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육신을 넘어 육신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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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육신을 넘어 육신을 통해서
  • 한상봉
  • 승인 2019.04.2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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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조연들-25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의 의심하는 성 토마스 (T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2)

저는 유다의 땅을 떠나 아주 멀리 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제 발로 꾹꾹 눌러가며 대지를 밟아갑니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돌부리와 메마른 흙덩이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복사뼈를 스치며 작고 가느다란 상처를 남기는 날카로운 풀잎마저 제가 살아있음을 알려주기에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하루의 휴식을 청하는 저녁에 언덕에 서서 바라보는 황혼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마지막 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저렇게 아름답습니다. 모든 발밑의 미물조차도 제 목숨을 한껏 노래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방인들 속에서 오히려 낯설게 다가오는 제 모습이 다시 보이고, 옷깃을 여미는 순간 달려드는 이역(異域)의 아이들이 동무처럼 혈족처럼 가깝게 느껴집니다.

다른 형제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고, 저는 그 무리를 떠나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엾은 제 백성들에게로 돌아갔고, 저는 새로운 백성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는 육신으로 만질 수 없는 그분을 떠올리며, 이제야 그분처럼 광야로 가는 것입니다.

길목에서 빵을 구걸하던 아이들을 만나 축복하고, 부질없이 제 이름에 사로잡힌 자들에게서 허망한 공명심(功名心)을 거두어들입니다. 부유한 상인들에게 제 남루한 행색을 보여주고 밝은 얼굴로 투명한 시선을 나누어 줍니다. 보잘것없는 물질적인 형태에 축복하면서 정작 그 물질을 떠나고 있습니다. 여행자는 몸이 가벼워야 하고 짐은 덜어내야 합니다. 오로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찾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단히 기억하고, 그분의 자비에 온전히 기대어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뒤 며칠이 지나고, 마리아 막달레나의 전갈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가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빈 무덤. 무덤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덤이 생애의 종착역이라면, 결국 생애의 끝자락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 공허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우리가 안달하던 모든 욕심이 한 줌 햇볕에도 마르는 이슬처럼 사라질 때, 우린 어떤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된다는 거지요. 그분은 영이시니 그때에 우리도 영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내가 가진 소유를 모두 버리고 마음이 영점(零點, zero)에 이를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분이 사시도록 허락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깨달음은 물질을 통해 물질을 넘어서 발생합니다. 육신을 통해 육신을 넘어서 전달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앞에서 제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제가 바깥을 살피러 나가고 없는 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다녀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며,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경험한 것이었고, 저는 제 눈으로 직접 그분을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경험한 것이 온전히 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다 해서, 그래서 모세가 달라졌다고 한들, 그것은 참고는 될지언정 제 영혼을 바닥에서 흔들지는 못합니다. 누구나 하느님에 대한 고유한 경험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은 수시로 때때로 사람들 안에서 고유한 형상으로 다시 발견되어야 하고, 다시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나는 아직 그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소동이 있고 나서 여드레 뒤에 그분이 정작 제 앞에 나타나시고,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셨을 때, 제 입에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를 만져보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분이 나타나시는 순간 이미 그분의 몸이 제 몸속으로 들어오고, 그분의 안타까운 심경이 저를 온통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상처와 함께 저를 찾아주셨고, 저는 이미 마음으로 그분을 갈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신 마지막 말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제 인생의 새로운 빗장을 열어주는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본 것은 그분의 일부라는 것이지요. 그저 실마리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제 육안(肉眼)으로 보이지 않는 그분의 전부를 알기 위하여 더 먼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 심안(心眼)으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분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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