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는 신앙은 환상이다
상태바
상처 없는 신앙은 환상이다
  • 한상봉
  • 승인 2019.04.30 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처 입은 신앙>, 토마시 할리크, 분도출판사, 2018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8년 4월 15일 로마 근교 성 바이로 성당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어린 소년이 성당 앞에 놓인 마이크 앞에서 교종에게 질문하려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에마누엘레(Emanuele)였다. 자기 차례가 왔지만,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교종은 흐느껴 우는 소년을 불러 포용해 주었고, 두 사람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에마누엘레는 최근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 울고 있다면서 “아빠가 무신론자”이며, 자녀 4명 모두 세례를 받게 했다고 전했다. 소년은 교종에게 “아빠가 천국에 가셨을까요?”라고 물었다. 교종은 “아버지가 이런 아이를 키워냈다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교종은 천국에 갈 사람은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이 정하는 것이라며 앞에 앉은 청중들에게 물었다. “좋은 사람인 에마누엘레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하느님께서 버릴 거라고 생각하느냐?” 청중들은 “아니요!”라고 소리쳤다. 교종은 “에마누엘레, 그게 대답이야.” 하고 소년에게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무신론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3년 9월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에 보낸 기고문에서 교종은 “하느님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살면 된다.”고 밝혔다. 2017년 2월 23일 미사 강론에서는 “위선적인 이중생활을 하는 많은 신자보다 무신론자가 더 낫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매우 가톨릭적이다. 항상 미사에 참석한다. 여기저기 단체에 가입한다.’고 말하는 이들입니다. ... 그러나 이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내 인생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았다. 나는 내 종업원들에게 적절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착취한다. 나는 더러운 비즈니스를 한다. 나는 돈을 세탁한다. 나는 이중생활을 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교종은 “저런 사람이 가톨릭이라면 나는 차라리 무신론자가 되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상황을 슬퍼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을 세상에서 조롱받게 하고,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선교 사명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믿는 하느님이라면 이미 하느님이 아니다. 그런 하느님은 죽었다. 그래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 우리가 죽였다. 너희와 내가!”라고 외쳤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이 상처를 다룬 책이 토마시 할리크의 <상처입은 신앙>(분도, 2018)이다. 토마시 할리크는 체코 출신의 사제로서, 1989년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붕괴된 뒤로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외부자문단으로 일했고, 체코 주교회의 총대리를 역임했으며,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황청 비신자대화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당신의 상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할리크는 계몽주의 이후 신의 죽음이 선포되고, 두 차례나 참혹한 세계전쟁을 치른 뒤에 하느님의 죽음이 결정적인 사실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종교가 다시 돌아 왔다”는 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소식이 복음인지 흉음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도대체 어떤 종교가, 어떤 하느님이 돌아왔다는 소리인가? 저마다 믿고 있는 하느님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리고 예수님의 하느님’, 즉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무슬림이 믿는 유일신이 돌아왔는가? 아니면 계몽주의자들이 발견한 신, 정치적 선언의 수사이며 헌법 전문에 들어 있는 최고존재인 ‘철학자의 신’이 귀환했는가? 메말라 버린 인간의 마음에 나지막이 대답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하느님이 돌아 왔는가? 아니면 반대로 심각한 피해를 주는 전쟁과 복수의 신이 돌아 왔는가? 우리가 구닥다리에다 우스꽝스럽고 냉소적인 우상들의 새로운 왕림에 기뻐해야 하는가?”

