보잘것없는 이들은 영영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삶으로 밀어 넣어 준 또 다른 동기는 하느님께 대한 크나큰 갈망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오늘의 이 세상 현실 안에서,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우선적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위적인 테두리 안에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구원되어야 할 이 세상에 계십니다. 그분은 확실히 그런 곳에 현존하시며, 우리가 베푸는 우정, 특히 우리가 가서 함께 사는 그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받게 되는 우정 안에 살고 계십니다.

이 두 가지 동기 위에 삶 자체에서 생겨난 다른 동기들이 더해졌습니다. 이 동기들은 내게 삶에 대한 더 큰 애착을 갖게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에 대한 커다란 걱정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생겨났으나 그 많은 사제들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은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을 볼 때 더 이상 편안히 잠들 수 없습니다. 교회가 사느냐 죽느냐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을 통하여 복음화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복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되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읽을 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직도 선포되고 있지 않다면,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가 애착을 느끼는 두 번째 동기는 매우 구체적인 모든 측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불의를 발견한 것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자본가들과 타협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사회적 약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셋째로는 바로 이곳에서 사제의 삶이 지닌 어떤 측면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착한 목자의 비유 같은 것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것이 바로 이 삶 안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한 현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런 삶에 애착을 갖게 된 이유를 덧붙입니다.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이 가난한 이들, 이 노동자들, 이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로부터, 그들의 목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나는 그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이들, 즉 이슬람 신자들과 그리스 정교 신자들, 곧 고향에서 뿌리 뽑혀진 사람들, 특히 지난 주에 해고당한 아홉 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친구들을 통하여 내가 가난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 그리스도교를 떠난 이들로 이루어진 민중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구체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이 구체적이고도 전적인 우정이 때로는 힘겨우면서도, 언제나 위안을 주는 단 하나의 진정한 길이며, 이 길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 세상에서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사제가 되기로 했던 결정에 대해 재고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며, 이제 더 이상 허락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1967년 4월 트롱시엔느 수도원 만남의 날 발표문) 

 

에지드 반 브루크호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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