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기쁨과 원망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상태바
[돌아온 탕자] 기쁨과 원망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9.03.12 12: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6] 큰 아들의 귀환-4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큰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하며 했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볼 때에 - 독선, 자기연민, 질투의 말들 - 나는 더 깊은 불평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결코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불평이다. 그것은 은근하게 그리고 그다지 은근하지 않은 수많은 여러 방식으로 표현된 불평으로서, 인간적 원망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외치는 불평이다: “나는 너무나 열심히 노력했고, 오랫동안 일했으며, 많은 것을 했지만, 아직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손쉽게 얻는 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하지 않고, 나를 초대하지 않으며, 나와 놀아주지 않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가? 삶을 매우 쉽고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나 많은 관심을 두면서.”

이렇게 표현되는 불평이나 표현되지 않는 불평 속에서 나는 내 안의 큰 아들을 알아본다. 자주 나는 작은 거부, 작은 불공손함, 작은 무관심에 대해 불평하는 자신을 파악한다. 내 안에서 중얼거림, 넋두리, 푸념, 투덜거림, 애도, 근심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심지어 내 의지와도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을 계속 발견한다.

불평하는 사람과는 함께 살기가 힘들다

제기되는 문제에 더 머물수록, 나의 상태는 더 악화된다. 문제를 분석할수록 나는 불평할 근거를 더 발견한다. 이 내적 불평으로 이끄는 어마어마하고 어두운 세력이 있다. 다른 이들에 대한 독선과 단죄, 자기 단죄와 자기 거부가 이전보다 더 사악하게 계속 서로를 괴롭힌다. 나 자신을 그런 세력에 내맡겨 버릴 때마다, 그것은 나를 자기 거부의 끝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어 빙빙 돌려댄다. 이러한 불평의 거대한 내면의 미로에 그냥 끌려갈 때에 나는 점점 더 상실되고 마침내 끝에 가서는, 나 자신이 가장 오해받고, 가장 거부당하고 무시되며,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내가 확신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불평이 자아 속에 파고 들어오면 결코 새로운 창조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동정심을 자극하고 내가 너무나 갈망하는 만족감을 얻으려는 희망에서 불평을 표현할 때마다, 그 결과는 항상 내가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타난다. 불평하는 사람과는 함께 살기가 힘들다.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표현하는 불평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매우 소수이다. 비극은, 일단 표현되는 분노가 자주 가장 두려운 결과로 이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더 큰 거부라는 결과이다.

두려움에서 불평으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의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큰 아들의 무능력은 꽤 이해할만하다. 그가 들에서 집으로 왔을 때, 음악과 춤소리가 들렸다. 그는 집에서 무슨 기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즉시, 그는 의심스러워졌다. 우리 안에 자기 거부의 불평이 생겨나면, 즐거움조차 우리 안에 더 이상 즐거움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우리의 자발성은 없어지고 만다.

비유 이야기는 말한다: “하인 한 사람을 불러, 큰 아들은 무슨 일 인가를 물었다.” 거기에는 내가 다시 제외되었다는 두려움,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두려움이 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밖에 쫓겨나 있다는 두려움이. 불평은 즉각적으로 소생한다: “왜 나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는가,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일인가?”

의심하지 않는 하인은 흥분에 들떠서 열심히 기쁜 소식을 나누고 싶어 설명한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의 외침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안도와 감사가 아니라, 하인의 기쁨은 그 반대를 일으킨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기쁨과 원망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음악과 춤은 큰 아들을 기쁨으로 초대하는 대신, 그에게 더 큰 위축감을 불러일으킨다.

원망이 가득 찬 마음

나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다. 한번은 꽤 외로움을 느껴서, 친구에게 함께 외출하자고 청했다. 그는 시간이 없다고 대답했다. 몇 시간 뒤에 우연히 파티가 한창인 친구의 집에서 그를 보게 되었다. 나를 보자, 그는 말했다. “어서 와요, 우리와 합석합시다. 만나니 좋습니다.” 그러나 파티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해 화가 잔뜩 난 나는 거기에 머물 수 없었다.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호의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의 모든 내부의 불평이 떠오르기 시작하였고, 나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완전히 무기력에 빠졌다. 그곳에 있었던 기쁨을 받아들일 수도 참여할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그 방의 즐거움은 원망의 실마리가 되었다.

즐거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이 경험은 바로 원망이 가득 찬 마음에 대한 경험이다. 큰 아들은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아버지의 기쁨을 나눌 수 없었다. 큰 아들의 내적 불평은 그를 마비시켰고 어둠이 그를 삼키도록 만들었다.

렘브란트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기쁨 속에 받아들여지고 있던 단상의 오른쪽에 서 있는 큰 아들을 그렸을 때 이런 경험의 가장 깊은 의미를 느꼈다. 그는 연주가들과 춤추는 사람들이 있는 잔치를 묘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아버지의 기쁨을 표현하는 외적 상징에 불과했다. 잔치를 보여주는 유일한 상징물은 여성 한 사람이 기대어 있는 벽을 파서 그 안에 피리 주자를 앉혀놓은 모습뿐이다. 잔치대신, 렘브란트는 빛을 그렸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덮고 있는 빛나는 밝은 빛이다. 렘브란트가 묘사한 즐거움은 아버지 하느님의 집에 속하는 평온한 기쁨이다.

어둠속 바깥에 서 있는

비유 이야기에서 우리는 큰 아들이 어둠속 바깥에 서 있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행복한 소리가 가득 찬 빛의 집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집도 들판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어둠과 빛으로만 이 모든 것을 그려낸다. 모든 음악과 춤이 그곳에 있다. 큰 아들은 들어오기를 거부하면서, 이 사랑의 원 바깥에 서있다. 그의 얼굴에서 보이는 빛은 그 역시 빛에 초대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리지만, 큰 아들에게 거기에 응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묻는다: 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아버지에게 설득되었는가? 그는 마침내 집으로 들어가서 잔치에 참여했는가? 그는 동생을 끌어안고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집에 돌아 온 것을 환영했는가? 큰 아들은 같은 식탁에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둘러앉아 잔치 음식을 즐겼는가?

렘브란트의 그림도 비유도 우리에게 큰 아들이 마지막에는 기꺼이 발견되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큰 아들은 그 역시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기꺼이 고백했을까? 그가 동생보다 더 낫지 않다고 기꺼이 인정했을까?

나는 이런 질문들과 함께 홀로 남았다. 작은 아들이 어떻게 잔치를 받아들였으며, 돌아온 후 아버지와 함께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모르는 것처럼, 큰 아들이 작은 동생과, 아버지와, 혹은 그 자신과 어떻게 화해했는지 나는 모른다. 흔들리지 않는 확실함을 갖고 내가 아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것은 한계가 없는 자비의 마음이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