여기서 할리크는 마르티노 성인에게 한번은 사탄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성인은 사탄에게 속지 않았는데, 성인이 사탄에게 이렇게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사도가 만졌던) 당신의 상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하느님은 “상처 입은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할리크는 피 흘린 적도, 상처 자국도 흉터도 없는, 상처 입지 않은 신, 이 세상에서 내내 춤만 추는 신들과 종교들을 믿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것들은 오늘날 종교시장에서 그들의 휘황찬란한 매력만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지나 하느님께 나아갈 때, 가난한 자들의 문, 상처 입은 자들의 문을 지날 때에 오히려 고향의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할리크는 인도에서 토마스 사도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전설이 있는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톨릭단체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닭장 같은 작은 침대에 버려진 아이들이 누워 있었다. 배고픔으로 배가 부풀어 올라 있었고, 앙상한 뼈는 염증으로 뒤덮인 피부에 싸여 있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복도 곳곳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그들의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붉은 손바닥을 나를 향해 뻗었다. 그 악취와 울음 한가운데서 나는 심리적, 육체적, 양심적으로 아주 힘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때때로 고통받는 이들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함과 불타오르는 수치심으로 질식할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건강한 피부, 포만한 배, 깨끗한 침대 그리고 거처할 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비겁하게 가능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눈과 마음을 닫고 잊고 싶었다. 아이들이 고통받는다면 신에게 이 세상의 ‘입장권’을 ‘반납’할 것이라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할리크의 마음속에서 ‘내 상처를 만져 보시오!’ 하는 문장이 솟구치고, “당신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살펴보시오. 그리고 당신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시오.”라는 말씀이 들렸다. 예수는 모든 작은 이와 고통받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모든 이, 세상과 인간의 온갖 고통은 ‘그리스도의 상처’다. 오늘날 이 세상에도 여전히 가득한 그분의 상처를 만질 때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토마스 사도처럼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헛되이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분의 상처가 만져지지 않는 곳에 그분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상처를 보고 만져야 하고, 그 상처에 의해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내가 타인의 상처에 무관심하고 냉담하고, 상처받지 않은 채로 있다면,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보지 않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할리크는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눈을 감는 신앙은 환상이거나 마약”이라고 말한다. 그런 신앙 앞에서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가 퍼부은 종교 비판이 옳다.

 

토마스의 의심. 루벤스

다른 이들의 상처를 만질 때마다

우리는 직접 제 눈을 보고 제 손으로 만져보고서야 부활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토마스 사도를 믿음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은 제자라고 힐난하는 소리를 들어 왔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목숨을 걸고 스승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라자로에게 갔을 때, 예수님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려 보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다른 제자들의 행동에 쉽게 동조하지 않고,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려고 했다. 상처만이 그분이 그분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하였기에 참된 기쁨이 된다. 예수님은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1코린 13,7)는 것을, ‘큰물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하고, 죽음처럼 강한 사랑’(아가 8,6-7)을,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처럼 사랑이란 죽음을 이기고 꿰뚫린 손으로 죽음의 문을 부수는 유일한 힘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그분의 요청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고통의 불길을 완전히 끌 수 없더라도 이 고통의 불길 앞에 항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악에 직면해서 악에게 최종 결정권을 내맡겨서는 안 된다. 세상의 기준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곳에서도, “사랑을 믿는 것”(1요한 4,16)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지혜에 맞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믿어야 한다!”(1코린 4,10)

예수님은 토마스 사도에게 자신의 상처를 만지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상처를 만질 때마다 그분을 기억하기를 바랐던 것인지 모른다. 할리크는 인도 첸나이의 보육원에서 번개가 내리치듯이 이런 말씀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들었다.

“네가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거기에서, 어쩌면 그곳에서만 너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에서 나를 만난다. 이 만남을 피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불신하지 말고 믿어라!”

할리크는 구약의 주님이신 하느님이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난 것처럼, 그분의 외아들은 고통의 불꽃, 십자나무에서 나타났다고 전한다.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타인의 짐도 기꺼이 나누어 질 때, 세상의 상처 자국이, 그분의 상처 자국이 우리에게 특별한 부르심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그분의 외침을 알아듣는다고 했다.

토마스 사도는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하느님을 만지고, 그곳에서만 확실한 믿음을 얻고, 그곳에서만 부활하신 분과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할리크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교회가 제공하는 전통적인 환경, 강론, 미사와 교리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없다면, 그들을 위한 다른 가능성도 늘 열려 있다.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곳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할리크는 성경이 풀어내는 역사는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이 아니라, 번민에 가득 찬 드라마라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오늘날의 세상과 마찬가지로 피비린내 나는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니고 있다. 성경에서 고백하는 하느님도 이 상처를 지니고 계신다. 이 상처 입은 하느님은 백성들과 함께 느끼고, 함께 고통받고, 함께 기뻐하는 분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상처입은 치유자, 그리스도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은 고대 현자 중 한 사람의 고귀한 덕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나 저항하는 노예로 죽임을 당한 한 남자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이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진술은 단 하나뿐이다. ‘의심하는’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분을 만났을 때 외친 이 말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토마스에게 예수님은 세상의 많은 이들처럼 ‘상처 입은’ 하느님이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의 간극 없는 ‘연대’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의 거울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를 회피하지 못한 증인의 삶은 이런 식으로 끝난다. 우리는 그 거울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진 악과 폭력을 본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던 세상의 모든 끔찍한 일은 악한 인간들의 행위에 의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선한’ 인간들의 무관심과 행동하지 않음으로 일어난다.

