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은총에 민감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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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은총에 민감하게 만든다
  • 한상봉
  • 승인 2016.05.31 12: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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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 단계-6: 고통, 첫번째 이야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다양한 형태의 고통에 대해 말했다. 헛된 사랑, 그리고 걱정과 흥분, 실망과 두려움, 다툼, 논쟁, 전쟁, 반역, 미움, 격앙된 기쁨이다. 이밖에도 재난에 대한 두려움, 사기와 상실감, 자연재해와 더위 또는 추위, 폭풍과 태풍과 홍수, 천둥과 번개, 우박과 서리, 지진과 지각변동, 건물 붕괴, 야생동물의 습격과 예기치 않은 사고도 있다.

이런 고통 이야기는 끝없이 나열할 수 있다. 몸이든 마음이든 질병이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질병을 피했다 해도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병에 걸린다. 우리는 그들의 근심을 함께 느낀다. 심지어 애완동물을 기르면서도 상실감과 슬픔을 배운다. 이처럼 고통은 존재 깊숙이 파고 들어와 우리 삶에 얽혀 있다. 그 갈래를 잡아당기면 나머지 부분이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 채 딸려 온다. 그래서 우리는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상봉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가 지은 <준주성범>에서 현실적 고통을 넘어서는 법을 배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십자가는 언제나 대기중”이라고 했다. 고통스런 십자가는 어디서나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이 어디로 도망가든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대안이 이것이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십자가가 당신을 질 것이며, 당신이 원하는 목표로 이끌어 갈 것이다. 더 이상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기꺼이 지지 않으면 짐이 되어 당신을 짓누를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쫓아버리면 더 무거운 십자가가 쫓아올 것이다.”

때때로 고통이 우리 안에서 기적을 낳는다.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편안해지며, 다른 고통 받는 사람들 곁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연민과 유대감을 보여줄 수 있다. 성인들은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께 더 가까워졌으며, 이웃에 대한 연민으로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고통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출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통제하거나 피할 수 없지만, 고통 가운데 어떤 태도를 취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안락과 사치 한가운데서 비참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성인들처럼 고통 한가운데서 행복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의 중심이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초기교회의 교부들은 ‘쥐덫’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의 심연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덫이 튀어 올라도 우리는 잡히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천둥과 서리, ‘무너져 내리는 빌딩’의 땅 저편, 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상의 ‘고요한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런 중심에 자리 잡고 살 수 있을까?

수레바퀴의 중심, 하느님 안에서

<철학의 위안>을 쓴 보에티우스 성인은 ‘철학부인’의 입을 통해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수레바퀴의 가장자리에 머물기보다 중심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함없는 중심인 하느님을 향해 움직이라는 요청이다. <거룩한 위안>을 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참으로 완전한 사람은 자아에 죽고 하느님께 사로잡혀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고 했다.

이 책에서 에크하르트는 다소 식상하지만 ‘사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참으로 위로받고 싶으면 자기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더 못 사는 사람을 생각하라”고 조언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면, 다른 길을 갔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만약 다른 길로 갔다면 더 심각한 상황이 왔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스버그도 지적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힘내세요! 하느님 닮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럴 때는 그저 고통 받는 이에게 연민에 가득 찬 ‘친절’을 베푸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통 한가운데서 자비와 연민의 근원을 만날 수 있다. 이를 두고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함께 아파하신다.”고 말했다. 친구의 공감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듯이, 우리를 연민으로 보시는 하느님한테서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그처럼 고통은 그런 자비의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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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겪지 않은 성인은 없다

성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받은 오히려 고통을 자랑스러워한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4-27)

고통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과정에서 겪는 ‘정화의 도가니’라는 뜻이다. 실제 많은 성인들이 ‘회심’을 앞두고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프란치스코는 허영심에 들떠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와 병을 앓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전기 작가 첼라노는 “그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예전에 추구하던 것을 경멸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예수회 창립자 로욜라 이냐시오는 전쟁터에서 프랑스군의 포탄에 맞아 다리가 부러졌다. 몇 차례에 걸친 수술로 고통을 겪으면서 이냐시오는 성인전을 읽고 큰 감명을 받고 성 프란치스코나 성 도미니코와 같이 ‘영적 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제 수레바퀴의 가장자리를 맴돌지 않고 중심을 향해 돌진하기로 작정했다.

고통은 영적 안내자

고통은 은총에 민감하게 만든다. 영국의 신비가인 노리치의 줄리안은 <거룩한 사랑의 계시>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실감나게 느끼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세 가지 상처를 바랐다. 회개의 아픔으로 인한 상처, 불쌍한 이들과 고통을 나누는 연민의 상처,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상처다. 줄리안 역시 나흘 밤낮을 의식불명 상태에서 고통을 겪다가 병자성사를 받고 고통과 비탄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줄리안은 인간의 몸으로 고통 받는 예수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가 왜? 누구를 위해 고통 받았는지 묵상하면서 하느님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 책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줄리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고통을 받았다. 이제 만족하는가? 네가 만족한다면 나도 만족한다. 너를 위해 수난 받는 것이 나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며 한없는 즐거움이다. 내가 고통을 더 받을 수만 있다면 더 받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쁨’ 안에서 고통을 받았다. 여기서 드러난 그분의 한없는 사랑은, 그래서 한(恨)없는 사랑이다. 이것은 단순히 네 죄를 내가 대신 지고 고통을 받았다는 식의 ‘대속신앙’을 넘어선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기꺼이 고통을 자청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서 함께 계시려는 연민이 우리를 구원한다.

성인들이 고통을 만감하게 느끼고 기꺼이 받아낸 이유는 “쟁기가 굳은 땅을 엎어 물이 스며들게 하듯이, 고통도 굳은 마음을 열어 지혜를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라고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에서 말한다. 이처럼 우리를 거룩한 실존으로 나아가게 하는 고통을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수동적 축소’라고 부른다. 우리는 성취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힘뿐 아니라 약함에 의해 우리가 누구인지, 그분이 누구신지 깨닫게 된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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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진선 2016-06-01 06:29:42
고통에 대한 한(恨)없는 사랑이야말로 경천애인이라는 한(限)없는 사랑으로 통하겠지요! 좋은 묵상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