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예수님 악보대로 연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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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님 악보대로 연주하는가?
  • 이기우 신부
  • 승인 2019.01.2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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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 2019.1.27] 느헤 8,2-4ㄱ.5-6.8-10; 1코린 12,12-30; 루카 1,1-4; 4,14-21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1.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는 동안 철이 들기 전까지는 타인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철이 들면 비로소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알고 타인을 배려할 줄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를 희생하여 타인을 돕거나 세상을 위해 살아가려는 성숙한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인류도 처음에는 온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해 왔으나 우주를 관측하고 별들의 궤적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본 결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음을 알게 되지요. 오늘날에는 태양계조차도 은하계 안의 변방이며 은하계 또한 공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인류가 지구 중심적 우주관을 깨우치게 만든 생각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합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2. 불교나 유교 같은 고등 종교에서도 아직 인정하지 못하는 인격적 신의 존재를 인류 역사상 처음 드러낸 사건은 이집트 탈출 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등장한 종교가 유다교였습니다. 이 세상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요 인격적인 창조주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으며,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당신의 계획을 계시로써 알리시고 그 계획에 따라 인류가 역사를 진보시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린 유다교의 출현은 인류 정신사에 있어서 첫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자 선택하신 무리는 히브리들로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들이었습니다. 이집트 민족에 비해 수효도 적고 보잘것없이 가난한 무리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어 만방에 구원의 진리를 전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시나이 광야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고 그 결과로 십계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십 년 동안 노예근성을 졸업하고 자유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갖추도록 양성을 시키셨습니다.

사십 년이 흐른 다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시고 열두 지파에게 땅을 거저 분배해 주셨지만, 갈수록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 신앙은 약화되어갔습니다. 급기야 마지막 판관이자 예언자였던 사무엘을 졸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주변 이방 민족들의 제도를 본따서 왕정제도와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여 국가 체제를 튼튼히 하고자 하였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왕을 비롯한 지배층과 이를 본딴 백성들의 신앙은 약화되어갔습니다.

약화된 신앙에서 온갖 죄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왕국의 분열, 두 왕국의 경쟁적인 우상숭배, 착취와 억압 그리고 그 결과는 멸망과 바빌론 유배였습니다. 두 번째 종살이가 시작된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왕국과 앗시리아 왕국은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왕과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을 모조리 학살해 버렸고,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부역해야 했습니다.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70년이 흘러 유배가 끝난 후 변변한 지도자도 찾기 어려워진 형편에서 사제 출신의 에즈라가 진두지휘하여 율법을 백성 앞에서 성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해서는 종교와 사상의 정비 작업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두 번째로 종살이를 하게 된 이유가 하느님의 법을 소홀히 한 때문이라는 뼈저린 반성을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3. 하지만 그 이후 사, 오백 년 동안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쇄신되지 못했고, 그 대신에 바리사이 운동 등을 통하여 형식적인 종교 전통을 강화하고 율법 규정을 복잡하고 까다롭게 만드는 가운데 그리스계 왕조의 지배를 거쳐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까지 받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제 나라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어 버렸는데도 당시 유다교를 움직이던 사제 계층이나 율법 학자 계층에서는 도무지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수수방관하고 있었고, 로마의 지배와 이스라엘 지배층의 착취에 저항하려는 민중의 적대감은 폭발 직전에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임박한 파국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한 때가 이때이고, 예수님께서 활약하신 때가 이 무렵이었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4.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에 앞서서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내다본대로 메시아의 사명을 당신의 사명으로 천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이 말은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천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인격적 유일신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신이 역사를 이끌고 계시다는 유다교의 선언은 이제, 그 하느님을 흠숭하는 길이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 길임을 선포하는 예수님에 의해서 두 번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는 길로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더욱 강조하는 뜻으로, 이 사랑의 실행 여부로써 최후의 심판을 행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비유 가르침을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그 정성으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행해야만 하느님 나라가 앞당겨지는 것임을 설파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원하고 축복을 받기를 기대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나보다 못한 이들에게 배려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라는 것이 종교의 본격적인 혁명이라면, 그렇게 새로운 하느님 섬김의 방식으로서 세워진 것이 공동체로서의 교회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임을 대전제로 했을 때,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과 여러 봉사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공동체적 조직처럼 효율적인 도구를 인류는 아직까지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임을 몸소 솔선수범하여 가르치는 이들이고, 예언자들은 시대적 상황을 식별하여 무엇이 어떻게 가난한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식별하는 이들이며, 교사들은 서로가 힘을 합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회 안에서 가난이라는 악을 몰아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이들입니다. 또한 여러 봉사자들은 가난한 이들이 처한 삶의 위기를 스스로 타개할 수 있도록 돕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최상의 역사적이고 발명품이요 사회적인 창안입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제1명제가 소홀히 되다 보니 교회는 역사상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무능한 도구가 되어버렸을 뿐입니다.

무릇 모든 건축물은 설계자의 의도대로 시행되어야 안전하며 모든 음악 역시 작곡자의 의도대로 연주되어야 아름다울 수 있듯이, 교회라는 하느님의 도구 역시 예수님의 설계대로 지어지고 악보대로 연주되어야 제 기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의 직분에 따르는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소명과 취향에 따른 재능과 은사가 무지개처럼 조화롭게 발휘되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한반도의 북녘과 만주 땅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색과 명상에 능한 사상가들, 관습과 제도를 연구하고 공존의 양식을 발견해 내는 데 능한 연구자들, 봉사적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 능한 봉사자들,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능한 경영자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 능한 모험가들이 이 뜻깊은 교회적 지향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우리 교회는 분명히 새로운 활력으로 충만해지리라고 믿습니다.

이기우 신부
영원한도움의성모회 파견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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