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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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을까?
  • 한상봉
  • 승인 2016.06.07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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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으로 가는 길, 로버트 엘스버그를 만나다-2

가톨릭일꾼운동은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1933년 5월 <가톨릭일꾼(Catholic Worker)> 신문을 발행하면서 미국 뉴욕에서 시작되었다. 일꾼운동은 지난 80년 동안 줄곧 노숙인들을 위한 환대의 집을 열고, 시대의 징표를 공동으로 식별하기 위해 원탁토론회를 진행하고, 농경공동체를 만들고, 그리스도교 평화운동을 전개해 온 현재진행형인 ‘자발적인’ 평신도운동이다.

도로시 데이는 일꾼운동이 성과주의에 매몰되지 않도록 조심했으며,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존엄한 인격임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목적은 성인됨에 있다.”고 여겼다. 결국 일꾼운동은 순례하는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여정 속에서 ‘관상과 실천’을 통해 거룩함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었다.

한국에 이러한 운동을 소개하기 위해 2016년 2월 뉴욕을 찾아가 메리하우스와 성요셉하우스 등을 방문하고, 도로시 데이 말년에 <가톨릭일꾼> 신문 편집장을 맡았던 로버트 엘스버그(Robert Ellsburg)를 만나 인터뷰를 청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하버드 대학교 재학 중인 1975년 도로시 데이 를 만나 <가톨릭일꾼>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198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교로 돌아가 종교와 문학을 공부하고,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변화된 모습을 경험했다. 1987년 같은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메리놀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오르비스(Orbis) 출판사 편집장을 28년째 맡고 있다. 그동안 <모든 성인들>과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등을 썼다. 도로시 데이 시성 추진위원회와 헨리 나웬 재단 위원이며, 현재 세 자녀와 함께 미국 뉴욕주 오시닝에 살고 있다.

-간디를 ‘마하트마’라고 부르는데, 도로시 데이도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세인트(Saint), 성인이라는 말이 그런 거겠죠.

로버트 엘스버그

사실 ‘세인트’나 ‘마하트마’는 단어일 뿐이고, 도로시 데이에게 ‘성인’이라고 말하면 본인이 정말로 싫어했을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고, 자신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성인처럼 살 수 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을 특출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인’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성인은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해내고, 내가 본받고 싶은 것, 내가 할 수 없지만 필요한 것에 의 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성인들보다 영화배우나 운동선수 등 유명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축에 끼죠. 사람들은 이런 유명인들에 대해 읽고 부러워하면서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지니면 그 사람을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흠모하는지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때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성인을 따라갈지, 아니면 미디어에서 접할 수 있는 연예인들을 신경 쓰며 따라갈지 말입니다.

<환대하는 삶>을 지은 로버트 콜스는 시몬 베유와 도로시 데이를 비교하면서, 시몬 베유는 공감의 천재라서 우리 같은 사람이 따라 살기 어렵지만 도로시 데이처럼 살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 다. 누구나 그렇게 살수 있다면 그게 ‘성인됨의 보편성’일 텐데, 성인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인이 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우리의 불완전한 모습, 이를테면 성욕이나 욕심, 갖고 싶은 물건 등이 있을 때, 그걸 억제하면서 힘들게 사는 부정적인 방법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용서하고 좀 더 인내하면서 노력하는 긍정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식은 사람의 마음을 완고 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티끌을 더 많이 보게 합니다. 나를 용서하지도 못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도로시 데이는 누구보다 자기 단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매일매일 양심성찰을 했어요. 도로시데이는 ‘사랑하는 것’을 궁극적인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갈망, 인정받고 싶은 욕구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마음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까, 늘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평상시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또 무엇을 추구하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을 따라가고 싶고, 닮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내가 그리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사람을 보면 어느 때는 이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런저런 잣대질을 하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평가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렇지만 도로시 데이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서, 무조건 이상만 주장하지 않았어요. 당장에 내 옆에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죠.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상태인 지,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살피지 않는다면 궁극적인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싶어 하는 사회정의와 형제애 같은 것도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면 낭패를 봅니다. 작은 그림을 잘 그려야 큰 그림도 잘 그릴 수 있어요.

