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시민에게, 애국심과 국가주의는 다르다
상태바
가톨릭 시민에게, 애국심과 국가주의는 다르다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03.04 15: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동체 안의 평신도 -2

[성서 말씀 읽기]

마르꼬 12,13-17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베드로전서 2,13-17 하느님의 종다운 생활

[성 찰]

2차 바티칸 공의회 : 현대세계의 사목 헌장 :

“모든 그리스도 신자는 정치공동체 안에서의 특별한 고유사명을 느껴야 한다. 이 사명은 신자들이 의무에 대한 책임의식과 공동선에 대한 봉사의 빛나는 모범이 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권력과 자유, 개인의 창의와 사회단체의 연대성과 그 요구, 필요한 통일성과 결실많은 다양성이 어떻게 조화될 것인지를 실제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75항)

미국 주교회의 : 평화의 도전 :

“애국심이란 덕이 의미하는 바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조국을 존경하고 명예롭게 여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우리의 사랑과 충성심은 세상사에 있어 애국심의 역할을 주의깊게 또 정규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그리고 애국심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도록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초점]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였던 세계 각국교회의 주교들은 "가톨릭인들이 적극적인 시민으로서 행동하기"(현대세계의 사목헌장 75항)를 권고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체로 가톨릭인들은 자신들을 방관자로 자처하고 시민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주저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모든 종교적 책임은 교회의 전문가들에게 위임되어 있다. 또 공동선에 관한 일도 정치가들에게 일임하는 성향이 강하다. 시민들에겐 선거권이 주어져 있으나 공공활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격려받는 일은 드물다. 교회에서나 실제 공공 활동에 있어 보통사람들은 매우 무력하게 느껴지고, 쉽사리 고립되거나 방어적이 되는 것이다.

종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신앙인들이 각자 살고 있는 조국의 특징과 도덕을 주도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하느님 안의 국가“, 하느님의 새로운 민족을 꿈꾸며,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와 자유의 공동체를 건립하려는 국가적 운명을 함께 겪고 있다. 또 국부들은 사적인 이익과 공동선 사이에 긴장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공동선에 기초한 국가를 구상했을 것이다. 공동선을 위해 희생하고 또 공동선을 완성하려는 의욕에 기초한 시민의 덕이 없다면, 국가는 혼란스럽게 조각날 것이고 아마도 독재자의 지배로 낙착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철학은, 개인들에게 그들의 사적인 이익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방도를 제공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시민들의 복지와 물질적 안녕에 관한 정부의 강력한 책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중요시하고 있다. 정부의 강화된 보수화 추세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사적인 차원으로 밀어냈다. 이처럼 우리는 정치적 개인주의와 경제적 개인주의 모두를 극복해야 할 싯점에 와 있다. 이 두가지 조류에는 모두 상호배려와 공동선이라는 공공덕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시민권

도덕적 이상으로서 시민권은 공공생활과 그 참여에서 교회와 개별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형성시켜 준다. 우리는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데 필요한 공동선에의 투신으로 자원봉사자에서 시민으로 옮겨간다. 시민이란 타인의 존엄성과 사회전체의 복지에 관한 배려를 사적인 이익과 개인적인 관점보다 위에 두는 사람들이다. 정의는 시민권을 이끌어가는 목표가 된다. 자선으로부터 정의의 차원으로 옮긴다는 것은 대다수의 우리 모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시민의 입장과 그리스도인의 입장 사이에는 항상 어떤 긴장이 있어왔다. 이 긴장은 그리스도교의 가치관과 갈등관계에 놓이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서, 그리고 교회의 보편성으로부터 형성된다. 예를 들면 핵무장 해제에 관한 어떤 교회의 사목 방향과 그에 따르는 평화 노력들, 그리고 타국가에 더 깊이 개입하는 자국의 공공정책 사이에서 우리는 이런 갈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참다운 애국심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더 높은 이상과 목표에로 초대할 수 있다. 어떤 그룹들은 자신의 종교적 활력을 지나치게 애국심과 밀착시킨 나머지, 초월적인 시각을 잃어 버리게 된다. 또 다른 극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로부터 그리고 정치적 과정과 전적으로 결별하는 개인신심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의 사회화에 강하게 반발한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어떤 구룹들은 모든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가치관을 강요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얻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공동선과 악에 관한 어떤 특정한 그룹의 신념을 이런 방식으로 강화하거나, 혹은 어떤 구룹의 개인적 이익과 하느님의 뜻을 일치시키는 방식들은 모두 공공도덕에 어긋나는 것이다.

