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원망 속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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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원망 속에서 길을 잃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9.03.04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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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15] 큰 아들의 귀환-3

나는 원망과 회한, 분노가 가득 찬 사람이 타락한 작은 아들보다 영적인 의미에서 내 모습과 더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럼에도 큰 아들에 대해 더 생각할수록, 나는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더 알아본다. 가족안의 맏아들로서 나는 모범적인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고 있다.

도망가는 용기

나는 자주 특히 맏아들들이 부모의 기대에 맞게 살아가고 복종하며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은 자주 부모를 기쁘게 하고 싶다. 그들은 자주 부모에게 실망을 일으키는 존재가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맏아들들은 또한 자주 꽤 어렸을 때부터 그들의 남동생이나 여동생들에게 어떤 시기심을 경험한다. 동생들은 부모를 만족시키는 일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고 “그들 자신의 일을 하는데” 훨씬 더 자유로운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보면, 확실히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나는 감히 살아보려고 시도하지 못했던 불순종하는 삶에 대하여 묘한 호기심을 마음속에 품어왔다. 그런데 불순종하는 삶은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적절한 것들을 다 했다. 이런 적절한 일들은 대부분 내 삶에서 수많은 부모의 모습을 띈 사람들이 정해준 안건들에 의한 것이었다. – 교사들, 영적 지도자들, 주교들, 그리고 교종들 – 그러나 또한 동시에 자주 작은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망가는” 용기를 내가 왜 가질 수 없었는지 의아해했다.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작은 아들이 부럽다-시기심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고분고분 하지 않은 아들에게 느끼는 시기심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내가 단죄하는 온갖 일들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누리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에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정서이다. 나는 그런 친구들의 행동을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고 심지어 비도덕적이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왜 내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배짱이 없는지 자주 궁금해 했다.

나는 복종적이고 책임 있는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아니면 칭찬받을만 하다고 느꼈으나, 때때로 나의 어깨에 놓여진 그리고 계속 나를 짓누르는 짐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받아들일 때에도 결코 내가 던져버릴 수 없는 짐이라고 여겼다. 나는 이렇게 불평하는 큰 아들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좀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불평 속에서는, 복종과 책임은 짐이 되어 버리고, 섬김은 노예살이가 된다.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 없이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된 한 친구가 나에게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을 때 이 모든 상황은 나에게 매우 실제 상황이 되었다. 나는 혼자 말했다. “그가 감히 기도에 대해 나를 가르치려고 하다니! 수 년 동안 그는 걱정 없이 마음껏 살아왔지만, 나는 아이 때부터 신앙의 삶을 철저하게 살아왔는데. 이제야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는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하네!” 이러한 내면의 원망은 나 자신의 “잃어버림”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집에 있었고 방황하지 않았으나, 여지껏 나의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나의 분노와 질투는 나 자신의 굴레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나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여전히 집에 머물면서도 자신들을 잃어버린 수많은 큰 아들들과 큰 딸들이 있다. 그리고 이 잃어버림 – 판단과 단죄, 분노와 원망, 회한과 질투가 그 특징인 – 은 인간의 마음에 너무나 큰 해독을 끼치고 손상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자주 확실하게 볼 수 있고, 때로는 구경꺼리가 되기조차 하는 행동들을 놓고 잃어버림, 상실에 대해 생각한다.

작은 아들은 우리가 쉽사리 알아 볼 수 있는 형태로 죄를 지었다. 그의 잃어버림은 매우 분명하다. 그는 돈과 시간, 친구들, 자신의 몸을 잘못 사용했다. 그가 했던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물론 알았다. 그는 도덕에 반항하는 행동을 했고 자신의 쾌락과 탐욕에 온통 내맡겼다.

 “의로운 사람들”에게 있는 너무나 많은 원망

그의 나쁜 행실에는 매우 명쾌하고 선명한 부분이 있어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서, 그의 모든 고분고분하지 않은 행동이 비참함만을 가져오게 되었을 때, 작은 아들은 제 정신이 돌아왔고, 아버지께 돌아와 용서를 청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전적인 인간의 실패를 본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직하고 솔직한 해결책이 있다. 이해하고 공감하기가 매우 쉽다.

그러나 큰 아들의 잃어버림은 알아차리기가 훨씬 더 어렵다. 한 마디로, 그는 모든 올바른 일만 했다. 그는 복종하고 책임을 완수하며, 법을 준수하고 열심히 일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고 칭찬했으며 놀라워했고, 그를 모범적인 아들이라고 여겼다. 외적으로 보면, 큰 아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나 작은 동생이 돌아오자 터져 나온 아버지의 기쁨과 마주쳤을 때, 어두운 세력이 그 안에서 뿜어 나와 표면으로 올라왔다. 갑자기, 원망에 가득차고, 자만심, 불친절, 이기심을 지닌 인간을 우리는 눈부시도록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어둠은 매우 깊숙이 숨겨져 있었지만, 수 년 동안 점점 더 강력해지고 더 세력이 커져 있었다.

나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나서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삶도 바라보며, 나는 쾌락 아니면 원망, 원한 중에 어떤 것이 더 손상을 끼치는지 알고 싶어졌다. “올바른 사람들” 그리고 “의로운 사람들” 중에는 너무나 많은 원망이 존재한다. “성인들”중에 너무나 많은 판단, 단죄, 그리고 편견이 존재한다. “죄”를 피하는 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음장 같은 분노가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원망스러운 “성인”의 잃어버림은 정확하게 집어내기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하고, 덕스러워지고자 하는 갈망 속에 매우 가까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삶을 볼 때에, 착하고, 받아들여지고, 호감을 느끼고,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되려고 내가 얼마나 부지런히 노력해 왔는가 알 수 있다.

죄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과 유혹에 떨어질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두려움이 항상 있어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함께 따라오는 것은 진지함, 도덕적인 열렬함 - 그리고 약간의 광신주의까지 - 이었고 그 결과 나의 아버지의 집에서도 편안함을 느끼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갔다. 나는 더 부자연스러워지고, 자발성이 줄어들며, 즐거움도 사라져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점점 더 “무거운”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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