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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하느님은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8] 큰 아들의 귀환-6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 가 나와 그를 들어오라고 타일렀다. ...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8. 31-32)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큰 아들의 돌아옴도 원하고 있다. 큰 아들 역시 다시 찾아져야 하고 기쁨의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간청에 응답할 것인가, 아니면 원망과 회한 속에 그냥 머물러 있을 것인가? 렘브란트도 큰 아들의 마지막 결정을 의문으로 남겨 놓는다. 바바라 조안 헤거는 이렇게 쓴다: “렘브란트는 큰 아들이 빛을 보는지 혹은 보지 못하는지를 밝히지 않는다. 렘브란트는 큰 아들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으므로, 큰 아들도 자신이 깨달을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있다. ... 다시 말하자면 큰 아들의 반응에 대한 해석을 관중에게 남겨놓는 것이다.”

아버지는 큰아들도 사랑한다

복음서 비유의 열린 결말과 렘브란트의 똑같은 묘사는 나에게 많은 영적 작업을 숙제로 남긴다. 큰 아들의 빛을 받은 얼굴을 바라보고, 이어 어둠속에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면서, 나는 단지 그의 속박상태를 느낄 뿐만 아니라, 해방의 가능성도 느낀다. 이야기는 두 형제를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갈라놓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버지 홀로 선한 분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다 사랑한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뛰어나가 마중한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가 그분의 식탁에 앉고 기쁨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작은 아들은 용서하는 품안에 안기며 자신을 내어 맡긴다. 큰 아들은 뒤에 물러서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자세를 바라보며 자신의 분노를 넘어서지 못하고 아버지가 그를 치유하도록 맡기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그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무리 우리 모두의 내적 어둠을 치유하고자 원해도,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러 있거나 하느님의 사랑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느님은 거기에 계시다. 하느님의 빛은 거기에 있다. 하느님의 용서가 거기에 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그곳에 있다.

너무나 명백한 점은 하느님이 항상 그곳에 계시고, 항상 주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고, 우리의 응답과는 전혀 상관없이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참회나 우리의 내적, 외적 변화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내가 작은 아들이든 큰 아들이든, 하느님의 유일한 갈망은 나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아서 후리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 각자를 사랑하고 각자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자유를 주지만, 아들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나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할 자유를 줄 수는 없다. 아버지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관습을 넘어, 그의 아들들이 자신들이 될 필요를 깨닫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한 아들들에게 그의 사랑과 '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들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완결될 것인가는 그들에게 달려있다. 비유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이 이야기의 적절한 완성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랑은 오직 그분 자신에게 속해있고 그분의 속성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셰익스피어가 어느 짤막한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사랑이 어떤 변화를 발견할 때에 변경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나는 이미 나의 상을 받은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큰 아들이 회심을 할 수 있는지가 매우 중대한 의미로 다가온다. 예수님이 가장 비판적이었던 그 그룹이 내 안에 무척 많이 자리하고 있다. 즉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다. 나는 책들을 연구했고, 법에 대해 배웠으며, 자주 나 자신을 종교문제의 권위로 내세우곤 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큰 존경을 표현하고 나를 “경애하올” 신부님이라고까지 칭한다. 나는 경의와 칭찬, 돈과 상, 엄청난 박수갈채로 보상을 받아왔다. 나는 여러 다양한 형태의 행동을 비판하고 자주 다른 이들을 판단해왔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할 때에, 나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며 예수님에게서 트집을 잡아내는 그 사람들에게 가장 가깝다는 의식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고 그분의 집에 환영받는다고 느끼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독선적인 불평에 빠져서 깊은 갈망과 반대로, 분노와 원망 속에 뒹굴면서 집의 바깥에 남아있는 쪽으로 기울 것인가?

예수님은 말한다: “행복하여라 지금 가난한 사람들...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루카 6,20-21). 그러나 나는 가난하지 않고, 굶주리지 않고, 울지 않는다. 예수님은 기도한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루카 10,21).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나는 분명히 속해 있다. 예수님은 사회에서 주변머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뚜렷한 선호를 보인다. –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그리고 죄인들 – 그러나 나는 확실히 주변머리에 있지 않다. 복음으로부터 나에게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질문은 이렇다: “나는 이미 나의 상을 받은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마태 6,5) 사람들에게 매우 비판적이다. 그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기도에 관한 나의 모든 글과 연설 그리고 내가 즐기는 모든 명성을 보면, 복음의 말씀들이 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참으로 그들은 그렇다. 그러나 큰 아들의 이야기는 이 모든 괴로운 질문들을 새로운 빛 속에 넣는다. 하느님께서 작은 아들을 큰 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매우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비유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큰 아들을 마중하러 나가고 들어오라고 재촉하며 말한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유보하지 않는 사랑

여기에서 내가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내 자아의 중심으로 꿰뚫고 들어오도록 해야 할 말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나를 “아들아!” 하고 불렀다는 것이다. 루카 사가가 여기에서 쓰는 말은 그리스어로 ‘아들’이란 의미인 ‘테크논(teknon)’인데, 이 말은 “애정이 가득한 청원의 형태”라고 한 학자가 말한다. 문자 그대로 변역하자면, 아버지가 한 말은 “얘야!”의 뜻이다.

이러한 애정 어린 접근은 뒤에 따라오는 말에서 더 명료해진다. 큰 아들의 거칠고 원망스러운 비난은 판단의 말과 마주치지 않는다. 비난이나 규탄이 없다. 아버지는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고 큰 아들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는 아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모든 평가들을 넘어 직접적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때에 더 분명히 그렇다: “너는 나와 늘 함께 있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언은 작은 아들이 큰 아들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말소시켜 버린다. 큰 아들은 집을 떠난 적이 없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큰 아들과 나누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자신의 일상 삶의 부분이 되게 했다. 아무것도 큰 아들에게 유보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다.” 하고 아버지는 말한다. 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이보다 더 명료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처럼 아버지의 유보하지 않고 한계가 없는 사랑은 두 아들에게 전적으로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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