진정한 애국심(애국주의)은 세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자기조국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인간적 배려이다.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안녕을 원하며, 특히 가장 가난하고 가장 착취당하며 가장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로, 우리의 땅과 물, 공기 그리고 환경에 대한 깊은 존경이 필요하다. 집이 있는 이 환경 속에서 우리는 살고 일하며 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정의와 자유에 관한 우리의 이상에 투신하는 것이다.

미국 주교들은 경제사목지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민권의 덕목들은 오늘날 상호의존적인 이 세상 속에서 그 어느때보다 더 치명적으로 중요한 그리스도교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66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시민의 도덕적 의무를 정의내리고 가르치는 것조차 자주 실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쇄신되는 공공생활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공공생활이 어떻게 신앙의 핵심과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예를 들면, 일관성있는 삶의 윤리와 공동선의 윤리가 공공의 영역에 관한 우리의 양심과 선택에 있어 어떻게 새로운 도덕적 비젼을 세워줄 수 있을 것인가? 시민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고 악하고 불공평한 공공정책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공공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시민들은 적어도 사회의 공동선을 의해 일하는 단체들에 그들의 시간과 능력을 투자해야 한다.

애국심은 쉽사리 국가주의로 변할 수 있다. 시민들은 전 인류가족의 선을 향상시키는 데에 도덕적인 책임을 지닌다. 시민들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비인간화시키는 잘못된 공권력을 비판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민권운동, 징집거부 그리고 자연 보호 운동에서 보듯이 시민불복종의 도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불복종은 정부의 정책이나 법률에 변화를 가져오려는 의도 아래 법에 저항하는, 공적이며 비폭력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대다수 사람들의 정의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믿으며, 법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주교회의는 󰡔우리시대의 인간생명에 관하여󰡕라는 사목교서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민주체제하에서 반대라는 기본적인 권리는 결코 거부될 수 없으며, 정부 공공정책의 결정에 관하여 도덕적 정치적 원칙에 따르는 합리적 논쟁을 하는 권리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공공정책의 구체적인 주제들을 책임성있게 분석하는 것은 시민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공공생활에 관한 신학은 우리가 함께 살고 행동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교회는 다양성을 무시하지 않고 우리가 원래 창조된 목적인 일치를 사람들이 표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공공생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관의 갈등이나 한정된 자원에 관한 체험들 때문에 우리는 공공생활로부터 움츠러든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매우 다른 존재들이지만 상호의존적 관계로서 공동선을 찾는 집단들이라는 인식이 이러한 일치를 찾아내는 데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갈등, 긴장 그리고 고통을 대면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의 세계 속에서 연민의 가능성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경쟁의 세계에 참여하는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길이 고통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 고통이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매우 자주 우리는 우리사회의 부서짐에 대한 반응으로서 공동체를 만든다. 일치를 위하여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변화와 참여를 지향하는 공동체보다 뒤로 물러나 있는 공동체들은 공공생활에 오히려 위협이 된다. 갈등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사람들은 문제를 통하여 공개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불일치를 감추려고 한다. 공동체의 역할은 우리자신으로부터 벗어나 공동생활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공공생활의 진수는 다양한과 차이점들 너머에 있는 일치를 알면서도, 우리 자신들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다양한 체험을 공적인 용어로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예배는 그러므로 공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전례는 사회와 세계의 전반적인 선에 대한 책임감을 우리가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전례의 대부분은 공공문제에 대한 충실한 행동에 관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영역에 촛점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관상은 우리의 행동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행동은 관상을 더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다.

참다운 전례는 우리 생활의 사회적 차원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기도와 관상을 사회화시켜야 하며, 그렇게하여 하느님의 뜻에 관한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대조해 볼 수 있다. 일상생활과 연결되지 않은 전례는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격리 시킨다. 성찬례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우리들의 사명을 기념하고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안에 사는 거룩한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는 민권운동이나 경제정의 혹은 세계평화를 위한 움직임이 우리 본성안에 뿌리박은 하느님의 요청임을 깨닫는다. 교부들은 교회가 공공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표양을 보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눔과 성찰]

1. 나는 먼저 한국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들의 기본 원천은 무엇인가?
2. 나는 우리 정치문화의 가치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관들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또 균형을 잡는가?
3. 시민불복종 운동에 관한 내 느낌은 어떤가? 어떤 분야에 나는 시민불복종을 실천할 것인가?

[행동을 위한 초대와 응답]

◦ 우리사회의 가치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관들이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어떤 분야(주제)에서 나는 나의 양심을 어떻게 책임있게 형성할 것인가?

◦ 공공생활에의 적극적인 참여와 영적인 생활을 나는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출처] <일상생활의 복음화-공동체안의 평신도>,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