-도로시 데이와 토머스 머튼은 각별한 관계였던 모양인데, 두 분의 공통점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토머스 머튼

두 분은 비슷한 게 많아요. 머튼도 도로시도 개종하신 분들이고,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점은 한 사람은 세상에 온전히 투신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고요, 또 사람은 비교적 보수적인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사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토머스 머튼은 사는 동안 많은 회심을 거 쳤고, 신학적 탐구 등 항상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어요. 아마 머튼은 수도원 안에서 그런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나중에 회심한 뒤로는 ‘모든 게 하나’라고 생각한 거죠. 세상 밖에 있는 것과 세상 안에 있는 것이 하나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수도원 안팎의 경계를 넘어 선 거죠.

그 뒤로는 반전 평화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이렇게 관점이 바뀌면서 도로시 데이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가톨릭일꾼> 신문에 머튼이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글을 연재하게 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자비의 일’에만 집중하다가, 점점 시야가 넓어져서 평화운동과 혁명적인 사회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가톨릭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인간과 세상에 자신을 개방했다는 것입니다. 머튼은 수도원에서 봉쇄되어 있었지만 열린 시각으로 모두를 위해 편지를 쓰고 책을 썼어요. 관심이 교회와 신자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거죠. 최근에 프란치스코 교종이 환경문제를 다룬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낸 것처럼, 가톨릭 신자들만 모여서 잘 하자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향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그래서 교회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과 환경, 이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그러면 누가 거룩함을 사는 성인인가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성인은 절차를 거쳐서 교회가 지정해준 성인이겠죠. 그러나 내 생각에는, 교회에서 지정된 성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면 당연히 누구나 성인의 길을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분들도 한순간에 성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같이 회심의 계기가 갑작스럽게 주어진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의 성인들은 그냥 제 삶을 소박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사는 방식이 일반적인 사람이 할 수 없는 남다른 경우도 있고,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삶도 있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 사람들 중에서 ‘이 사람은 정말 성인의 반열에 올려서 본받게 해야지.’ 하고 교회가 판단해서 성인이 되는 거죠. 사실은 일상생활 속에서 성 인처럼 살려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모두 성인입니다. 그런 삶의 방식이 더 중요합니다.

성인이 누구인지는 혈액형처럼 과학적으로 테스트할 수 있거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은 예술작품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음악 중에서 어떤 곡을 들었을 때, 유난히 그 곡 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면 내게는 정말 의미 있는 음악이겠죠. 이런 예술적 감흥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생생한 경험 입니다. 교회에서 성인품에 오르려면, 마치 과학적인 실험을 하듯이, 변호사도 들어가고 역사학자도 들어가서 기적 심사 등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고 통과되어야 하는데,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인이란 그 사람의 삶을 보았을 때 어딘가 하느님이 계시겠구나, 느끼게 하는 분입니다. 그 사람의 어떤 측면이 나의 양심을 건드리거나,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거나,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충격이 있으면 성인으로 삼아도 좋을 것입니다. 음악의 종류도 많지만 어떤 음악은 별 볼일 없는 것도 있고, 어떤 음악은 무엇인가 와서 탁 치는 음악이 있듯이, 누가 테스트 해 줄 수는 없고 객관적 시각으로 봐줄 수 없지만, 나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 이런 것도 성인을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성인이란 벽에 박혀 있는 그림이나, 1시간짜리 음악처럼 정형화된 모습이 아닙니다. 양치질하는 것처럼 한 순간에 성인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30년, 40년, 50년, 60년, 그 전체의 삶을 통하여 성인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톨릭일꾼 신문

-토머스 머튼이 처음 가톨릭 신자가 된다고 했을 때, 친구였던 랙스가 머튼에게 가르쳐 준 성인이 되는 방법은 “성인이 되기를 갈망함으로써.”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성인이 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조언해 주신다면.

성인이 되는 길은 1, 2, 3, 4... 이런 식으로 단계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다만 내 삶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어떤 마음과 의도를 지니고 살아갈지 고민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중에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예수의 복음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현대사회가 강요하는 소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송과 광고로 뒤덮인 세상에 서, 잠시 시끄러운 소리를 끄고 나 자신의 내면으로 자꾸 들어가서 내면의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뭐가 좋다더라, 하는 소음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어요. 그래서 물리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내 내면의 소리, 하느님이 내게 하고자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그렇게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내공이 쌓여야 세상을 위해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게 성인 되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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