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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2019 겨울세미나 스케치


2019 겨울 가톨릭일꾼 세미나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성베네딕도 성요셉수도원에서 지난 1월 19, 20일 양일간 열렸다. 이번 세미나에는 30여 명이 참석했다.

첫날 밤 11시까지 이어진 토머스 머튼 강의는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이 3시간 넘게 진행하였다. 11시부터는 공동숙소로 돌아와 '경매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참석자들이 가져온 물건을 경매에 붙이고, 그 이익금을 전액 사회운동 일꾼이나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에는 한상봉 코디네이터가 헨리 나웬의 삶과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수도원 주일미사에 모두 참석하였다.

이날 오후에는 렘브란트에 대한 소개에 이어, 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 집중되었다. 마지막 강의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번 세미나는 오는 5월 가톨릭일꾼 창립 3주년을 앞두고 일꾼의 영성적 기반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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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1(성인됨에 관하여): 19일 저녁 3시간
하느님을 찾아가는 신앙, 토마스 머튼
_강사: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회심

“너는 나의 고통과 가난의 진정한 고독을 맛볼 것이고, 나는 너를 내 기쁨의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너는 내 안에서 죽을 것이고 모든 것을 나의 자비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이 목적을 위하여 너를 창조하였고 너를 쁘하드로부터 생엉토낭으로, 오컴으로, 런던으로, 케임브리지로, 로마로, 뉴욕으로, 컬럼비아로, 코퍼스 크리스티 성당으로, 세인트 보나벤투라 대학으로, 겟세마니에서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씨토 수도원까지 오게 하였다. 네가 하느님의 형제가 되고 불에 탄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_<칠층산> 에필로그

 

고독과 공동체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야만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은수자(隱修者)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도적 고독 생활의 유일하게 정당한 이유는 그 생활이 하느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확신뿐이다.” _<새 명상의 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약점과 부족을 이해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진정한 관상가가 되는 데에 도움을 될 수 있다. 우리의 뿌리 깊은 이기주의의 경직성과 가혹함 그리고 조악함 없애는 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_<새 명상의 씨>

“내가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부드러움을 찾는 것은 깊은 고독 속에서다. 내가 고독할수록 그들에 대한 나의 애정도 깊어진다. 그것은 순수한 애정이며, 타인의 고독을 존중하는 것이다. 고독과 침묵은 내게 형제들이 하는 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로 인해 사랑할 것을 가르쳐준다.” _<요나의 표징>

“내가 하느님과 더 많이 일치될수록 하나님과 일치된 모든 다른 사람들과 더욱더 일치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 _<새 명상의 씨> 

수도자와 세상

“세상을 선택하는 것은 세상을 더 낫게, 더 자유롭게, 더 정의롭게, 더 살만하게, 더 인간적으로 만들기 위해 형제들과 협력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세상의 거부와 경멸은 선택이 아니라 선택의 회피이다.” _<Contemplation in a World of Action>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_1958년 8월 14일, <시간>

 

일꾼들을 위한 기금마련 경매 프로그램


수도원 주일미사 : 20일 오전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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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2(하느님의 자비): 20일 오전 1시간, 오후 2시간
인간에게 기도하는 하느님, 헨리 나웬
_한상봉 (가톨릭일꾼 편집장)

무조건 사랑하시는 아버지

헨리 나웬은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유일한 권위는 ‘연민’이라고 말한다. 이 권위는 자녀들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찌르도록 놔두는 데서 온다. 그분의 마음에 엄청난 슬픔을 일으키지 않는 잃어버린 자녀들의 욕망, 탐욕, 분노, 원망, 질투, 복수는 없다. 그 슬픔을 감당하는 아버지에게서 헨리 나웬은 자신이 믿고 싶은 아버지를 발견한다.

“창조의 시작부터 자비로운 축복 속에 팔을 뻗치는 아버지,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항상 기다리기만 하는 아버지, 실망 때문에 팔을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으며 다만 자녀들이 항상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아버지, 그리하여 그들에게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피곤한 팔을 그들의 어깨 위에 얹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 그분의 유일한 갈망은 축복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렘브란트 그림에서 발견하는 영적 삶의 마지막 단계는 아버지에 대한 온갖 두려움을 놓아버리고, 그 결과 우리가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기로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영원한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고, 나의 삶에 대해 아버지가 있음을 핑계로 삼을 수 없다. 나는 감히 나 자신의 손을 뻗쳐 축복을 해야 하고, 나의 아이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든지, 그들을 최고의 연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연민이 충만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영적 삶의 마지막 목표이다.”

예수님이 말했던 가장 본질적인 선언은 이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나의 약점을 눈감아주시니, 내가 무엇을 하든 놔두리라 계속 희망하게 된다. 이런 낭만적 감상주의는 복음 메시지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그러므로 나는 나의 아버지 집으로 걸어 들어가 그분이 나에게 주었던 똑같은 연민을 다른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운명이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버지가 되라는 도전이다.

 


세션3(하느님과 인간의 다리): 20일 오후 3시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_한상봉 (가톨릭일꾼 편집장)

학창시절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마음으로 아예 떠나보낸 두 명의 작가가 있다. 김지하와 이문열이다. 김지하의 모든 시어가 내 영혼을 열뜨게 만들었다. 굳이 <타는 목마름으로>나 <황토길>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그의 후기 시어인 <애린> 연작시도 마음에 와서 닿았다. 더구나 <남녘땅 뱃노래>나 <밥>은 혁명과 시를 통합시키려는 갈망을 낳았다. 이제는 시인도 사상가도 아닌, 동학도 가톨릭도 아닌 김지하를 아프게 언 땅에 깊이 묻었다.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나의 소박한 생각을 어둠에 묻어버렸다.

고3, 입시준비를 하며, 예수고난회 성소자 모임에 나가던 때였다. 수학을 포기한 나는 수업시간에 수학책 뒤에 소설을 껴서 읽었다. <어둠의 자식들>, <만다라>, <사람의 아들>. <만다라>(한국문학사, 1979)에서 지산 스님은 절집에서 나무 부처를 깎았다. 그 얼굴이 하도 일그러져 흉측한 부처를 보고 법운 스님이 묻는다. “부처 얼굴이 왜 이래요?” 땡중으로 유명했던 지산이 답한다. “중생들이 모두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부처인들 온전할 수 있겠나?”였다. 부처란 모름지기 고통받는 중생과 더불어 고통받고, 슬퍼하는 중생과 더불어 슬퍼한다는 말이다. 신학자 칼 라너는 하느님을 ‘근심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몰트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어갈 때 하느님도 함께 고통받고 죽었다고 말한다. 누군가 후미진 골목에서 울먹이고 있을 때 하느님도 그와 더불어 가슴을 찢고 계시다는 전갈이다.

 

신형철은 “인간이 배울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라고 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뛴다. 내 심장은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그래서 신형철은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한계 앞에서 인간은 마땅히 슬퍼해야 하며,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그 사람의 심장은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 된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충분히 다가서지 못하고 매번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거든 슬픔을 통해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 치러지는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라고 말한다.
 

사진: 조성훈, 이정화, 하상희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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