“보시오, 이 사람이오!”(Ecce homo)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보여준 그 사람은 “그 앞에 선 이가 얼굴을 가릴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이사 52,3) 모든 영광과 권능, 위엄과 인간의 위대함은 사라지고, 피 흘리는 거대한 살덩어리처럼 서 있던 분이 예수님이었다. 권력자의 법정과 광분한 군중 앞에서 채찍질당하는 그 사람은 ‘아래에/변방에’ 속한 분이었다. 죽음의 구렁텅이 앞에 선 사람, 더 이상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 전적으로 타자의 악함에 농락당하는 사람, 포박된 물건처럼 적들의 손에 완전히 넘겨진 사람, 대사제, 빌라도, 헤로데, 군인들과 사형집행인이 서로에게 떠넘긴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한 사람의 성금요일 없이 부활절 아침은 없다고 믿는다.

빌라도는 “보시오, 이 사람이오!” 하였지만,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보시오, 이 하느님이오!”(Ecce Deus) 하고 말한다. 법정에 서고 고통받던 그 사람이 우리에겐 ‘하느님’이라는 고백이다. 토마스 사도는 ‘부활한 자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같은 분’임을 고백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기 자신과 보잘 것 없는 형제들, 자신처럼 상처 입은 자들과 동일시하였다는 사실은,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요한 14,6)라는 예수님 말씀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가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에게로 간다. 그리스도를 본 사람이 하느님을 본 사람이라면,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에게로 가는 문이다.

“인간이 고통받는 곳에 예수가 있다. 우리 주위 도처에 있는 그들은, 그리고 그들 안에서 예수는 ‘기회’이며, 성부께 가는 열린 문과 같다. 그런데 예수가 없는 곳이 있는가? 예수가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스스로를 정의로운 선지자라 여기는 사람들,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예수의 말씀으로 문 앞에 차단기를 세우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들어가는 대신 다른 이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부들부들 떨며 문 앞을 지키고 있다. 이런 이들 곁에, 이들 안에 예수는 없다.”

 

피에타(Pieta) 이그나츠 귄터의 조각(1668)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그리스도인

할리크는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 영혼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물질은 하느님 현존의 효과적인 표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얼굴은 이 세상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다.” 다만 베로니카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만 예수님의 참된 얼굴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 주님” 하면서 그분께 기도하더라도, 집 안에 성화를 걸어놓는다 하더라도 베로니카가 했듯이 그분의 얼굴을 닦아주지 않는다면, 성 밖으로 나가 고통받는 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나병 걸린 세상의 진료소에서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에 드리워진 베일 때문에 예수님 얼굴을 발견할 수 없다. 베로니카가 내밀었던 베일에 찍힌 그리스도의 얼굴은 바로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그리스도의 상흔, 그분의 피 흘리는 얼굴, 모든 시대의 악으로 뭇매를 맞은 얼굴을 내면에 간직한 이들 중 첫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여성적 측면은 성금요일 오후와 부활절 아침 사이 침묵의 시간에 놓여 있다. 바로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를 표현한 피에타다. 십자가의 길 13처의 주제이기도 한 피에타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는 지난 세기의 전쟁에서, 죽은 자식을 두고 고통받던 수많은 어머니들의 마음과 상통한다. 그 시간은 정말 참혹한 순간이다. 성자가 죽고, 성부는 침묵하고, 성령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이 절망 속에서 성자의 육체가 땅의 품에 묻히기 전에, 아들은 잠시 동안 어머니의 품에서 안식을 누렸다. 세상에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상처와 흉터가 남아 있다. 4.3 제주에서, 4.16 세월호에서, 5.18 광주에서 죽은 자식을 지금도 가슴에 묻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할리크는 언제나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기에 앞서 심장이 꿰뚫린 십자가를 ‘기억’하자고 제안한다.

“누군가는 마리아처럼 깨어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이 고통을 ‘자신의 품에 안아야’ 한다. 누군가는 이 고통이 잊히는 것을 막아야 하며, 누군가는 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루카 2,50) 누군가는 골고타의 그늘에서부터 부활절 새벽의 여명까지 이 고통을 자신의 품과 마음에 지고 가야 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