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다시 아버지에게로, 경쟁심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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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다시 아버지에게로, 경쟁심을 버려라
  • 헨리 나웬
  • 승인 2019.04.15 2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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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9] 큰 아들의 귀환-7

작은 아들이 극적으로 돌아왔을 때 보이는 아버지의 기쁨은 큰 아들이 덜 사랑받고, 덜 인정받고, 덜 호의를 받았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모두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개별적인 여정에 따라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들 모두를 친밀하게 알고 있다. 아버지는 그들이 지닌 너무나 고유한 선물과 결함을 이해한다. 아버지는 사랑으로 작은 아들의 욕망을, 비록 그 욕망이 순종에 의해 조절되지 않을 때에도, 바라본다. 똑같은 사랑으로 아버지는 큰 아들의 순종을, 비록 그것이 열정에 의해 활력을 갖지 못할 때에도, 보고 있다.

작은 아들에 관해서 아버지가 적든 많든 좋거나 나쁜 생각이 없는 것처럼, 큰 아들에 대해서도 그를 판단하는 아무런 잣대가 없다. 아버지는 그들의 고유함에 따라 응답하고 있다. 작은 아들의 귀향은 아버지가 기쁜 잔치를 베풀도록 한다. 큰 아들의 귀환은 아버지로 하여금 그 기쁨에 큰 아들이 온전히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고 예수님은 말한다. 하느님의 모든 자녀는 각각 그들의 고유한 자리를, 하느님 안에서 모두 그들의 자리를 갖고 있다. 나는 모든 비교, 모든 경쟁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사랑에 승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신앙의 도약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비교하지 않는 사랑의 경험이 별로 없고 그러한 사랑이 갖는 치유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둠에 싸인 집 바깥에 머물러 있는 한, 나는 나의 비교로부터 나오는 원망에 찬 불평 속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빛의 바깥에서 보면, 나의 동생은 아버지의 사랑을 나보다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실상, 빛 바깥에서는, 동생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하느님은 나를 집에 오라고 초대한다. 그분의 빛 속으로 들어오고,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고유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사랑받고 있음을 발견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하느님의 빛 속에서 나는 마침내 나의 이웃을 나의 형제로, 내가 그런 것만큼 나의 이웃도 하느님께 속한 존재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집 바깥에서는 형제와 자매들, 남편들과 아내들, 연인들과 친구들이 경쟁자로 적으로 변해버린다. 각자는 끊임없이 질투심, 의심, 그리고 원망에 젖어들고 만다.

큰아들에게 더이상 동생도 아버지도 없다

분노 속에서 큰 아들이 아버지한테 불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이 말들은 큰 아들이 얼마나 깊게 상처받았는지 보여준다. 큰 아들의 자부심은 아버지의 기쁨에 의해 고통스럽게 상처 입었고, 그 자신의 분노는 돌아온 불한당 같은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당신의 저 아들”이란 말로 큰 아들은 동생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도 자신에게서 밀어 내고 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동생 모두를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탕자의 삶에 관한 실상을 고려할 때 완전히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방인들처럼 보고 있다. 큰 아들은 더 이상 동생이 없다. 더 이상 아버지도 없다. 두 사람 모두가 큰 아들에게는 낯선 사람들이 되었다. 동생은 죄인이고, 큰 아들은 오만하게 동생을 깔보고 있다. 아버지를 노예소유주로 보며, 큰 아들은 두려움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여기에서 나는 ‘큰 아들이 어떻게 잃어버려지는지’ 본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이방인이 된다. 진정한 통교는 사라진다. 모든 관계는 어둠에 뒤덮인다. 두려워하거나 경멸하거나, 승복을 괴로워하거나 지배를 강화하거나, 억압자가 되거나 희생자가 되거나. 이런 모든 태도들은 빛의 바깥에서 하는 선택들이다. 죄는 고백될 수 없고, 용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고, 사랑의 상호성은 존재할 수 없다. 참다운 통교는 불가능하다.

나는 이런 곤경에서 오는 고통을 알고 있다. 그런 지경에서는 모든 것이 그 자발성을 잃는다. 모든 것은 의심스러워지고, 자아를 의식하며, 계산하고, 온갖 사전 추측으로 가득 찬다. 더 이상 아무런 신뢰도 없다. 모든 작은 행동 하나 하나에도 대응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작은 움직임 하나도 분석의 대상이 된다. 가장 작은 행동도 평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어둠의 병리학이다.

그렇다면 나갈 길이 있는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 적어도 내 편에서는. 그 어둠으로부터 탈피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어둠은 더 짙어지는 것 같은 때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빛이 필요하지만, 그 빛은 내 어둠을 정복해야만 올 수 있고, 그것을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할 수 없다. 내 힘으로는 나의 분노의 땅을 떠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에게 집을 가져다 줄 수 없고 나 스스로 통교를 이룰 수 없다.

나는 그것을 갈망하고 희망하고 기다리고, 그렇다,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나의 참다운 자유는 내가 스스로 직조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질 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잃어버렸다. 나는 나를 찾으러 나온 목자에 의해 발견되고 집으로 이끌려 가야만 한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나를 찾아 나서고 나를 찾을 때까지는 쉴 수 없는 하느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격려하고 그분은 간청한다. 그 분은 나에게 죽음의 세력에 매달리는 것을 그만두고 내가 가장 갈망하는 생명을 찾게 될 그 자리로 나를 이끌어 가는 품안에 안기라고 애원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길

최근에 나는 매우 구체적으로 나의 몸으로, 큰 아들로서의 귀환을 경험하고 살았다. 차를 얻어 타려고 길을 걷고 있을 때, 나는 차에 치었고 거의 죽음 직전의 상태로 병원에 있게 되었다. 갑자기 나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원망을 여전히 붙잡고 죽을 수는 없다는 통찰의 강력한 빛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나의 청년기의 불만을 쉬게 하고 동생들보다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거짓말을 포기하라는 부름을 강력하게 느꼈다. 매우 두려웠지만 매우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참 후에 아버지가 네덜란드에서 나를 방문하러 비행기를 타고 왔을 때, 나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주장할 순간이 바로 이때임을 깨달았다. 일생 처음으로, 나는 아버지에게 그분을 사랑했고 나에게 보여준 그분의 사랑에 감사한다고 명확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전에 결코 말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말했고 그런 말을 하는데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놀랐다. 아버지도 얼마간 놀랐고 이 모든 상황에 당황했으나 내 말을 이해했고 웃었다.

이 영적인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그것이 참다운 귀환이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없는 인간적 아버지에게 거짓으로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나는 너와 항상 함께 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너의 것이다.”라고 말씀하는 거룩한 아버지에게 진정으로 의존하며 돌아가는 것이었음을 안다. 또한 불평하고 비교하고 원망하는 자아로부터 사랑을 주고받는 나의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돌아옴 후에도 많은 역행들이 있었고 의심할 바 없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이때를 계기로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고 나 자신의 죽음을 죽는 자유를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아버지들이 그분으로부터 이름을 받는 하느님 아버지”(에페 3,14-15)께로 돌아가는 일은 나로 하여금 지상의 아버지가 선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는 분임을 허용하도록 했다. 아울러 하늘에 계신 나의 하느님 아버지의 한계가 없고 조건이 없는 사랑이 모든 원망과 분노를 녹이고, 내가 누구를 만족시키거나 승인을 받기 위한 모든 필요를 넘어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해 주었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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